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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허연 시인의 시 ■ 칠월 &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 내가 원하는 천사 & 밤에 생긴 상처 & 슬픈 빙하시대 1

by 시 박스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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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풍경, by. 픽셀스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

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

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

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

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

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

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 가

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 불꽃을

작게 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

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은 또 얼마나 흔

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  >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내가 원하는 천사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 놓았을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  >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에 생긴 상처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떼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

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던 조개들

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

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

  

 

*巨津.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소음.

<  >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

신의 슬픔이겠지요.

 

 

슬픈 빙하시대 1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

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

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  > 

 

 

허연 시인: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고전여행자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등이 있다.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 김종철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 「가여운 거리」로 《쿨투라》가 선정한 '오늘의 시' 최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