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여름 외투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준 사람들에 대해 쓸까
크리스마스카드에 절교하고 싶었다고 쓴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나중에 같은 방식으로 상처 준 것에 대해
코감기 약을 먹고 꾼
잠수함 꿈에 대해
너무 늦게 걷는 것도 몸에 안 좋다던데
혼자서는 더 늦게 걷는다
관객석으로 만들어진 데크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을 때
바람에 꿀이 든 것처럼 쾌적한 날씨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계단에 등을 기댔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갑자기 퇴직하고
갑자기 휴일을 보내면서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
< >
시간이 지나면
뼈가 붙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야
반깁스
시간이 지나면
뼈가 붙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야
기차처럼 기다란 약봉지
다섯 알
-네 알
-다섯 알
의 시간이 지나면
팩맨* 모양으로 부러진 뼈가
다시 동그랗게 된다는 건
궁금한 게 있으면 당장 답을 얻을 수 있고
연락을 기다리는 잠시가 고통인 요즘에
지금 여기는
뼈가 붙는 시간
가위 바위 보 같은
바위 가위 보 같은
가위바위보
이 단단한 부목조차
붕대를 감는 사이
내 다리 모양으로 굳었고
조금 전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벌써 세상을 덮었는데
한 조각 베어낸 홀케이크처럼 부러진 뼈가
다시 홀케이크처럼 붙는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야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쓴 시 속에는
호박, 반 고흐, 그리고
하나도 낡지 않은 과학 용어가
기차처럼 이어져 있다
* 1980년 출시된 아케이드 게임으로, 피자를 먹다가 만들어졌다는 세기의 식충 캐릭터.
< >
그냥 비워두는 마음
팔레 루아얄 정원
저의 외면하는 기술은 점점
섬세해지고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피나무가 열식된 산책로
감정은 외면한다고 해서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을 붙여주면 도움이 됩니다
소방서 부대시설에서 책을 펼쳤다
소음을 차단하는 방식
푸르름을 만끽하도록 한 배려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마로니에 두 그루를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여행자가 아니라 제작자로서 바라보는
공원
책은 사진이 가득하고
풍경과 공기와 계획과 기분을 담은 문자들이 천연하다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다른 건물을 지어 대학 건물을 가리는 것보다는
그냥 비워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나는 어제의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본다
여행자가 아니라 제작자로서
그냥 비워두는 마음
팔레 루아얄 정원
저의 외면하는 기술은 점점
섬세해지고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게임에서 플래티넘을 받았고
추위에는 꼼꼼히 대비했고
항히스타민 감기약을 밤낮용으로 사두었어요
외면을 과소평가하시는 거 아닌가요
도망치려고 힘껏 달리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배가 아프도록 웃고 눈물이 고이기도 하잖아요
피나무가 열식된 산책로
잡히길 바라면서 달린다
어제는
비워두는 마음
팔레 루아얄 정원
< >
사람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가
왜 저러는 거지
이건 뭐야
이 세 가지는 같은 말인데
아, 맞다 나 시 써야 해
김치볶음밥을 한 그릇 다 먹고
또 한 그릇 더 펐는데
반 그릇 남겨서
뚜껑을 덮어두었다
나는 왜 김치볶음밥을 이토록 좋아하는 걸까
그것이 지나온 삶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면
관공서에서 받은 작은 일
단체 카톡 방,
예술가들이 참가자들에게
오늘의 예술활동을 제시했을 때
봄님이 나갔습니다
완수 후
입금은 완수 후라고 하셨지
우리들은 모쪼록 작은 일이 완수되기를 바랄 뿐이야
사진을 찾아달라는 사람
파일을 확인해달라는 사람
동행이 있냐고 묻는 사람
나는 모두 대답해주고 시를 쓸 생각
전에 했던 말이 이 말이냐는 사람
모르겠다가 입버릇인 사람
진짜 모르겠냐니까 조금만 모르겠다는 사람
업무 추가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
사람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가
왜 저러는 거지
이건 뭐야
이 세 가지는 같은 말인데
옛날 작가들의 이름을 외우며
커피를 마시네
메일 아래에 첨부된 이전 메일에는
"작가님을 너무 번거롭게 해서 어쩌죠"
사람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가
다 이유가 있겠지
저분도 너무 고생이다
이 세 문장도 같은 말
밤이 깊어 날짜 바뀌고
읽고 싶던 시집의 비닐을 뜯어
제목에 끌린 시를 몇 편 읽다가
아, 맞다 나
시 써야 해
반 그릇 남은 김치볶음밥
< >
누가 제일 나빠
어떻게 했어야 옳은 건데
나무와 아이가
화면 밖으로 나온다
그 영화는 좋았다
내가 왜 이 나무를 좋아하는 줄 알아?*
그 영화의 명대사는 이 질문의 답이다
나는 이 질문이 더 좋지만
커다란 나무
귀여운 아이
밖으로 나온다
아슬아슬
귀엽다고 해도 좋을지
저 삶을
플로리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입소문이 난 영화를 뒤늦게 나도 봅니다만
누가 제일 나빠
어떻게 했어야 옳은 건데
나무와 아이가
화면 밖으로 나온다
되게 오래도록
문제를 발견만 하면
마법처럼 해결하는 줄 알았지
이제는 내가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 줄 알아?
봤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대사 "내가 이 나무를 왜 좋아하는 줄 알아?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서"
김은지 시인: 201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여름 외투』. 산문집 『동네 바이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