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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여름 가고 여름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뿌리며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를 피워 내는
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어른 키만 한 도마뱀이 발견되
었다
근데 라구난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거라고
동네 수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림을 헤쳐 만든 도시에는
식은 국수 면발 같은 빗줄기가 끈적하게 덮쳤다
밤에는 커다란 시체꽃이 입을 벌리고
도마뱀의 머리통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
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납작하게 익어 가는 열매를 따먹으며
우리는 이 도시에서 늙어 가겠지만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려나
여름 가고 여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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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거대한 그림자 덩어리. 그가 사는 숲에서 구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구름에 놀랍도록 견고한 이름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
유파스나무 숲의 은둔자
숲은 어둠을 내장한다. 개미의 분주한 고독을 위해 나
무는 하루 5센티미터씩 키를 키우고 뿌리는 가야 할 방향
을 거슬러 땅 위로 솟아오른다.
18세기 홀랜드로 그림을 배우러 떠났던 화가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긴 겨울 그림자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지배자의 얼굴에 주름을 그리
면서 고독과 고립의 처지를 설명하느라 병들고 말았다.
눈이 어두워지자 화가는 자바해를 건너 숲으로 돌아왔
다. 유파스나무 줄기로 엮은 동굴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사랑이나 영원 따위를 발견하려는 어리석은 모험가를 만
날 때마다 독이 든 즙을 발라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그는 언제나 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독을 품은 마음이
란 그런 것이지. 한때 내 팔 위에 앉아 쉬었던 새들을 향
해 한 점 눈물을 뭉쳐 독화살 촉을 겨누고 말아.
숲은 거대한 그림자 덩어리. 그가 사는 숲에서 구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구름에 놀랍도록 견고한 이름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려 주지 않는다.
숲은 오늘도 은둔자의 검은 가운을 덮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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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처절할수록 환하고
내일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
우리는 검고 단단한 한숨이 되어
밤마다 잔뜩 긴장한 글자들을 빈 칸에 채웠다
원고지는 고지서처럼 목을 죄었고
늙어 무엇이 되려나 생각하면
창백한 정물화가 떠올랐다
가난과 고향을 팔아서 시를 적는 일이 지겨웠지만
가난하지 않은 시인을 여태 본 적은 없었다
실패는 처절할수록 환하고
내일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형용사가 되고 싶다고
일요일이 되고 싶다고
처마가 되고 싶다고
국도가 되고 싶다고
감자밭 고랑이 되고 싶다고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는 것은
버리지 못한 일생의 습관이었다
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
모든 아침은 급작스럽고
모든 이별은 태연했다
본 적도 만진 적도 없는 당신이 그리웠다
저질러 본 적 없는 죄를 꿈꾸고
언제난 쉬운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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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군무의 한가운데를 휘저어 놓고
산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 까마귀의 비명처럼
까마귀가 나는 밀밭*
하루가 붉게 가라앉는다
한 번도 쩔쩔 끓는 마음을 보여 주지 못하고
애인과 이별한다
점술사는 애인이 나쁜 이름을 가졌다고 말했다
세상과 섞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까만 군무의 한가운데를 휘저어 놓고
산 너머로 사라지는
저녁 까마귀의 비명처럼
불길한 울음소리를 가진 동물들의 우화를
주말에 읽는다
신비주의자가 전한 허술한 희망에 기대
무언가에 닿으려 애쓰던 마음아
그만 나를 놓아주기를
샛노랗게 부풀어오르는 밀밭 사이로
축축한 날개를 접는
내 사랑
나는 아직도 애인의 이름을 모른다
* 고흐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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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덜컥 잊혀진 거지
귀 옆으로 기차가 지나던
우리의 작은 방이 사라진 것처럼
시니*
잊어버렸지
당신도 이 바다에 온 적이 있었지만
빠랑뜨리띠스 검은 해변에서
나란히 앉아 마차를 타던 우리는
다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으면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지
헛된 추억을 불러오는 석양이
절벽을 적시고
놀란 당신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겁먹은 나는 입을 열지 못했네
서로에게 덜컥 잊혀진 거지
귀 옆으로 기차가 지나던
우리의 작은 방이 사라진 것처럼
말하지 못한 것은
말할 수 없었던 것
뜨거운 국물 같은 것을 먹으면
당신이 생각났다고
* 시니: '여기'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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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 1999년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1945, 그리운 바타비아」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