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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 원 시인의 시 ■ 쇼룸 & 아이에게 & 큐브 & 작고 낮은 테이블 & 사람은 탄생하라

by 시 박스 2024.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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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이미지_사진 제공: 픽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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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어른과 아이//
개와 사람

개와 사람의 그림자가 섞이고
  그림자는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쇼룸

 

 

사람과 사람

  

  둘 나가고

  둘 들어왔다

 

  빈 곳을 메웠다

 

  둘 들어오고

  하나 나갔다

 

  짚이는 대로

  그림자 둘 집어 들고 갔다

 

  문이 열리고

  하나 들어갔다

 

  하나 나오고

  하나 들어갔다

 

  발목들은 문 앞에 나란히

  말라 죽은 화분 옆에 나란히

 

  어른과 아이

 

  집 밖에는 우산을 들고

  장화를 신은 아이가 가고

  거기는 허공이고

  아이는 허공에서 앞발이 들렸고

  우산이 앞을 다 가렸고

 

  집 안에는 목이 꺾인 어른이 있고

  팔짱을 껴서 베고 있고

  창은 딱 맞고

 

  개와 사람

 

  개가 달리고 사람이 달린다

  개와 사람이 달리고 길이 남는다

  개와 사람이 달리고 눈이 펑펑 쏟아진다

  개와 사람의 발자국이 달리고

  달리는 발자국은 남고 개와 사람은 사라진다

  개와 사람의 발자국이 녹고

  햇빛이 났다 눈이 그친다

  개와 사람의 그림자가 섞이고

  그림자는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  >

 

 


 인사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인사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한다. 얼굴이 쏟아지도록.
  인사한다. 손을 뻗어 쓰다듬지 못하고.
  인사한다. 바람이 부드럽게 눈 감겨주기를.
  인사한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은 내가 가져온다.

 

아이에게

 

 

 

  인사한다. 이상한 새 소리를 내서.

  인사한다. 꽃잎과 꽃잎 사이의 그늘에 숨어.

  인사한다. 작은 나무 아래 그림자가 되어.

  인사한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얼굴이 되어.

  인사한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로.

  인사한다. 물방울 속에서.

  인사한다.  모든 예의를 갖춘 한 마리 새처럼.

  인사한다. 색색의 치장을 한 한 마리 새처럼.

  인사한다. 소란한 손과 발을 지우고.

 

     꽃봉오리

 

      4월

 

      소풍

 

     풍선 풍선

     풍선들

 

  인사한다.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면서.

  인사한다. 너에게. 흐려지며.

 

  인사한다. 똑딱.

  인사한다. 단추.

  인사한다. 심장.

  인사한다. 멈춤.

 

  없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인사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인사한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인사한다. 얼굴이 쏟아지도록.

  인사한다. 손을 뻗어 쓰다듬지 못하고.

  인사한다. 바람이 부드럽게 눈 감겨주기를.

  인사한다. 꼭 쥐고 있던 주먹은 내가 가져온다.

 

  인사한다. 꽃봉오리가 열리도록.

  인사한다. 학교 앞 공원을 따라 걸으며.

  인사한다. 교문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며.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너의 목소리. 간결한 길.

  인사한다. 거역할 수 없는 순진함에.

  인사한다. 장미가 피어날 시간으로.

  인사한다. 목덜미에.

  인사한다. 풀밭에서.

  인사한다. 데리고 왔다. 둥근 풀밭.

  인사한다. 침묵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봄을 조금 옮겨 놓으며.

 

  인사한다

 

  긴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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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새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한 햇빛은 텅텅 빈 곳에 쏟아지고 있었다

 

큐브

 

 

 

  신축아파트 공사장은 하루 종일 허공을 뚫었다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죄수와 수녀 들이 걷고 있다

 

  내려진 블라인드 너머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유모차에 실려 온 아가들의 얼굴에 묵시록이 나타났다

 

  토요일이 지나고 암흑이 찾아왔다

 

  최초의 새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한 햇빛은 텅텅 빈 곳에 쏟아지고 있었다

  <  >

 

 

 작고 낮은 테이블이 사이에 있어 우리는

  비어 있는 둥그런 접시를 들어 올렸지요

 

작고 낮은 테이블

 

 

 

  작고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을 때는

  바닥에 앉아 다리를 접고 등을 구부려야 하지요

  이 작고 낮은 테이블에 무엇을 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주 앉아 있는데요

  저녁이 왔는데요

 

  작고 낮은 테이블을 놓고 마주 앉을 때는

  모퉁이가 되어야 하지요

  쪼그리고 앉아

  우리는 부리가 길어지지요

 

  작고 낮은 테이블이 사이에 있어 우리는

  비어 있는 둥그런 접시를 들어 올렸지요

 

  네 개의 손이 하나의 접시를 잡을 때

 

  어떤 기원을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얼굴을 지나

  허공의 입구까지 빈 접시를 들어 올려야 했나요

 

  접시는 소용돌이를 언제 멈출 수 있을까요

 

  볼로 접혀 들어가는 얼굴

 

  깨져버렸어요

  다리가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는 무릎이 있던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구부려보았어요

  <  >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사람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꽃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품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스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이상, 「선에 관한 각서 2」에서

  

  

이 원: 1992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사랑은 탄생하라』 등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시작작품상, 시로여는세상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