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쌓인 백록담>
<백록담_산 아래>
하얀 사슴 연못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
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지용이 『백록담』을 썼을 때 사슴은 이미 여기 없었다
표지의 사슴 두 마리는 없는 사슴이었고
길진섭의 그림은 그저 상상화일 뿐이었는데
어인 일일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 >
자명종
스스로 우는 이 시계는
어쩐지 자명하다
자명한 이치처럼 자명해서
그 울림이 맑고 깊어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자명한 일이라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이제 막 빛이 번지기 시작한 어느 호수
언저리처럼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어서
나는 오늘도 이 자명종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놓고
일을 하거나 잠시 기지개를 펴기도 하며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자명종을 맞춰 놓으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그
시간까지 하나의 긴
문장이 적히기 시작하는 것 같고
나는 이제부터 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문장에 형광색 밑줄을 천천히 긋기
시작하는 것 같아
자명종
미리 정해 놓은 시각이 되면 저절로
소리가 울리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현대의 종아
커다란 종도 좋지만
커다란 종이 있는 종탑이 있는 성당을
가질 수 있어도 좋겠지만
나는 너 하나로 만족하련다
자명종
자명한 나의
사랑 같은 종아
< >
air supply
에어 서플라이의 러셀 히치콕은
비싼 돈 내고 공연에 오는 사람들이 늘 최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평생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중학생 시절의 어느 여름
98.7MHz에서였다
그 후로
우연히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담배 연기가 걷히는 것 같다
하늘이 맑아지는 것 같다
에어 서플라이가 한창 활동했을 때는 있지도 않았던
미세먼지라는 말까지 사라지는 것 같다
공기가 공급되는 것 같다
요즘 대도시의 그저 그런 공기가 아닌
강원도의 진짜 공기가
강원도의 산들이 높아지고
높아져서 별들에까지 이르고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 것 같다
방금 나온 이 시원한 무알콜 맥주 한 병처럼
별들이 흘러넘쳐 차가운 하늘에 담기는 것 같다
우연히 너와 들어간 양양의 어느 식당에서
수년 만에 에어 서플라이의 노래를 듣고는
밖으로 나가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잠시 마스크 벗고
청명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최고 음역대에서도 뭉개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맑은 사운드
최상의 하늘이었다
< >
아르보 패르트 센터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은 천연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요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
니다. 저희 센터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
다 *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
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
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그러니 사라지기 위해서라면 35킬로미터로도 한참 부족할 테지
만 우선은 그 정도로 시작해 몸을 푸는 게 좋겠지요.
먼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최근에 제가 겪은 일이
떠오르는군요. 최근에 외국에서 친구 한 명을 사귀었습니다. 귀
국 후에도 저는 그 친구와 iMessage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중
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편하고 다행한 일이지만, 저는 때때로
휴대폰이 원망스럽습니다. 편지지에 천천히 길게 오랫동안 써야
마땅할 문장들이 휴대폰 화면에 조각조각 부선진 채 흩어지고 있
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시대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겠지요. 저는 iMessage를 감사하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메시지 창 위에 적히는 우리의 문장들이 소나무 숲처럼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끊이지
않는 한, 이 숲은 자라고 또 자라, 언젠가 그 안에 저희 센터 같은
건물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도요.
잠깐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저희 센터 홍보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늘 멀리 가야
본질적으로 만족하는 부류이며, 멀리 가는 방법은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가 제각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떠드는 동안, 저
는 벌써 센터를 떠나 소나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숲으로 들어온 겨울 햇빛이 독서등처럼 켜져 있군요. 이런 독서
등 아래서라면 뭘 읽어도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읽고, 잠시 소
나무뿌리 베고 잠들어도 좋겠습니다. 그럼 숲이 제 잠에 그려진
악보를 천천히 읽어보겠죠.
누구나 물을 마시듯이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
만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타불라 라사 Tabula Rasa> 리허설 첫날 때 연주
자들은 음표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악보를 보고는 "음악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었다죠. 휴대폰은 잠시 꺼두겠습니다. 당분간
당신을 찾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사라지려
면 우선 멀어야 하고, 멀어지려면 아무것도 휴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요. 음악을 듣은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
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
* Arvo Part Centre 홈페이지의 Location에 적힌 글.
**비킹구르 올라프손.
< >
에릭 사티
에릭 사티는
하얀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달걀
설탕
잘게 조각낸 뼈
죽은 동물의 지방
송아지 고기
소금
코코넛
하얀 물로 조리한 닭
곰팡이 핀 과일
쌀
순무
장뇌로 처리한 소시지
페이스트리
(하얀) 치즈
코튼 샐러드
그리고 (껍질을 벗긴) 어떤 생선
이상이 그가 밝힌 하얀
음식의 리스트
결벽증
이라는 말은 대개
피곤하게 들리지만
이 경우
매우
아름답고
청결하게
들린다
병적으로 잘 청소한
깨끗한 공간
처럼 보인다
(깨끗한
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무류無謬적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흰 눈 소복이 내린 식탁
같을 것이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았고 아무도 밟을 일
없는 눈밭
같을 것이다
하얀 음식의 이데아
같은 것을
떠올려보게
만들고
하얀 음식만 먹고 산 사티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사계절 한구석에 놓여
있다
녹아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녹아서
좋았다
누가 알면 귀찮고
피곤해져
혼자 죽는 게
더욱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좋았다
좋았다
사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는
생각이
< >
흰꽃 등나무 옆에서
저녁 늦게 파주출판도시에 들렀다가
지지향紙之鄕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일어나 흰꽃 등나무를 본다
흰 꽃 이미 다 진
등이 꺼진 등나무
일석 이희승 선생이
1973년 혜화동에 집을 신축하며
오백 원을 주고 사서 심은 두 그루 중 하나라는 등나무
(나머지 한 그루는 또 어디서 흰 꽃 밝히고 있나?)
2002년 서호정사 옆에 식재했을 때 수령이 삼십 년
높이는 삼 미터 정도를 웃돌았다는데
그러니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수령 오십 년
나보다 딱 열 살이 더 많구나
흰 꽃으로 등을 밝힌 지도 벌써
오십 년
매년 등불을 밝히는 마음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워
나는 지난 이십 년간 간혹 이 길 지나면서도
너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무려 이십 년 동안 어두웠던 등잔 밑
뒤늦게라고 등잔 옆으로 찾아왔으나
꽃은 이미 다 지고
가을은 벌써 저 앞에 와 있고
하지만 꺼진 등도 보기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등이라고 늘 켜져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등이 꺼진 등나무 옆에서
휴대폰도 마음도
지금 끌 수 있는 건 전부 다 끄고
너와 함께 어둠으로 내려앉은 채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 머물러본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밝았던
어떤 순간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은은히
< >
천국행 눈사람
눈사람 인구는 급감한 지 오래인데
밖에서 뛰놀던 그 많던 아이들도
급감한 건 마찬가지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면 그냥
눈만 남고
그래서 얼마 전 눈이 왔을 때
집 앞 동네 놀이터
이제는 흙이 하나도 없는 이상한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봤을 때
그건 이상하게 감동적이었고
그러나 그 눈사람은
예전에 알던 눈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거의 기를 쓰고 눈사람이 되어보려는 눈덩이에 가까웠고
떨어져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 모아보려는 새하얀 외침에 가까웠고
그건 퇴화한 눈사람이었고
눈사람으로서는 신인류 비슷한 것이었고
눈사람은 이제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눈사람에서 사람을 빼고 남은 눈이
녹고 있는 놀이터
사람이 없어질 거란 생각보다
사람이 없으면 눈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놀이터를 더욱 적막하게 만들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눈사람은 아무 미련 없다는 거
눈사람은 녹아가면서도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의 기억을 품고 있고
이번 생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어쩌면 그런 생각만이 영영 무구하다는 거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눈과 사람의 합산
오직 사람이 만들어낸 눈사람만이
천국에 간다는 거
< >
황유원 시인: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초자연적 3D 프린팅』.
김수영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 젊은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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