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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들
1 아주 먼 저편
불필요한 공기 속에 나는 지금 있어, 공기들의 파동을
타고 들려오는 저 늙은 짐승의 울음소리
---- 소음과 음악은 구분되어야 해, 이 늙은 세상은 지금
온통 소음뿐이야!
음악으로만 당도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내 정원은 아주
먼 저편에 있네
2 너무 쉽게 흐트러져버리는 음악들*
어린 시절 나는 열렬하게 호랑이를 꿈꾸곤 했었다, 동
강의 그 아욱 덤불숲이나 가리왕산 숲속에 사는, 오직 말
탄 무사들만이 맞닥뜨릴수 있는 줄무늬가 있고, 아시아
적인 호랑이,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동물원의 한 우
리 앞에 서 있기 일쑤였다, 나는 호랑이들의 위풍이 어떠
한지 찾아보려고 방대한 백과사전들과 생물도감들을 뒤
적거려 보곤 했다(나는 아직도 그 형상을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여자의 이마나 미소를 완벽하게 기억
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년기가 지났고, 호랑이
와 그것에 대한 열정 또한 시들해져 버렸다, 그러나 여전
히 나의 꿈속에는 그것들이 남아 있다, 가라앉고 있고, 혼
란스러운 그 검은 삼각중에서 여전히 호랑이들은 사방에
서식하고 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잠이
들면 어떤 꿈이 됐든 간에 빠져들게 되고, 곧 그것이 꿈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
각하곤 한다, 이것은 꿈, 내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완벽
한 음악이며, 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는 한 마리 호랑이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아, 나의 무능함이여, 나의 꿈들은 내가 그토록
갖기를 바라는 그 맹수를 결코 탄생시킬 줄 모른다, 내 꿈
에 호랑이가 나타나기는 나타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그 영상은 해체되어 있거나, 약하기 그지없거나, 온전
치 못한 형상을 가졌거나, 감당할 수 없는 크기를 가졌거
나, 쉽게 흐트러져버리고, 개나 새를 닮은 그런 호랑이다
* '너무 쉽게 흐트러져버리는 음악들'의 내용은 보르헤스의 「꿈의 호랑이들」을
좀 고쳐서 인용하였다.
3 琵琶
내가 꿈꾸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비파
호랑이들의 정원도 그 비파 속에 있다네, 비파 속 정원
에선 밤마다 달이 뜨고 가을이면 호랑이들 뚝뚝 떨어
지네
비파 속 정원에서 무사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벨 수 없
어 밤마다 자신의 心琴을 연주하네
호랑이들의 비파 속 정원에는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어
비가 올 때마다 따스한 호롱불의 심지가 돋아나네 불꽃의
음악, 바람이 불 때마다 누군가 창가에서 음악을 듣네
나뭇잎 호랑이들이 단풍 들어가는 비파 속 정원에는 끝
내 잠들지 못하는 내가 있네, 내가 누워서 바라보는 뚝뚝
낙엽 지는 天井의 달빛이 있네
4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사랑이여 그대가 없어도 혼자 담배
피우는 밤은 오네
보르헤스의 책을 펼쳐놓고 「꿈의 호랑이들」을 읽는 밤
은 오네
밤이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닌데 깊은 밤 속에서
촛불로 작은 동굴을 하나 파고 아무도 읽지 않을 시를 쓰
는 밤은 오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내리기도 하겠지만
내 고독이 만드는 음악을 저 홀로 알뜰히 듣는 밤은 또
오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그대, 통속소설처럼 떠나간 그대는
또 다른 사람 품에서 사랑을 구하고 있겠지만
이제는 아무리 그대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아
나는 아프네, 때로는 그대와의 한 순간이 내게 영원으
로 가는 길을 보여줬으니
미안해하지 말게, 사랑이여, 그런 건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이여
그대에 대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이미 불멸
을 지녔네
5 地上의 가을
가을이 되니 호랑이들이 아프네, 서울대공원에서 나는
보았네
아파서 울고 있는 호랑이들을, 도처에 신음처럼 흩날리
던 호랑이들을
지상의 곳곳에 그대들 쓰러져 누워 있는 오후, 나는 케
이블카를 타고 그대를 머리 위를 지나왔네
음악은 없고 그림만 널려 있는 세상, 케이블카 위에서
나는 비명처럼 외로웠네
그대들 하염없이 흩날리며 사라져가던 가을의 숲
그 굵은 나무둥치에 머리를 박고 나 사제처럼 오래 기
도했네
언제나처럼 태양은 또 내 머리 위에서 대낮처럼 빛나고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바람은 또 내 노래를 허공의 저편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지만
나는 내 배낭 가득히 상처 입은 호랑이들을 주워 담고
가파른 가을, 이 地上의 정원에서 여전히 배회하고 있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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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內樂
밴드는 없어요
오케스트라는 없어요
모두가 녹음된 거랍니다
그러나 클라리넷 소리가 듣고 싶으면 들으세요
약음기가 달린 트럼본, 부드러운 트럼펫 소리
모두가 녹음된 거랍니다
-----실렌시오 클럽
1
전등寺의 밤이다
2
밀롱가, 밀롱가, 눈발들 서로 부딪치며 몸 섞는 소리, 아
득히 들려오는 워터멜론슈가의 밤이다
3
워터멜론슈가의 어두워지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거
리를 바라본다, 바람은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간다, 바
람은 어느 새 이 겨울저녁의 돛배를, 조금 더 깊은 생의 江
岸쪽으로 밀어다 놓았다
4
로맹 가리와 노가리와 프레데릭 파작과 대작하는 밤, 雨
雨雨 알코올의 비, 온몸으로 쏟아지는 밤, 이런 밤은 언제
쯤 끝나나, 담배도 다 떨어져가는데 내가 속한 이 밤은 천
개의 별빛이 빛나는 들판의, 검은 천막보다도 더 어둡다
5
커피를 끓여 마셔도 여전히 갈증나는 밤, 다시 녹차를
끓인다 이 녹물 같은 차로 내 갈증이 가신다면 밤새 찻물
을 끓일 수도 있으련만, 지금은 다만 녹슨 내 몸의 주전자
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실내악의 밤
6
밤새 녹차를 마신다, 창밖에는 밤새 눈 내리는 소리, 內
蒙古의 겨울 같은 내 몸엔 밤새 찻물 흘러가는 소리
7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대는 나에게로 오는 것이냐,
음악이 있어서 나는 그대에게로 가는 거란다, 거란族의
말발굽 소리처럼, 촛불의 음악처럼
8
다시 담배, 다시 어둠
9
눈을 들어 창밖을 보면 아득한 밤의 저편에서 빛나는
산뚱 반도의 불꽃 하나
10
촛불, 불꽃, 그대 생의 타르초
11
그러나 밤마다 생은 내 머리 위의 전등寺에서만 빛나네
12
다시 녹차, 다시 담배
13
다시 내 안의 어둠, 천 개의 별빛이 빛나는 들판의, 검
은 천막보다 더 깊은 어둠
14
다시, 천 개의 流星이 천 개의 시를 쓰며 지나가는 내 안
의 어둠, 지금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은 다 시!
15
한밤중 차를 타고 강원도를 여행하다 보면 멀리 산 중턱
에서 깜빡이는 외딴집의 불빛 하나, 아, 그럴 때면 무장공비
처럼 그 불꽃의 생 속으로 스며들고 싶어, 아, 난 거의 미쳐!
16
그게 시야, 내 혈액 속의 한 部族이 밤새 성냥불 긋는 소
리
17
그게 생이야, 부엌 아궁이에서 잘 마른 참나무들이 말
발굽 소리를 내며 밤새 타오르는 소리
18
백야의 음악이지, 잠들지 못하는 전등寺의 지붕을 고요
히 덮으며 밤새 獨立戰爭처럼 함박눈, 무장무장 내리는 소
리
19
너는 들리니, 나의 생이 밤새 네 영혼의 푸른 共和國을
향해 移住하는 소리
20
아, 가고 싶다, 우리들 영혼의 푸른 고원, 저물녘이면 허
공에 방목했던 한 떼의 새들이 천 개의 촛불을 물고 돌아
오는 순하고 밝은 저녁의 나라
21
그러나 지금은 전등寺의 밤, 전등사 지붕 위로 하염없
이 白旗 같은 눈발 펄럭이는 밤
22
그래서 스파케티 삶는 밤!
23
추억의 마구간에서 말 한 필 꺼내어 그대에게로 달려가
고 싶은 밤, 함박눈 펑펑 내리는 저 세상 밤 속으로, 눈발
들 머플러처럼 휘날리며 마구 달려가고 싶은 밤
24
그러나 다시 녹차 우려내는 밤, 다 식은 녹차 한 잔으로
남은 마구간의 밤
25
내 몸이 녹슨 태엽을 감으며 유리창 밖에서 울고 있는
하얀 새의 시간, 내가 속해 있느 이 地上의 갸륵한 시간을,
유리창을 밤새 두드리고 있는 저 눈발들, 허공의 유목민
들
26
그러나 고갱 출판사 한 켠 다락방에선 아직도 누군가
웅크리고 앉나 밤새 시를 쓰고 있지
27
톱밥 난로, 고갱 출판사에서는 톱밥 난로의 불꽃으로
시를 인쇄하지!
28
그리고 밤새 생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
른다, 고요하게 타오르던 톱밥 난로의 불꽃, 그 붉은 산맥
곁에서 밤새 나의 겨울도 조금씩 덥혀져 하르르 하르르,
생 쪽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덥
혀진 핏방울 속으로도 끝내 바람 불어 가루약처럼 번져가
던 눈보라의 겨울밤, 톱밥 난로에 세 들어 살던 가난한 청
춘의 갸륵한 天窓을 아득한 깃발처럼 이제 난 아예 잊었
는지도 모른다
29
가스 레인지의 불꽃, 저 끝없이 내리는 함박눈의 욕망,
실내의 화분엔 나무 한 그루, 흙 속에 감추어둔 은밀한 뿌
리의 생애, 아직은 어두운 새벽, 눅눅하고 오래된 노트 한
권을 들고 누군가 가스 레인지의 푸른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30
그러나 아직은 어두운 전등寺의 새벽이다
31
실내악, 나의 기침 소리
32
또 다른 실내악, 담뱃재 사각사각 타들어가는 소리
33
북소리, 멀리서 네 심장이 뛰는 소리
34
아 아직은 어두운 아무르 강가의 새벽, 전등寺 아래, 별
들의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여기는 고갱 출판사
[이하 생략]
박정대 시인: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가 있다.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