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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완11

■ 박상순 시인의 시 ■ 가야금 연주로 키사스 키사스를 듣다가 &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 &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3년 뒤 & 칼을 든 미용사를 위한 멜로디 & Love Adagio. 당신을, 당신을 위해 나는  그냥, 썩은 비둘기가 됩니다.   그래도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가야금 연주로 키사스 키사스를 듣다가     당신을 위해 나는  검은 눈  검은 옷, 검은 술, 검은 길이 됩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검은   모든 것이 됩니다.   그래도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하얀 처녀  하얀 목, 하얀 입술, 하얀 머리, 하얀 손······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나는   썩은 비둘기가 됩니다.  썩은 감자, 썩은 눈, 썩은 머리, 썩은 달, 썩은 눈물  썩어버린 하얀 손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죽는 연습을 합니다. 썩는 연습, 썩어서 버려지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 2024. 11. 19.
■ 이어진 시인의 시 ■ 목련 기술자 & 로맨스 & 투명인간으로 사물 통과하기 &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 케이크가 된 사람. ☆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던 흰색 팬티위에 돋은 달[月], 얼룩이 부끄러워서 창밖은 철마다 목련 꽃잎을 피워낸다 목련 기술자     꽃잎이 손톱으로 조금씩 번져오는 정류소 앞 머플러는바람을 재촉이며 걸었네 어머니는 나무 밑에서 무언가를끓여내고 있었지 내일은 나무의 얼굴이 좀 더 싱그러워질까 가족들을 뒤적이던 어머니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네   일요일엔 두 손을 모으고 착한 여자가 되고 싶었네 내무늬를 좋아하는 남자와 키스를 하고 돌아와서는 차곡차곡 빨래를 갰지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던 흰색 팬티위에 돋은 달[月], 얼룩이 부끄러워서 창밖은 철마다 목련 꽃잎을 피워낸다 나무 위에서 꽃잎은 다리가 길어지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나무 밖으로 하얗게 흘러나.. 2024. 11. 18.
■채인숙 시인의 시 ■ 여름 가고 여름 & 유파스나무 숲의 은둔자 & 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 & 까마귀가 나는 밀밭 & 시니.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여름 가고 여름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뿌리며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를 피워 내는  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어른 키만 한 도마뱀이 발견되었다  근데 라구난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거라고  동네 수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림을 헤쳐 만든 도시에는  식은 국수 면발 같은 빗줄기가 끈적하게 덮쳤다   밤에는 커다란 시체꽃이 입을 벌리고  도마뱀의 머리통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2024. 11. 17.
■ 최윤정 시인의 시 ■ 조약돌 &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일고 읽습니다 & 민자와 유리병 & 아보카도. 바늘 꿈을 꾸었어요  손가락들 깊숙이 꽂혀 있는 바늘을 뺀다고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작은  핏방울이 손가락마다 남았어요 조약돌     아름다움 중독증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상자에 질문지를 넣고 뚜껑을 덮습니다  궁금한 채로 남겨 두기로 합니다   아름다움 중독은  잠수하기 직전의 수련 낯빛 스치는 붉은 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조약돌의 줄무늬처럼 한꺼번에 숨을 들이키고 물속으로  사라지는 맥박까지 붙잡습니다   물살로 얼룩진 조약돌을 함께 넣었지요  가짓빛 얼룩은 꽃 피지 않고  자라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펄럭이지 않는 저녁이면  대답이 없을 상자를 두드려 봐요  줄무늬 조약돌에게 해 줄 말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골목길 가등처럼 깜박거리면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2024.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