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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백장미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드러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이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벽했다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우아하게 지는 법, 그게 일생 도달해야 할 지점인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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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게 그것들을 조금 떼어
줄 테지만 나는 우리 사이에 잠깐 담 없었음만이
무한히도 기뻐서
사이다 병 조각이 박힌 담장
당신은 나의 담장을 빌려서 다시 도둑고양이 두
마리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느라 담장 위에 꽂
힌 칠성사이다 병 조각은 모조리 깨어져 나가고 내
집의 망치와 끌과 사다리는 늘 골목 밖에 널브러졌어
요 나는 비린 조기를 훔쳐 온 고양이들에게서 고단
한 입 냄새를 임차료로 받았습니다 밤에 정전이 찾
아온다면 가로등 대신 병 조각 대신 별들이 담장
위에 박힐 테지요 당신은 내게 그것들을 조금 떼어
줄 테지만 나는 우리 사이에 잠깐 담 없었음만이
무한히도 기뻐서 밤새 한 걸음도 걸어나가지 않고
컴컴한 안구 뒤로 기꺼이 침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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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박힌 자리를 계속 들이받으며
내게 묶인 말뚝을
철
저히 뒤
흔든
포르테 아 포르테
- 비탈에 묶인 염소에 대한 전언 1
길바닥을 씹어먹는 파쇄기처럼
나는 종이를 씹는다
덩어리덩어리 뒤로 쏟아낸다
파쇄된 아스팔트 길이 굴러떨어져
눅진하게 발 끝에 걸려 있는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
따위
끝내 당신을 파쇄하지는 못할 거라는
오만
한
미소까지
버팅기는 완강한 힘과
휘어진 뿔로 당신의 직선 길을
철저히 썰
고 씹
고 삼켜주마
나는 흰자위 없는 노란 눈알을 깜박이지도 않고
당신을 노려본다 보는 것만으로 죽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철저한 믿음으로
만면에 띤 당신의 웃음을 멍석처럼 말고 있다
땡볕 언덕에 묶인 채 서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당신이 박아놓은 녹슨 말뚝
붙박힌 자리를 계속 들이받으며
내게 묶인 말뚝을
철
저히 뒤
흔든
다 무릎 꿇어본 적이 없는 다리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부동의 자세로
그리고 땅은 천천히 염소를 뿜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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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안 입은 옷을 버리는 순간처럼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살기로 해요
마당에 고인 고요를 풀어주는 만큼씩만 무너지기로 해요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어딘가에 있겠지만 아무데도 없는
당신은 꽃의 늑막을 당겨 피냄새를 맡아요
돌아갈 수 없는 시초에서 꽃은 태막에 휩싸이네요
화요일에 미뤄 뒀던 일을 시작하려 해요 당신은
충분히 저물지 않았네요 상관없이 도마뱀 꼬리가
몸부림치지만요 버려진 것들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데 도마뱀은 가 버렸고 구름이 세 번 침을 뱉
어요 그림자도 없이 정오에 시계를 버릴 수 있다면
자오선이 지나는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해요 화요일
마다
아무런 잘못 없이도 겨울이 오고
미뤄 뒀던 도마뱀을 경배하려 해요
잿빛 차가 미등도 켜지 않고 달리는 거리에 서서
충분히 착한 모퉁이가 되려고 해요
당신 안엔 어디로 흘러가지도 무엇을 만나지도
못 하는 돌풍이 몰아치네요
여전히 굶거나 결핍되거나 아픈 채로 완벽하네요
한 번도 안 입은 옷을 버리는 순간처럼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살기로 해요
마당에 고인 고요를 풀어주는 만큼씩만 무너지기로 해요
누군가 머리를 묶던 끈처럼 이곳에 없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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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에 소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달리다 지치면 이걸 핥아
생일선물
달아나라 최대한 빨리
그래도 늦을 거야
너의 목에 소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달리다 지치면 이걸 핥아
다음 생일엔 사슴 농장을 선물해 줄게
(어려울 거야
뿔이 잘려지고 다시 만나다는 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는 나의 판단의 근원
예감
그리고 이 순간 너는
손이 미끄러지는 문고리
너머의 빈 방
어서 달아나
삼나무 어깨 위 검은 달이 숫돌에 물을 끼얹는 사이
하얀 시내는 검푸르게 휘어진 칼날이 되고
어느새 알게 된 핏빛 비밀처럼 뿔은
베어지고 말겠지만
나는 네가 여기 살았다는 유일한 증거
변론
멈출 수 없는 탄원
그리고 멀리 사라져 가는 너는
이 마을 모두가 뒤를 쫓는 현상수배자
잡히는 순간
다음번 내 생일이 사라져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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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라 시인: 2011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콜센터 유감』이 있으며, 딸에게 알려 주는 엄마의 인생 레시피, 『갓 God 스물(스무 살 사용 설명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