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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인들

울라브 하우게 Olav H. Hauge,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에서 읽은 시: 수확기 & 나뭇잎집과 눈집 &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 & 길 &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by 시 박스 202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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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브 하우게, 시집 표지>

 

 

수확기

 

 

  구월의 조용한 날들 해가 떠 있다

  추수할 때다 숲에는 아직

  크랜베리들이 있고 돌담 옆에

  붉게 물들고 있는 들장미 열매들이 있고

  떨어질 듯 개암들이 있고

  블랙베리들이 관목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개똥지빠귀들이 마지막 까치밥나무 열매들을 찾고

  있다

  말벌들은 달콤해지는 자두들에 매달려 있고

  나는 황혼녘에 사다리를 헛간에 세워 두고

  바구니를 걸어 둔다 빙하들은

  새로 온 눈을 조금씩 쓰고 있다. 침대에서

  나는 청어 잡이 어부들이 시동을 걸고 떠나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온밤을 지새울 것이다

  어둠이 활주하는 피오르에서 강력한 탐보등을 켜고

  <  >

 

 

나뭇잎집과 눈집

 

 

  이 시들은 거창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자유롭게 모인

  몇 단어예요

  그러나 아직도

  시작(詩作)에는

  내가 좋아하는 게 있어요

  아주 잠시

  시 속에서

  집을 갖는 것 같아요

  어릴 적

  나뭇가지로

  놀이집을 지었죠

  우리는 집을 만들고

  기어들어가 앉아

  빗소리를 들었어요

  홀로 자연 속에서

  코에 머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꼈어요 ---

  크리스마스에는 눈집을 지었죠

  웅크리고 앉아 부대로

  입구를 막고

  초를 켰죠 거기 있었어요

  그 길고 추운 저녁들 내내.

  <  >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 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  >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

 

 

  우리 만남을 위해 오실 때

  경비견을 데려오지 마세요

  굳은 주먹도 가져오지 마세요

  그리고 나의 호밀들을 밟지 말아주세요

  다만 대낮에 

  당신의 정원을 보여주세요

  <  >

 

 

 

 

  길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스스로 걸어야 한다

  모르는 곳으로

  먼 길이다

 

  길은 그런 것

  오직 스스로

  걸어야 한다 길은

  돌아올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었는지

  남기지 마라

  지나간 처음의 길은

  바람이 지우리

  <  >

 

 

비 오는 날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서다

 

 

  오직 비 때문에

  길가

  늙은 참나무 아래

  멈춰선 건 아닙니다, 넓은 모자

  아래 있으면 안심이 되죠

  나무와 나의 오랜 우정으로 거기에

  조용히 서있던 거지요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를 들으며 날이 어찌 될지

  내다보며

  기다리며 이해하며.

  이 세계도 늙었다고 나무와 나는 생각해요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죠.

  오늘 나는 비를 좀 맞았죠

  잎들이 우수수 졌거든요

  공기에서 세월 냄새가 나네요

  내 머리카락에서도.

  <  >

 

 

울라브 하우게: 1908년 노르웨이 울빅(Ulvik)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994년까지 살았다. 
원예학교에서 공부한 후 과수원 농부가 되어 평생 일했으며, 하우게 시을 번역한 임선기에 따르면, 그의 가장 좋은 시는 숲에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북구의 차가운 조용한 속에서 한 손에 도끼를 든 채 시를 쓴 것이었다.
1975년 시인은 카펫을 만드는 예술가인 부딜 카펠렌(Bodil Cappelen)을 만나 몇 년의 편지 교환 후 결혼한다.
시 400여편과 번역시 200여편, 15세부터 쓴 일기와 편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