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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시*
-마리아 에스테르 바스케스**에게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 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 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 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주(註)
* 「축복의 시」는 1958년에 쓰였으며 보르헤스 자신이 손에 꼽을 만큼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다. 1955년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 보르헤스에게 있어 이는 당시로서는 생애 최고의 영예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이었으니까). 아무 때나 장서로 가득 찬 서고에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거의 시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최고의 영예의 순간에 불행의 나락에 굴러떨어진 삶의 아이러니를 토로하고 있다. '축복' 운운하는 제목에서부터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 아르헨티나의 여성 문학평론가이다. 1957년 보르헤스를 알게 된 후 그가 결혼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시력을 상실한 보르헤스를 위해 강연 여행도 여러 차례 수행했으며, 『영국 문학 입문(Introducción a la literatura inglesa)』(1965), 『중세 게르만 문학(Literaturas germáicas medievales)』(1965) 등을 공동 저술했다. 보르헤스와 전기와 대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 폴 그루삭(Paul Groussac, 1848~1928). 열여덟 살에 프랑스에서 이민 와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문인이자 문학평론가. 죽을 때까지 사십오 년간이나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했다. 재임 중에 보르헤스처럼 시력을 상실하였다.
체스****
1
심각한 구석에서
대국자들이 느릿한 말을 다루네.
체스판이 동틀 녘까지 그들을 지체시킨다.
두 색이 증오하는 냉혹한 영역에.
내부 형상들이
마법과 같은 엄격함으로 번득이네.
영웅적 성탑, 날렵한 말, 무장한 여왕,
후방의 왕, 비스듬한 주교, 저돌적 병졸.
대국자들이 자리를 뜰지라도,
시간이 그들을 소진시킬지라도,
제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동방에서 불을 뿜었던 전쟁이
지금은 온 세상을 무대로 하네.
여느 유희가 그렇듯, 이 놀이도 무한하리.
2
나약한 왕, 비스듬한 주교, 성마른 여왕,
정공(正攻)을 펼치는 성탑과 의뭉스런 병졸들이
흑백의 길 위에서
구하던 싸움을 일으키네.
대국자가 가리키는 손이
운명을 지배하는 줄은 모르리.
금강석 같은 엄격함이
의지와 판세를 좌우하는지도 모르리.
대국자 역시 낮과 밤의 명암이 교차되는
또 다른 게임판의 포로라네.
(오마르*****의 선언이지.)
신은 대국자를, 대국자는 말을 조종하네.
신 뒤에 또 어떤 신이 숨어
티끌, 시간, 꿈, 임종의 드라마를 시작하는 걸까?
주(註)
**** 보르헤스의 초기 작품부터 체스, 카드놀이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상념에 이르게 하는 주요 모티브였다. 일상의 사물에서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 내는 면에서 보르헤스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 오마르 카얌(Omar Khayyam, 1048~1131). 페르시아의 시인, 수학자, 천문학자. 실재와 영원의 특성, 인생의 무상함과 불확실성, 인간와 신의 관계 등에 대한 고뇌를 시에 담았다. 영국 시인 피츠제럴드(Edward Fitzgerald, 1809~1883)가 그의 시를 『오마르 카얌의 루바이야트』(1859)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서구에 알려졌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역자의 시적 재능을 꽃피운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이용되는 영국 서정시의 고전으로 평가받았다.
또 다른 호랑이^
-그리고 유사하게 창조하는 기술
모리스: 『볼숭 가(家)의 시구르드』(1876)^^
나는 한 마리 호랑이를 사유한다.
어스름이 광대무변의 분주한 도서관을 예찬하고
서가(書架)를 아득하게 하는 듯하네.
힘차게, 천진스럽게, 피범벅로, 새롭게
호랑이가 그의 밀림과 아침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리.
이름 모를 강가 진흙벌에 자욱을 남기고.
(그의 세계는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고,
다만 어떤 찰나만이 있을 뿐이네.)
야만적 거리(距離)를 도약하리.
난마(亂麻) 같은 냄새의 미로에서
여명의 내음과 열락의 사슴 내음을 찾아다니리.
나는 대나무 무늬 사이로
그의 줄무늬를 해독하고
전율이 감도는 휘황찬란한 호피에
감싸인 골격을 짐작하네.
지표면의 둥근 바다와 사막은
헛되이 가로막고 있을뿐이지.
머언 남아메리카 하구(河口)의 집에서부터
내가 너를 쫓고 꿈꾸거늘.
아! 갠지스 강변의 호랑이여.
영혼에 오후가 흩뿌려지고
나는 성찰한다.
내 시가 떠올리는 호랑이는
상징과 허상, 일련의 문학적 비유,
백과사전의 기억일 뿐,
수마트라와 벵골에서
태양과 유전하는 달 아래
사랑, 한가함, 죽음의 일상을 수행하는
섬뜩한 호랑이, 불길한 보석이 아니라고.
나는 상질들의 호랑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진정한 호랑이를,
버펄로 떼를 몰살하고
1959년 8월 3일 오늘
초원에 호젓한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호랑이를
대비시켜 본다.
하나 그를 거명하고 주위를 상상한다는 것이 이미 그를,
대지를 떠도는 살아 숨 쉬는 피조물이 아닌
예술의 가공물로 만들고 마네.
세 번째 호랑이를 찾을 것이다.
신화에서 벗어나 대지를 내딛는 참호랑이가 아니라,
다른 호랑이들처럼 역시
내 꿈의 한 형태,
인간의 한 언어 체계가 되고 말 것이지만.
나는 이를 잘 알고 있네.
하나 불확실하고 무분별한 이 해묵은 모험을
무엇인가가 내게 강요하네.
그리하여 오후 내 나는 시 속에서만 살지 않을
또 다른 호랑이 모색에 집착한다.
주(註)
^ 보르헤스는 어렸을 때 동물원에 갈 때마다 호랑이를 유심히 보았다고 한다. 그가 장님이 된 후 호랑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 1972년 『호랑이들의 황금(El oro de los tigres)』라는 시집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호랑이에 대한 집착을 어두운 본능, 남성스러움에 대한 갈망, 일탈의 욕구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영국의 시인,화가, 예술평론가로 스칸디나비아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서사시집 『볼숭 가의 시구르드』를 썼다. 볼숭은 북유럽신화에서 지식, 문화, 시가, 전쟁의 신인 오딘의 손자이다. 시구르드는 큰 용을 퇴치하여 보물을 빼앗았으나, 옛 약혼자 브린힐드의 지시로 살해되었다. 독일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인공 지그프리트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