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나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
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 >
빌딩 유리로 돌진하는 여객기를 본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 만큼 간절한 기도도
팔을 날개로 바꾸지는 못했다
구급차가 구급차를
모텔 캘리포니아, 검은 셀로판지로 코팅된 창을 열자
공중에 떠 있는 낡은 레코드판
중앙선을 무시하며 질주하던 구급차가 전봇대를 들이받
는다 부르르
떨리는 전선
어지럽게 돌아가는 경광등,
구급차가 구급차를 부른다
빌딩 유리로 돌진하는 여객기를 본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 만큼 간절한 기도도
팔을 날개로 바꾸지는 못했다
깃털과 돌멩이와 인간은 다른 속도로 낙하했다
사방의 건물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회전문은 문이었다가 창문이었다가
벽이 된다
가로수는 귀를 막고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물음표를 그리다 만 스키드 마크
입속에서 맴도는 혓바닥
우리는 거울 속의 서로를 보고 좀더 뜨거워졌다
레코드판 위로 흘러가는 바늘처럼 서로의 몸에 손톱을 박으며
우리는 얼마나 서로의 체위를 바꾸고 싶었던 걸까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은 없다
뜨거운 것이 빠져나가고 우리는 감전된 것처럼
멍멍했다 파문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바닥에 닿지 못한 돌멩이가 있다
눈앞에 굳은 물고기들이 떠다닌다
구급차 곁에 구급차가 눕는다
서로의 경광등에 입을 맞춘다
우리는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말고
< >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방에 걸린 수많은 시계들이 한꺼번에 울린다
우리가 한꺼번에 울면 해수면이 조금은 올라가겠지
바벨
한참을 울고 체중계에 올라가도 몸무게는 그대로였다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면
대지는 오래전에 가라앉았겠지
꿈속에서 많이 운 날은 날이 밝아도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눈 속에 눈동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부목을 대고 굳은 무릎으로 여기에 왔다
목소리 위에 목소리가 쌓인다
우리는 각자의 목에 돌을 하나씩 매달고
목소리의 탑을 쌓는다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던
시계방에 걸린 수많은 시계들이 한꺼번에 울린다
우리가 한꺼번에 울면 해수면이 조금은 올라가겠지
우리의 목소리는 쌓이면서 아래로 가라앉는다
우리의 탑은 하늘을 향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지하를 향
해 깊어지는 것이었다
젖은 영혼들이 물의 계단을 밟고 걸어올라온다
어두운 나선의 계단을 딛고 올라오는, 일렁이는 촛불의
빛무리
귓속에 검은 물이 들어차고
우리는 목소리의 동굴이 되어간다
망원경으로 적국의 시가지가 폭격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시민들
그들에게 시온은 얼마나 튼튼한 요새인가 우리의 심장은
파쇄기에 갈아버린 공문서처럼 조각난다
부서진 빛들이 노래가 되고
부서진 울음들이 물비늘이 된다
우리는 목에 더 무거운 돌을 매달고 흩어진다
다른 말과 다른 낱말을 가지고 다시 여기에 모이기 위해
< >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검은 방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
명사인지 알 수 없서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발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아서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곳
죽은 마음, 죽은 손가락, 죽은 눈동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기어올라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가을이 멀었는데 온통 국화다
가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국화 향이 이 세계를 덮고 있다
컴컴한 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
이 막힌다
꿈속에서도 공기가 희박했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
< >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슬픔의 자전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거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은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 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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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시인: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심장보다 높이』가 있다.
신동엽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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