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뱀이 흐르는 하늘
하늘에는
아무도 물지 않고
뱀이 흐릅니다
흐르기 좋아하는 뱀이
길게 흐릅니다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셋이군요
움직임 미세합니다
저토록 흰색이다가
엷은 황색을 띠기도 합니다
비치는 색지처럼 미묘히 몸 뒤집으며
그러다가 몸 풀듯 일직선을 이룹니다
발딱 일어선 일직선 말고
수평의 부드러운 일직선 말입니다
어느 몸에도 독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들이 잠깐잠깐 번쩍이는 건
역시 찬피가 숨어 빛을 쏘기 때문일까요
보석들의 근본인 차가움에 대해 생각이 미칩니다
그림 같습니다
뱀이 산정에 걸리고 있습니다
내내 앞서 온 뱀입니다
제일 흰빛이 나는 뱀입니다
그보다 조금 황빛이 나는 뱀이
그 황빛이 나는 뱀보다 조금 더 황빛이 나는 뱀이
앞선 뱀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모두 산정에 모였습니다
산정의 아름다운 삼각형 꼭지가 가져지지 않도록
제일 흰빛이 나는 뱀이 그쯤에서 자리을 잡았습니다
또 그쯤에서 아래로 내려 두 뱀이
앞과 뒤로 펼쳐졌습니다
그렇게 산정에 머물며
불룩하게 몸을 부풀리기도 하다가
쪽 펴다가
합치는 것처럼 뭉게뭉게 뭉실거리다가
외따른 자신의 모양으로 천천히 돌아옵니다
징그러움이라니요
한줄기 적적한 평화입니다
순례승이 메고 가는 외줄 악기입니다
산정을 벗어나 뱀들이 다시 높게 뜹니다
가는 방향이 한방향입니다
몸놀림을 빨리하고 있습니다
놀이 올 시간이어서
꽃피는 놀은
건너 산정에서 맞고 싶은가봅니다
따라가는 하늘이 들려집니다
멉니다
사라지는 가느다란 것
여기서는 안 보이는 베일 속으로
아주 들어갈 모양입니다
저 발 없는 꽃물
깨끗한
선사(先史)의 친구들
< >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단 한 사람
가스레인지 위에 두툼하게 넘친 찌개 국물이 일주일째
마르고 있다
내 눈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내 입도, 내 손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별일이 아니기에, 별일이 아니기도 해야 하기에
코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그동안 할 만큼 하더니 남처럼 스치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 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
< >
찬연한 햇빛 속, 잔꽃송이들을 새빨갛게 뭉쳐 매단 명
자나무를 익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명자야, 하고 불러버렸다
명자나무
베란다 창이 가른 검은 그늘의 안쪽에서 바깥의
찬연한 햇빛 속, 잔꽃송이들을 새빨갛게 뭉쳐 매단 명
자나무를 익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명자야, 하고 불러버렸다
외로움과 시름이 탕, 깨어나더니
명자야. 뭐하니. 놀자. 명자야. 우리 달리기하자. 돌던
지기하자. 숨기놀이하자. 명자야. 나 찾아봐라. 나 찾아봐
라. 숨어라. 숨어라. 나와라. 나와라.
베란다 창이 가른 검은 그늘의 안쪽에서 바깥의
찬연한 햇빛 속, 잔꽃송이들을 새빨갛게 뭉쳐 매단 명
자나무를 익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명자야, 하고 불러버렸다
외로움과 시름이 땅, 달려나가더니
명자씨. 우리 결혼해. 결혼해주는 거지. 명자씨. 우리
이번 여름휴가 땐 망상 갈까. 망상 가자. 모래가 아주 좋
대. 명자씨. 망상 가서, 망상 바다에 떠서, 멀리 멀리로.
< >
우물쭈물, 말도 생각도 몸도 우물쭈물
밤에 꾸는 꿈마저도 우물쭈물이다
우물쭈물 우물쭈물
벌써 오래됐다 예전엔 내가
그렇게 우물쭈물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언제부턴가 완전 우물쭈물이 된 게
우물쭈물, 말도 생각도 몸도 우물쭈물
밤에 꾸는 꿈마저도 우물쭈물이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라고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난다고 하는
어린애들 노래가 있는데
정말 큰일나겠다
어린애들 노래 속에서라면야
세발자전거에 콩 부닥치는 정도겠지만
정말 큰일나겠다
달아나긴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막 달아나야 하는가본데
< >
외할머니의 모든 것 희어서 좋다
이름에 붙인 머릿자 '외' 자가 이미 너무 흰 것을
희어서 좋은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희어서 좋다
그때, 일흔일곱
더 세지 않고 멎은
그 숫자 희어서 좋다
아들자식 없어
혼자 사시었으니
그 혼자도 희어서 좋다
부뚜막 앞
홀로 먹을 조석을 끓이기 위해 나날을
흰수염새우등처럼 꼬부리었으니
참빗질 내리던 긴 흰머리
흰 비녀, 가는 손가락 백 가락지
흰 옥양목 치마저고리 차림
잘록히 쩌맨 흰 허리
흰 고무신, 흰 양말
안섶에 지른 흰 명주 손수건
그때, 벽제에서
탈 대로 타고 남은 형해
흰 팔 흰 다리 흰 골반 흰 해골 흰 늑골 흰 목
백암으로만 이루어진 무인의 작은 섬 무리처럼
떨어지면서 모이면서 희디희어서
쇠 절굿공이로 백암의 섬을 거둬 짓찧을 때
말라깽이 백설기 맛없이 부서져내리듯
흰 알갱이 흰 가루
외할머니의 모든 것 희어서 좋다
이름에 붙인 머릿자 '외' 자가 이미 너무 흰 것을
불러본다. 외할머니, 한숨처럼
꿈으로라도 못 오나, 흰 꿈으로라도
나, 희디흰 열일곱 적의 영원, 매혹의 백광
흰 생, 흰 죽음이여
꼭 끼운 지환의 흰 달무리여
외할머니의 흰 것은 모두 지붕 위로 던져져
마지막 흰구름 되어 좋다
초혼(招魂)을 해도 멀리 떠오르기만 하더니
백미(白米) 시루 위에 새 발자국 남겨 더 마지막
새 나라의 아기 되어 날아가 좋다
< >
이진명 시인: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세워진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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