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
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멍게
멍게는 다 자라면 스스로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
버린다. 어물전에선
머리 따윈 필요 없어. 중도매인 박 씨는 견습인 내
안경을 가리키고
나는 바다를 마시고 바다를 버리는 멍게의 입수
공과 출수공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지난 일이여. 나를 가만두지 말길. 거
대한 입들이여.
허나 지금은 조용하길. 일몰인 지금은
좌판에 앉아 멍게를 파는 여자가 고무장갑을 벗고
저녁노을을
손바닥에 가만히 받아보는 시간
< >
상어 한 마리가 누워 있다.
같잖은 수만 마리의 오징어상자 사이에서
쳇, 하는 입모양으로 누워 있다.
나도 쳇, 하는 표정으로 가고 싶다.
상어
마산수협공판장 1판장
상어가 누워 있다.
오징어 5백 상자 사이에 상어가 누워 있다.
상어는 가끔 오랫동안 굶는다.
굶어 상어는 상어
눈을 갖는다.
이놈도 오래 먹이를 먹지 않았네.
상어 한 마리가 누워 있다.
같잖은 수만 마리의 오징어상자 사이에서
쳇, 하는 입모양으로 누워 있다.
나도 쳇, 하는 표정으로 가고 싶다.
상어는
질주로 세상을 가른다.
작은 놈은 먹어치운다.
가을 추석 대목이 가까워지자,
상어 눈을 한 사내들이
돌아온다.
오래 굶은 사내들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다른 이의 짐을 싣고 질주하는 것뿐이다.
이들도 가끔 오래 밥을 먹지 않고
술만 마신다.
가끔 상어 이빨을 드러내고
닥치는 대로 일행들을 물어뜯는다.
사람도 굶어, 다시 떠날 힘을 얻는다.
돌아온 자야, 떠나는 자야. 불러본다.
당신의 어깨뼈 속에 들어앉아.
흐느끼고 있는 여자야.
생에 답은 없다. 그러니 창고 가서, 창고에서
언 채로 잔다. 이제는 작업복이 되어버린
외투를 입고서
자거라. 모든 괴로움의 답은 잠이다.
가서 자거라.
< >
다른
물고기가 숨이고기를 먹으려 하면 해삼일 독소를 뿜
어 다른 고기를 쫓아내는데 거참 해삼은 몸으로 한
고기의 집이 되니, 떠나왔거나, 돌아오거나, 헤어지
거나, 부자거나 인간사 이룰 수 없는 내공을 쌓았다
해삼
해삼을 파는 김 씨는 뱃살을 빼러 헬스장으로 가
고 해삼은 항문을 통해 가끔 배 속 내부 기관을 버
리고 새로 만들기도 한다 해삼의 똥구멍은 커서 숨
이고기가 들어와 살기도 하는데, 가관이란다 다른
물고기가 숨이고기를 먹으려 하면 해삼일 독소를 뿜
어 다른 고기를 쫓아내는데 거참 해삼은 몸으로 한
고기의 집이 되니, 떠나왔거나, 돌아오거나, 헤어지
거나, 부자거나 인간사 이룰 수 없는 내공을 쌓았다
어는 날 나는 속을 버려 창자를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앓았는데, 아프다 소리도 못 하고 하루 종일
고등어 내장만 파는 한여름날이었다 생선 살은 쭈
쭈바처럼 녹았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데 왜 인간의
항문은 통쾌하게 뚫려 있지 않을까 이래가지고서야
하늘과 땅 어디하고 시원하게 내통할 수 있을까, 하
는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속은 너무 복잡하구나 구불구불 돌고 돌
아 머무르다가 제대로 내지르지도 못하는구나 해삼
의 입은 다섯 개 그래서 항문이 커야 하는데 바람도
불고 구름은 오래 머물고 있는데 불현듯 해삼 똥구
멍에 바닷물 든다 바닷물 들어
< >
사람을 어디론가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끌림과
당김을 향해 가게 하듯이 오롯이
바다가 뒤집어져야 해파리 떼들이 다시 사라지겠
지만 오늘은 시월의 달이 너무 부풀어
저 빛의 치마를 견딜 수 없군요.
해파리
해월(海月)이라고도 불렀답니다. 바다의 달, 정약
전은 유배지에서 얼굴과 눈도 없이
치마를 드리워 헤엄을 친다고 기록하고 있습죠.
달의 치마를 드리워 세상의
사람을 어디론가 어디론가 알 수 없는 이끌림과
당김을 향해 가게 하듯이 오롯이
바다가 뒤집어져야 해파리 떼들이 다시 사라지겠
지만 오늘은 시월의 달이 너무 부풀어
저 빛의 치마를 견딜 수 없군요. 그래요. 떠나온
곳의 미련처럼 오늘은 해파리 떼도
몰려왔군요.
그래요. 가고 있는 길의 두려움처럼 바다에 수만
의 달빛 치맛자락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있군요. 저 꽃잎들의 간 곳을 내가 새롭게
기록한다면 달빛 하나 바람에
훅, 날려 당신 자는 곳 창가에서 휘날릴까요.
< >
눈빛 하나라도
좋고 스치는 손가락과 손가락의 느낌이라도 좋다
가끔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자고 있는 내 얼굴을 한 번은 내려다보고 싶어졌
지만
사람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과 가졌던 비밀
이 생각나 동백이 진 것도 아닌데 한 번씩은 얼굴
이 붉어졌다
눈빛 하나라도
좋고 스치는 손가락과 손가락의 느낌이라도 좋다
가끔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자고 있는 내 얼굴을 한 번은 내려다보고 싶어졌
지만
어떤 날 밤에서라도 웃고 있을 것 같아 그 모험은
손수건처럼 접어두었다 동굴을 찾아가 이름을 버
리고
목놓아 울다 사라지고 싶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금니라도 빼서 춤추러 가고 싶은데
요즘은 춤추러 가는 사람들이 없다
어느새 긴 머리칼을 자르러 가는 사람은
헝클어진 존재를 잘라내고 혁명하러 가는 사람들
이다
가서 손톱을 소제하는 것은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서다
그걸 가끔 나는 까먹는다
< >
성윤석 시인: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아프리카, 아프리카」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 묘지』 『멍게』 『밤의 화학식』 『2170년 12월 23일』『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사랑의 다른 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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