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
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
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
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
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
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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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은 길 끝에
서 울었다. 혼자 먹은 저녁만큼 쓸쓸한 밤 내내 나는 망해 가
는 늙은 별에서 얼어붙은 구두끈을 묶고 있었다.
부탄가스 하나로 네 시간을 버티어야 해. 되도록 불꽃을
작게 하는 것이 좋아. 어리석게도 빗속을 걸어 들어갔던 밤.
잠결을 걸어와서 가래침을 뱉으면 피가 섞여 나왔다. 어젯밤
통화는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울음만 기억에 남았고, 나는
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알고 계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
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지대의 나무들은 또 얼마나 흔
들리는지.
내 사랑은 언제나 급류처럼 돌아온다고 했다.
< >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내가 원하는 천사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살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 놓았을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 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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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에 생긴 상처
당신이 사라진 주홍빛 바다에서 갈매기 떼 울음이 파도와
함께 밀려가선 오지 않는다. 막 비추기 시작한 등대의 약한
불빛이 훑듯이 나를 지워버리고 파도 소리는 점점 밤의 전부
가 됐다. 밤이 분명한데도 밤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파도만이
남았다. 밤은 그렇게 파도만을 남겼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파도 위로 가끔 별똥이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던 조개들
의 죽음이 잠시 빛났고 이내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
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
*巨津.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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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
신의 슬픔이겠지요.
슬픈 빙하시대 1
당신을 알았고, 먼지처럼 들이마셨고
산 색깔이 변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산속에 없
었기에 내게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이 손짓해도, 목이
쉬게 외쳐도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가는 길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닦아 놓았을 그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덤불로 가리어진 그 어디쯤, 길도 아닌 저
끝에서 당신은 오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요. 다시는
기다리지도 부르지도 않겠지요. 그 산을 다 덮은 덤불이 당
신의 슬픔이겠지요.
호명되지 않는 자의 슬픔을 아시는지요. 대답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를 아시는지요. 늘 그랬습니다. 이젠 투신하지 못한
자의 고통이 내 몫입니다.
내게 세상은 빙하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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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인: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고전여행자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등이 있다.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 김종철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 「가여운 거리」로 《쿨투라》가 선정한 '오늘의 시' 최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