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의 여름을 서툴게 배웅하는 동안
나는 잃어버린 적 없는 시간을 그리워했다, 때때로
수박향, 은어
한낮의 여름
수박향이 나는 물고기에 대해 알고 있니
은어라는 이름의 물고기래
때로 어떤 문장은 화석처럼 박힌다
언젠가 우리 물 맑은 곳으로 떠나자, 약속
뾰족했던 마음이 한결 둥글어질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눈동자보다 깊은 수심은 없어, 어디에도
흐리고 비 흐리고 가끔 비
물고기에게서 어떻게 수박향이 날까
은어는 초록 이끼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난대
허공에 떠다니는 우울을 알뜰하게 모아
바라봤다 나는
우리 사이, 이끼와 수박향의 거리만큼 가깝게 먼
흥얼거리는 콧노래도 없이 투명한 한낮
약속처럼 언젠가는 오지 않았고
몇 번의 여름을 서툴게 배웅하는 동안
나는 잃어버린 적 없는 시간을 그리워했다, 때때로
저기 밤의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
은어가 돌아올 때까지 뭘 하며 지낼 거야
여름이 오지 않기를 믿으며 바라며
뭘 하며 지낼 거야 한 사람이 사라지면
원이 닫히지 않기를 바라며 믿을래
종이 위 빗방울이 마르는 동안만 뭉클할 것, 내내
이제 수박 예쁘게 자르는 방법을 지우며
수심을 다스리자, 초록 이끼로 번지는 우울들아
먼 데 화석으로 밤을 건너는 물고기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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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손을 타면 안 될 것 같아서
금세라도 분홍이 물러질 것만 같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너무 예뻐서
이름부터 지었다는 한 사람의 마음처럼
납작복숭아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게 무엇일까
그 대신 납작복숭아 한 알을 샀다
오래된 신화에서 영생을 안겨준다던 열매
비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기에
나는 한 사람의 입김에만 꽃 피우는 나무
둥근 복숭아가 거짓말처럼 탐스럽다면
어쩐지 납작복숭아는 숨겨놓은 마음
생각만으로 분홍이 차올랐나 번졌나
얇은 종이봉투에 담긴 복숭아가
도착하는 동안 상하지 않을까 아까워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네게 걸어갔다
기다림을 기다려주세요, 기다림을
복숭아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손을 타면 안 될 것 같아서
금세라도 분홍이 물러질 것만 같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너무 예뻐서
이름부터 지었다는 한 사람의 마음처럼
노을은 붉고 발등은 부어오르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너는 보이지 않고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의 문장
지나친 후숙은 언제나 옳지 않다
이제 너는 없는 사람
너는 이제 없는 사람
오래된 사실을 무던히도 망각하는구나
납작해진 마음이 뭉클 물러지고
길 위에 주저앉았나, 부끄러움도 없이
세상 가장 예쁜 걸 볼 수 없는 사람
세상 가장 예쁜 걸 줄 수 없는 사람
비밀의 문장에 함부로 밑줄을 그었기에
오래된 신화가 약속한 영생을 믿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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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린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셔츠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 땀
흐르고 또 흘러도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저 하늘엔 별들이 밤새 빛나고
찬바람 소슬바람
산 너머 부는 바람
간밤에 편지
한 장 적어 실어 보내고
낙엽은 떨어지고
쌓이고 또 쌓여도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하얀 학교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우리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운동장에는 스탠드 불빛이 밤새 비추고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네가 그려놓고 간 동그라미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 <사계>에 기대어 쓰다.
https://youtu.be/wn8uxz-NW_s?si=mMsaJDAi2PN_pNRD
찰리는 소년 가장
밤 늦게까지 신문을 돌리고
가족들의 저녁이 될 딱딱한 빵 한 덩이를 사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그늘이 없고
그늘이 없다는 말은 이미 서늘하고
찰리와 초콜릿 공장
찰리는 소년 가장
밤 늦게까지 신문을 돌리고
가족들의 저녁이 될 딱딱한 빵 한 덩이를 사서 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그늘이 없고
그늘이 없다는 말은 이미 서늘하고
영화 속에서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견학하게 된
네 명의 욕심꾸러기와 소년 가장 찰리
초콜릿 강물을 손에 떠서 몰래 홀짝이다 강 속으로 빨
려 들어가게 된 아우구스투스, 결국 그 아이는 초콜릿이 흐
르는 파이프에 거대한 몸이 끼어버렸지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초콜릿 왕
국을 세웠을까
그런가 하면 어른들의 주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
대용 껌을 먹어버린 바이올렛, 온몸이 파랗게 물들어 방방
방---- 부풀어 올랐다
다만 껌씹기를 좋아한 것뿐인데 끝내 향긋한 껌이 되어
버린
회장님의 딸 응석받이 버루카는 지금 당장 황금알을 낳
는 거위가 갖고 싶다며 품질 감별 판별기에 훌쩍 뛰어 올
랐다
순식간에 소각장으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는데
커다란 초콜릿 바를 나노 단위의 신호로 분해하여 작게
만드는 광선, 이게 너무나 신기했던 마이크는 멋대로 기계
를 작동하다 광선에 쏘이게 되었다
손톱만큼 작아진 그 아이의 발이 대롱거리고
영화의 결말
아무런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후의 일인이
된 소년 가장 찰리는 윌리 웡카에게 초콜릿 공장을 물려받
데 됩니다
그는 찰리를 꼭 껴안으며 말합니다
찰리야 원하는 모든 것을 갑자기 손에 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되었는데요
찰리가 묻습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단다
윌리 웡카는 찰리를 더 꼭 안아줍니다
잔혹동화라는 말이 나는 아직 무섭고
왜 찰리의 기쁨보다
아우구스투스와 바이올렛과 그리고 마이크의
안위가 오늘까지도 궁금한지
< >
펜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복
숭아 라이브 드로잉은 계속되었다 드로잉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할 것 같았다 무해한 복숭아를 응원
하기 위해 무럭무럭 차오르는, 물큰
복숭아 라이브 드로잉
무언가 갑자기 떠오른 사람처럼 한 사람이 자리를 떠났
다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않은 나는 자리를 지켰다 열두
번째 나무 아래 오래 서서 복숭아 열매를 바라보았다 천천
히 차오르는 생각 혹은 열매, 펜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복
숭아 라이브 드로잉은 계속되었다 드로잉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할 것 같았다 무해한 복숭아를 응원
하기 위해 무럭무럭 차오르는, 물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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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다정한 호칭』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무해한 복숭아』 등이 있다. 시창작 동인 '행성'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