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상상력
대지는 두서없이 넓다 아니 누워 있다 평화로워 보인다
이쪽 나무는 서서 죽는데 저쪽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지독하고 오래된 가뭄이 시작되었다
대지의 상상력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난데없이 나무들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내 이름엔 물이 고여 흐른다고 했다
물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나는 간과 내장이 뭉그러졌고
대지도 아니면서 내 몸에 뿌리박은 것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나는 손가락이 베인지도 모르고 나뭇잎을 한쪽으로 밀
어 넘긴다
발끝에 힘을 모으면 지평선이 잠시 흔들린다
머리만 남아 있는 나는, 나무에 껴 있는 어느 부처가 된다
아니면 나무 묘비를 세우고 있다
훗날 대지가 발견되는 걸까, 나무가 발굴되는 걸까
나무로 꽉 찬 기분으로 누워있다
불안의 책*이 된 나무가 나를 데리러 어디론가 간다
대지는 무엇인가, 뿌리에 밟히는 것이 많았다
가령 지렁이와 개미, 땅강아지와 두더지가 필연을 뚫고
있다
나는 잎사귀와 잎사귀가 만든 창문으로, 새가 날아오는
데
새는 미끄러지지 않고 왜 새소리가 미끄러지는지 그런
질문을
노트에 적고 있다
나는 대지의 몸에 여름을 걸어둔다
그 옆으로 빛이 들어올 구멍보다 빗소리가 샐 구멍이
더 크게 보인다
그렇게 대지의 상상력으로 긴 한낮을 열고 닫는다
*페르난두 페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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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에 사는 사람
단독,
단 한 문장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누가 버렸나봐
오늘부터 이 문장 안에서 살기로 한다
개를 버린 사람은 실수로 발자국을 남겼다
왼발이 조금 큰 사람이다
그는 개와 함께 살기 위해
개의 성대를 없앴다
왼발이 조금 큰 사람과 개의 성대는 아무런 관련이 없
지만 나는 거기서 복선을 읽어낸다
함께 살기 위해 개를 퇴고한다
주인의 왼발을 위해
붉은 목줄을 찬 개는 행복하다
개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버려진 사람을 이해했다
개는 생각하고
사람은 짖는다
개가 있고 성대가 없는 집, 개는 발톱으로
소파 시트 위에서 제 목소리를 긁고 있다
개를 철창에 가뒀어
동네 떠돌이 개들이 찾아와 자꾸 올라타니까 불쌍해서
잘 모르겠다 행복이 무엇인지
임신이란 얼마간 불쌍한 것이 되었다
전봇대 옆에 있는 집, 옥상에는 토성을 닮은 물탱크가
있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집
신호등 앞에 문이 있어 자꾸만 반대편을 생각하는 집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해도 창이 작아서 조용한 집
그 집 담장은 단독으로 서 있는 나무
그 아래 버려지는 문장
누굴 탓하지 않는 사람이 좋더라
얼굴 없는 저녁을 데리고 와서
그가 버리고 간 단 하나의 문장을 살다가 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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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 패는 사람
어제 새벽엔 시를 쓰다가 창문을 내다봤는데
술을 깨려고 장작을 팬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마당엔 쓰러진 나무들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마음은 어떻게 가질까
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싶다
팬다는 말을 가져본 적 없는 내가
팬다는 말을 가장 아름답게 배우는 새벽이었다
그는 언 손으로 나무를 패려고 겨울을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이 새파란 여름에
이 지독한 여름에
언 손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가질까
더 차고 혹독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프랑스에서도 장작을 패고 과테말라에서도 장작을 패
지만
장작을 패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거기선 아무것도 쪼개
지지 않을 것 같고
쪼개지지 않는 건 가짜라는 생각
있는 힘껏 세상을 쪼개는 남자가 들고 있는 것이
도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팰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다는 듯
이대로 끝나도 좋을 것처럼 땀을 흘리는 사람 옆에서
무엇을 위해 장작을 패느냐고 묻기 위해 나는 나이를
먹는구나
날마다 마당에 쓰러진 나무를 쪼개면 거기서
새벽이 태어나는 걸까?
도끼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도끼로 나무를 내려쳐서
새벽 창문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새벽 창문은 다시 오지 않을 창문
내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창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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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옷장
나의 여름은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여름이 아닌 것을 생각한다
여름 아닌 것은 녹지 않고
나는 여름 아닌 것을 듣는다
비는 계속되고 비보다 많은 내가 계속된다
여름 아닌 것을 만져본다
털로 남은 여우와 토끼와 라쿤과 양
옷장이 부족해서 여름 밖으로 삐져나온 맨살들
여름 아닌 곳에서 발견된 책은 지구 종말을 이야기한다
나는 여름 아닌 곳에서
기계에게 버림받고
돌고래는 꼬리지느러미로 서서 박격포를 쏠 준비를 하
지
총구를 마주보는 중이다
더 이상 우리를 참아주지 않는 세계는 이미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름 아닌 곳에서 해변이 내밀어주는 햇볕을 믿어보는
것이다
여름엔 여름이 와서 반바지와 비키니를 입는다
여름이 너무 많아서
여름을 벗으려고
6월에서 7월 달력을 넘기는 일만큼, 좋은 것은 없다
여름이 더 많이 생기니까
아직 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여름을 자두나무에서 만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입 찢어 잠을 꺼내는 고양이를 여름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여름이 와도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여름도 사람을 지겨워한다
매미가 여름을 입고 나와서 옷장이 다 헤질 때까지 운
다
그러니까 여름은 몸집이 큰 짐승일수록 좋아한다
날것에게 뜯기고 사는 동안, 여름이 커다랗게 죽는다는
느낌
커다란 사람이 좁은 집 안을 돌아다닌다
나는 조금 더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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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갈등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좋겠다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이씨인지, 이씨인지, 이씨인지
어쩌다 보니 이씨만 만나서 사랑했구나
엄마가 말했지
허물 같은 말을 벗어던지면 그 허물 속으로 들어가 죽
는 사람이 있어서 영원히 허물을 벗는 말이 있다
언젠가부터 내 몸에 달린 것들 중에서 하나뿐인 것들이
창피하다
하나뿐인 심장 하나뿐인 혀
하나뿐인 배와 하나뿐인 배꼽
엉덩이가 갈라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죄를 짓고 싶다
자기 배꼽에 낀 때를 자꾸 들여다보면 목이 잘린대
한 번쯤은 열어보고 싶은 지하창고처럼
호기심에 문을 열었다가 갇히기 좋지
배꼽이 떨어졌는데 배꼽이 남는다니
바람 든 무를 사온 내게
꼭 저 같은 걸 사왔대
꼭 저 같은 걸 낳은 사람이
"너도 꼭 너 같은 딸 낳고 살아"
흠이 흠을 낳고 있을 때
이씨는 아버지의 형태가 아니고
이씨는 주인이 아니고
이씨는 우상 없는 이름이요 아버지를 넘어선다
집에 없어진 물건이 있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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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 시인: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거의 모든 기쁨』, 에세이집 『고라니라니』가 있다. 창작 동인 <켬>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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