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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이 훤 시인의 시 ■양눈잡이 1 & 양눈잡이 2 & 도원결의 & 겨울 주소 & 라스트 워드.

by 시 박스 2024.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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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눈 검안. by. pexels-kseniacher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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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비행기 속

  여러 방을 드나든다*

 

  이곳은 정원이고 여긴 숙소야 여긴 첫 번째 산책로고

저기에 두 번째 산책로가 있어

  여기서는 운동을 하지

 

  비행기 안에 사정이 이렇게나 많다

 

양눈잡이 1

 

 

 

  비행기가

  밤으로 뛰어드는 동안

 

  당신은 보고 있다

 

  시간 반대로 재생되는 화면과 시간 정방향으로 구르는

구름의 뒷걸음질

 

  강 같아

 

  이제 숨이 잘 쉬어진다 입을 열지 않아도

  타국어로 말하지 않아도

 

  여긴 거울이 여러 개야

  불리지 않아도 몸을 구석구석 살필 수 있지

  우리는 몇 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승객은

  자느라 식사를 놓치고

  승객은 불을 켜 언어를 줍고 승객은

  세금을

 

  벌고 승객은 화장실 앞에서 팔이나 목이나 허리를 움직

인다 모두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어디서든 날개가 보이는

  이곳의 질서

 

  지나온 폐허들은 앞주머니에 버려주십시오

 

  승무원은 친절하고

  승객은 몇만 빼고 화면을 보고

 

  우리는 비행기 속

  여러 방을 드나든다*

 

  이곳은 정원이고 여긴 숙소야 여긴 첫 번째 산책로고

저기에 두 번째 산책로가 있어

  여기서는 운동을 하지

 

  비행기 안에 사정이 이렇게나 많다

 

  코를 꽉 막거나

  하품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듣게 될 즈음

 

  도착할 예정

 

  그곳을 마지막 집이라 부를 예정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야

  아직 쓰지 않은 접이식 식탁과 강과 비행기가 몸에 많

이 남아 있지만

 

  아침과 아침이 몸을 뒤섞는다

 

  포개어진 자리는 한참 지나야 포개어졌다는 걸 알게 돼

 

  날개의 날개

 

  닫힌 방에서

  비행은 계속되고 두 사람 다시

  푸아 푸아

 

  모국어로 말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남지 않은 것들의 뒷걸음질

 

  저기

 

  얼굴이 보인다

 

 

* 기내를 여러 방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폐소 공포증을 가진 사람도 비행

할 수 있다. 이중 가장 중요한 방은 그가 자유롭고 기쁘게 드나들 수 있는

옆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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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오른눈잡이인데 사랑할 때는 왼눈을 더 크게 떠요

 

  오른눈잡이요?

 

양눈잡이 2

 

 

 

  저는 오른눈잡이인데 사랑할 때는 왼눈을 더 크게 떠요

 

  오른눈잡이요?

 

  네

  오른눈으로 보고 듣고 다녀와요

  어깨가 남는 곳도 오른쪽 그래서 사랑할 때는 왼눈으로

보게 돼요

 

  혹시 운전하시나요

 

  기분을 만회하고 싶을 때만요

 

  선생님 그렇게 자꾸 돌아가시면 흐려져요

  여기 두 막대 보이세요?

  방금 원 밖으로 물고기와 사슴이 튕겨 나갔는데 어느

쪽이 더 잘 보이세요

 

  아직 가리키지 않은 쪽이요

 

  그때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했거든요 모니터 앞에서 그

리 많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많은 문장을 쓰고도

 

  직업을 자꾸 물어보는 사람에게 대답한다

 

  어느 쪽으로 윙크하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왼눈을 감았다 오른눈을 뜨면

  세계가 조금 내려가 있다

  그 많은 걸 보고 그 많은 걸 쥐고도

 

  소리 내서 가장 아래부터 읽어보세요

 

  5   ㄱ   s   !   ㅏ

 

  틀린 걸 알면서 멈추지 않고 읽는다 조광판을 밟고 일

어나듯

 

  선생님

  양눈잡이가 첫 문장을 어떤 눈으로 먼저 읽는지 아세요

 

  그건 읽는 사람도 몰라요

 

  그러시구나

  아시죠? 눈이 두 개가 아니었다면 입체 영화 같은 건 보

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시구나

  안경점이 남는 장사인 걸 누가 몰라

  <  >

 

 

 

손가락이 튕겨지지 않자

  아무개는 아무 개는 되기 싫다고 생각한다

  개 말고 걔는 어때

 

  안전하고 고요한 타인이 될 수 있다면

  좋아 보일 만큼만 나를 알 수 있다면

 

도원결의

 

 

 

  손가락을 튕기면

  아무 일도 없던 때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던 때의 우리는 안전하고 고요하고

  아직 아무도 아니다

 

  하고 싶었던 말을 꼭 샤워 하다 말고 하는 습관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가 커진다

 

  다치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 복숭아가

  복숭아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서술하시오

 

  시간에겐 버릇이 있다 곁눈을 가지게 된 사람에게 너그

럽고 잔인해지는

 

  손가락이 튕겨지지 않자

  아무개는 아무 개는 되기 싫다고 생각한다

  개 말고 걔는 어때

 

  안전하고 고요한 타인이 될 수 있다면

  좋아 보일 만큼만 나를 알 수 있다면

 

  평생 가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으면서

 

  걔는 꼭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사라지더라

 

  목소리 큰 사람이 떠나고

  누구도 남지 않았을 때

  몸에서 뻗어나는 버릇을 받아 적는다

 

  축하해 곁눈을 갖게 된 걸

 

  복숭아가 되는 데 실패한 씨앗이 복숭아나무가 되어 있

는 영문

 

  아무 데에 와 있다 우리

 

  시간에게도 손가락이 있어서겠지

 

  저가 한 일을 들킬까 봐 일부러 빠르게 지나간다

  <  >

 

 

 

 

집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이

  겨울에 대해 운운하고

 

겨울 주소

 

 

 

  이 집에는 거울이 너무 많다

  겨울에는 거울을 좀 치우는 게 좋겠어

 

  거울에는

 

  한밤중 물 마시기 위해 눈 감고 거실을 가로지르는 사

람과

  귀가 후 소포를 껴안고 기뻐하는 사람과

  아침마다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부분에서 우는 사람이

 

  산다

 

  울다 말고 거울을 보면 거짓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멈

추게 돼

  나만 모르고 모두에게 기억되는 편지가 있다면

 

  밤새 쓴 문장을 다음 날 소리 내어 읽으며

 

  들어서고 또 나가고

  들어서고 또 나가고

 

  집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이

  겨울에 대해 운운하고

 

  적신 수건을 널고 자면 아침에 눈가를 덜 매만지게 된다

 

  티브이에서

 

  몰래 쓴 일기들이 한 사람에게 쏟아진다

  <  > 

 

 

 

 라스트 워드

  그 닭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닭이라면?

  어떤 플레이를 하나요

  말과 몸이 전부인 세계에서

 

 

라스트 워드

 

 

 

  근래에 무얼 했어요?

 

  워드 플레이와 닭 튀김

 

  빠지고 묻고 길어 올리고

 

  선택하지 않은 곤경과

  선택 가능한 유익 사이

 

  얼마나 간편하니 얼마나 다행이니 타자가 있어서 우리

를 간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잊게 되는 질문과 다 잊고 나면 그제야

  궁금해지는 몇 개의 말 우리를

  지탱하는 

  그래서

 

  어제 빠뜨린 문장이 오늘 몇 도로 익고 있나요

 

  손으로 만지면

 

  쥐고 있던 것들 사라진다

 

  입에 맞는 말을 찾고 있다 우는 표정으로 튀겨지는 동안

 

  친구의 선의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모르는 이의 질문이 우릴 구원하고

  애인이

  손톱을 숨기기도 하는

 

  어쨌거나 믿음과 말은 별개의 닭

 

  말이 믿음보다 항상 작지

 

  라스트 워드

  그 닭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닭이라면?

  어떤 플레이를 하나요

  말과 몸이 전부인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구원이

  말이 되기도 하지만 닭에게는 질문하지 않는다

 

  마지막 플레이

 

  곤경에 빠지고 또 묻고 새로 태어나 잠시 아무것도 아

니게 된다

 

  얼마나 운이 좋니 간과되는 우리는

  <  >

 

 

이 훤: 시인. 사진가. 2014년 《문학과의식》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양눈잡이』가 있고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를 쓰고 찍었다. 텍스트와 사진을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