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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인들

페르난투 페소아 Fernando Pessoa,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에서. 담배 가게 & 포르투풍 내장 요리 & 승리의 송시

by 시 박스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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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시인선 표지

 

 

담배 가게(부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되기를 원할 수조차 없다.

  이걸 제외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꿈을 품고 있다.

 

  내 방의 창문들,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이 세상 수백만 개 중 하나인 내

          방에서,

  (그리고 만약 안다 한들, 뭘 안단 말인가?)

  너희는 행인들이 끊임없이 다니는 어느 길의 신비로 나

           있구나,

  그 어떤 생각들에도 접근 불가한 길로,

  진짜, 말도 안 되게 진짜이며, 맞는, 알 수 없게 맞는 길로,

  돌들과 만물 아래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와 함께,

  벽을 습기로 채우고 머리카락을 희끗하게 만드는 죽음과

           함께,

  전부의 마차를 무(無)의 큰길로 모는 운명과 함께.

 

  나는 오늘 패배했다, 마치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나는 오늘 또렷하다, 마치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마치 사물들과 더는 우애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저 작별뿐, 이 집 그리고 이쪽 편 길이

  열 지어 늘어선 기차길로 변하면서, 나의 머릿속에

  출발을 알리는 호적(號笛) 소리,

  출발과 동시에 떨리는 신경들과 삐걱거리는 뼈들.

 

  나는 오늘 어리둥절하다, 고민했고 찾았고 잊어버린

          사람처럼.

  나는 오늘 갈라져 있다

  바깥의 현실 같은, 맞은편 담배 가게에 대한 충성심과

  내면의 현실 같은, 전부 꿈이라는 감각에 대한 충성심

          사이에서.

 

    [···중간 생략···]

 

  이 세계는 정복하려고 태어난 자를 위한 것이지

  정복할 수 있다고 꿈꾸는 자를 위한 게 아니다, 설사 그들이

          맞다 해도.

  나는 나폴레옹이 이룬 것보다 더 많이 꿈꿨다.

  나는 가상의 품에 예수보다 많은 인류애를 품었다.

  나는 그 어떤 칸트도 쓰지 못한 철학들을 비밀리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리고 아마 영원히, 다락방의 아무개,

  비록 거기 살지는 않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위해 타고나지는 않은 사람일 것이고,

  나는 항상 단지 자질은 있었던 사람일 것이며,

  나는 항상 문 없는 벽 앞에서 문 열어 주길 기다린 사람일

          것이다.

  닭장에서 무한의 노래 시들을 노래한,

  덮여 있는 우물에서 의 목소리를 들은.

  나 자신을 믿느냐고? 아니, 나는커녕 아무것도.

  뜨거운 내 머리 위로 자연을 들이부어라

  그 태양, 비, 그리고 내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

  나머지는 오려면, 아니 와야 하면 오고, 아니면 말아라.

  별들의 심장의 노예들, 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계를 정복했었지,

  깨어났더니, 그것이 흐릿하고,

  일어났더니, 그것이 낯설다,

  우리가 집을 나서자, 그것은 지구 전체이며,

  또한 태양계이자 은하수이자 무한이다.

 

  (어린 소녀야, 초콜릿을 먹어,

  어서 초콜릿을 먹어!

  봐, 세상에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모든 종교들은 제과점보다도 가르쳐 주는 게 없단다.

  먹어, 지저분한 어린애야, 어서 먹어!

  나는 네가 먹는 것처럼 그렇게 진심으로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잠시 생각을 하고 선, 은으로 된 종이, 은박

          포장지를 뜯자마자

  모두 다 땅에 .

버려 버린다, 삶을 버렸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절대 되지 못할 것들을 향한 씁쓸함으로

  최소한 이 시구들의 서투른 글씨체,

  불가능으로 향하는 부서진 관문은 남는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나에게 멸시를 바친다, 눈물 없이,

  우아하게, 적어도 동작만큼은 너르게 내던진다

  나라는 그 더러운 옷을, 되는대로, 만물의 흐름에 맡기듯,

  그렇게 나는 상의도 입지 않은 채 집에 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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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풍 내장 요리

 

 

  어느 날 식당에서, 시공간 바깥에서,

  나에게 사랑을, 식은 내장 요리처럼 가져다주었어.

  나는 주방장에게 예를 갖추어 말했지

  나는 데워서 주는 편을 선호한다고,

  내장 요리는(게다가 그건 포르투풍이었어) 절대 차게 안

          먹는다고

 

  그게 사람들 심기를 건드렸던 거야.

  맞는 말도 못 꺼낸다니까, 식당에서조차 말야.

  나는 먹지도 않았고, 다른 걸 주문하지도 않았고, 계산을

          치른 다음,

  산책이나 하려고 거리로 나왔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 누가 알까?

  나는 모르지만, 나에게 있었던 일······

 

  (나는 잘 알지, 유년시절에는 누구나 뜰이 하나 있다는 걸,

  사적인 곳이든 공공 공간이든, 이웃집 것이든.

  나는 잘 알지, 우리가 놀이에 주인이었던 걸.

  그리고 슬픔은 오늘의 것이란 걸.)

 

  나는 이걸 두고두고 깨닫곤 해,

  하지만, 내가 사랑을 주문했는데, 어째서 식은 포르투풍

          내장 요리를? 가져다준 거냐고,

  차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데,

  차게 가져다줬다고.

  나는 불평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찼다고.

  절대 차게 먹는 게 아닌데, 차게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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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송시(부분)

 

 

 

  공장의 커다란 전등불들의 고통스러운 불빛 아래

  나는 열에 들떠 쓴다.

  이를 갈면서 쓴다, 이 아름다움을 향해 야수가 되어,

  고대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이 아름다움을 향해. 

 

  오 바퀴들, 오 기어들, 영원한 르-르-르-르- 르-르-르!

  분노하는 기계장치에 억눌린 강력한 경련!

  나의 안과 바깥에서 오는 분노,

  절개되어 드러난 내 모든 신경들로,

  내가 감각하는 모든 돌기들로!

  내 입술이 메말랐다, 오 위대한 현대의 소음들이여,

  너희를 지나치게 가까이서 듣노라니,

  그리고 내 머릿속은 너희를 노래하려는 욕구로 불탄다,

  내 모든 감각들의 표현 과잉으로

  너희의 동시대적인 과다로, 아 기계들이여!

 

  열이 오른 상태로 열대 자연을 보듯 엔진들을 바라본다-

  철과 불과 동력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인간의 열대-

  나는 노래한다, 현재를 노래한다, 또한 과거와 미래도,

  현재는 모든 과거이자 모든 미래이기에,

  전깃불들과 기계들 속에는 플라톤과 베르길리우스가 있다

  단지 옛날에 베르길리우스와 플라톤이 존재했으며,

 

    [ ···중간 생략···]

 

  세계를 무대 삼는 철제 회전의,

  선박의 이동-적재 작업들 속의,

  기중기들의 매끄럽고 느린 회전 속의,

  공장들의 질서 정연한 무질서 속의, 그리고

  고요에 가까운 작고 단조로운 동력전달장치 벨트 소리의

  부품-매개가 되는 것에 대한 난잡한 분노!

 

  기계장치와 실용 업무 사이에

  끼어 버린, 생산적인 유럽의 시간!

  카페들 안에 멈춰 선 커다란 도시들

  카페들 안-쓸모없는 소음의 오아시스

  쓸모의 몸짓과 소음들을

  구체화시키고 재촉하는 곳

  또 바퀴들, 톱니-바퀴들 그리고 진보의 굴대받이!

  부두와 기차역의 영혼 없는 새로운 미네르바!

  순간의 크기에 맞먹는 새로운 열광들!

  부둣가에 놓여져 미소 짓는, 혹은 조선대(造船臺)에

  건조되어, 일으켜 세워진 철판 용골들!

  국제적, 범-대서양적, 대서양-캐나다적인 활동!

  바와 호텔들에서 낭비되는 열에 들뜬 시간들과 불빛들,

  롱샹들에서, 더비들에서, 에스콧들에서,

  그리고 피카디리들과 오페라 에비뉴들에서

  내 영혼 속을 파고드는!

 

  오, 도로들, 여어 광장들,여어-라-호 군중!

  진열대를 지나치는 모두, 그 앞에서 멈추는 모두

  장사꾼들, 방랑자들, 과장되게 잘 차려입은 사기꾼들,

  귀족 클럽 소속 회원인 티가 나는 자들,

  초췌하고 수상쩍은 인물들, 행복한 듯 만 듯한 가정의 가장들

  조끼 한쪽 주머니에 다른 주머니까지 찬

  금줄마저 아버지다운!

  지가가는 모두, 지나가며 절대  안 지나가는 모두!

  창녀들의 지나치게 강조된 존재감

  부르주아 아가씨들의 흥미로운 진부함.(내면을 누가 알랴?

    [이하 생략]

 

 

페르난두 페소아: 1888~1935. 리스본에서 태어남. 외교관인 새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하였으나,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회귀.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함. 생전 포르투갈어 시집 『메시지』(1934) 출간. 1935년 간경화로 세상을 뜸.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 발견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분류와 출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함.

그는 포르투갈의 모더니즘을 이끈 시인이다. 헤럴드 블룸은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가운데 셰익스피어, 괴테, 조이스, 네루다, 페르난두 페소아를 꼽는다. 일생 동안 70개를 웃도는 이명(異名) 및 문학적 인물들을 창조하고 독창적 글을 썼다. 포르투갈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 및 서로 다른 문체를 구사하였음. 시, 소설, 희곡, 평론, 산문 등 많은 글을 남겼음.(시집,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민음사) 책날개 작가 소개란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