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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당신을 위해 나는
그냥, 썩은 비둘기가 됩니다.
그래도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가야금 연주로 키사스 키사스를 듣다가
당신을 위해 나는
검은 눈
검은 옷, 검은 술, 검은 길이 됩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검은
모든 것이 됩니다.
그래도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하얀 처녀
하얀 목, 하얀 입술, 하얀 머리, 하얀 손······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나는
썩은 비둘기가 됩니다.
썩은 감자, 썩은 눈, 썩은 머리, 썩은 달, 썩은 눈물
썩어버린 하얀 손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죽는 연습을 합니다. 썩는 연습, 썩어서 버려지는 연
습을 합니다.
그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위해 다시 한 번
검은 눈, 검은 길, 하얀 처녀, 하얀 강
당신을 위한 그 모든 것들이 되어봅니다.
그래도, 그래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그런 곡을 듣다가 나는 비둘기가 됩니다.
당신을, 당신을 위해 나는
그냥, 썩은 비둘기가 됩니다.
그래도 끝은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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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편에 앉아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머리가 크
고 배가 불룩 나온 소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
머리가 크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소년들이 오래된 야
마하 피아노 한 대를 공중으로 옮기고 있다. 공중의 풀
밭에 피아노가 옮겨진다. 나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소
녀가 키 큰 화초 위에 앉는다. 피아노의 페달을 밟으며
어깨의 힘을 이용해 건반을 누른다.
나는 한편에 앉아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머리가 크
고 배가 불룩 나온 소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그녀는 한 소절
이 다할 때마다 한 번씩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소년들
은 반대편에 서 있다.
정원 아래. 허공 밖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둠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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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식빵을 잘 먹지 않습니다. 약국 옆에 제과점이
있었지요. 아주 오래된 제과점일 겁니다. 소화제는 서
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꺼내겠지요. 결
국은 빵 봉지도 줄겠지요 ······
소화제는 두 알이 줄었지요.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3년 뒤
한 시간 전에 약국에서 왔습니다. 그냥 소화제를 샀
지요. 긴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안경을 쓴 약사가 흰
봉투에 넣어 주었습니다. 약값은 냈습니다. 거스름돈도
잘 받았습니다.
그냥 소화제지요. 다른 약은 아닙니다. 식빵 한 봉지
도 샀습니다. 약국 옆이 바로 빵집입니다. 소화제 두
알 먹고 거울 한번 쳐다보고 TV 앞에 앉아보니 빵 봉
지가 두 개입니다. 한 봉지만 가져왔을 뿐인데.
그것도 그냥 식빵입니다. 정말 한 봉지만 샀습니다.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자를 쓴 제빵공도
옆에 있었습니다. 끈 달린 종이봉투에 담아왔지요. 그
렇지만 나는 그냥 TV를 켭니다. 내일은 맑답니다.
사실 식빵을 잘 먹지 않습니다. 약국 옆에 제과점이
있었지요. 아주 오래된 제과점일 겁니다. 소화제는 서
랍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꺼내겠지요. 결
국은 빵 봉지도 줄겠지요 ······ 소화제는 두 알이 줄었지
요. 오늘은 월요일 저녁입니다.
내일은 또 맑답니다. 한 시간 전에 약국에서 왔습니
다. 그냥 소화제를 샀지요. 긴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안경을 쓴 약사가 흰 봉투에 넣어 주었습니다. 내일은
연주회에 갈 겁니다. 오늘은 월요일.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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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 장면에 몰두한다. 그동안 검은 원피스를
입은 미용사인 그녀가 힘주어 내 마지막 머리칼을 긁는
다. 그녀의 칼날이 솔잎처럼 갈라져
칼을 든 미용사를 위한 멜로디
검은 원피스의 그녀가 내 머리를 자른다. 손가락들을
곧게 펴 빗처럼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다가 끝자락을 팽
팽히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칼을 세워 팽팽해진 내 머리
를 수평으로 긁는다. 한두 번 힘주어 머리칼을 긁으면
내 머리가 잘린다. 처음엔 몇 번 그녀의 칼 소리에 놀
라 나는 움찔대지만 가만히 숨죽여 거울에 비친 그녀
의 얼굴을 본다.
다시 그녀의 칼 소리가 들린다. 내 머리가 잘려 그녀
의 검은 원피스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그 소리 앞에
문을 달고 문을 닫는다. 문 뒤에서 검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평화로운 얼굴. 칼을 든 그녀의 손이 동심원을
그리며 물속으로 떠오르는 한 편의 영화를 구상한다.
영화는 시작된다. 물결치는 머리채를 휘날리며 그녀
가 연못 앞에 서 있다. 못 가운데로 칼을 던진다. 곧바
로 나는 다음 장면을 위한 음악을 구상한다. 숨죽여 내
귓속으로 밀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소리
를 따라 멜로디의 바닥으로 내려간다.
바닥에서 나는, 한때 내가 H라고 명명한 작은 섬을
만난다. 솔잎 같은 H, 뾰족한 H, 불명료한 것에 대해
끝없이 항거하는 H, 그렇지만 명명된 H, 섬의 봉우리
엔 솔잎 같은 머리칼이 흩어져 뒹군다. 검은 천을 덮고
손목을 잃은 한 소녀가 잠들어 있다. 검은 천을 덮고
잘려진 내 머리가 잠들어 있다. 잠 속에서 멜로디가 흘
러나온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 몰두한다. 그동안 검은 원피스를
입은 미용사인 그녀가 힘주어 내 마지막 머리칼을 긁는
다. 그녀의 칼날이 솔잎처럼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진
다. 새파랗게 쌓인다. 낙엽 진 숲 속에 내 머리가 떨어
진다. 검은 원피스의 그녀가 숲 속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힌다. 등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다가온다. 두
피에서 열이 난다. 내 머리 속에서 칼을 든 그녀가 열
에 녹는다. 녹아내린 그녀가 딱딱하게 굳으며 문이 닫
힌다.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이제 나는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거울 앞에서 동심원이 될 것이다.
녹아버린 영화 속에서 나는 끝없이 항거하는 섬이
될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면 나는 머리에 흰 깃발을
꽂고 달려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폭설. 쏟아지는 눈송
이. 폭설. 그녀의 얼굴. 그녀의 H. 쏟아지는 눈송이.
폭설. 그래도 나는 저 아래. 저 앞에. 밤의 고속도로
가 될 것이다.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폭설. 그 위에 선
칼을 든 미용사의 검은 원피스 속에서 음모 하나가 뾰
족한 H처럼 돋아나 그녀의 허벅지를 움찔대게 하는 내
파국(破局)의 멜로디를 칼을 든 누군가는 듣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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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덜 마른 ······
내 지붕에 닿았다가떨어지는 소리
Love Adagio
아직 덜 마른 목재들이 마르는 소리
----- 그의 무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덜 마른 그의 몸이 마르는 소리
----- 그의 불행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더 마른 짐승의 살이 마르는 소리
----- 아직 눅눅한 그의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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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1991년 계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 1996년 현대시동인상, 2006년 현대문학상, 2013년 현대시작품상, 2017년 미당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