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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꿈을 꾸었어요
손가락들 깊숙이 꽂혀 있는 바늘을 뺀다고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작은
핏방울이 손가락마다 남았어요
조약돌
아름다움 중독증을 가진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상자에 질문지를 넣고 뚜껑을 덮습니다
궁금한 채로 남겨 두기로 합니다
아름다움 중독은
잠수하기 직전의 수련 낯빛 스치는 붉은 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조약돌의 줄무늬처럼 한꺼번에 숨을 들이키고 물속으로
사라지는 맥박까지 붙잡습니다
물살로 얼룩진 조약돌을 함께 넣었지요
가짓빛 얼룩은 꽃 피지 않고
자라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펄럭이지 않는 저녁이면
대답이 없을 상자를 두드려 봐요
줄무늬 조약돌에게 해 줄 말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골목길 가등처럼 깜박거리면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끝을 묻기도 전에
막다른 길목에서
미래의 갈피를 뽑아 버린 날
바늘 꿈을 꾸었어요
손가락들 깊숙이 꽂혀 있는 바늘을 뺀다고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작은
핏방울이 손가락마다 남았어요
닦지 않은 핏방울이
검은 나방이 되어 날아가는 순간에도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지만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제 같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소천하신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가자는 말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즈음
혼자 앉아서 상자를 마구 흔들었어요
거센 파도 소리에 맞춰
맘이 제각각 펄럭이는 날
조약돌은 말이 없었고
여전히 아프거나 시원함은 없었습니다
다만 일그러졌다가 팽창한느 상자 쪽으로
혹은 바람 쪽으로
낯선 주파수를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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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 노랑은 치명적이죠
은점이 날개 위에서 반짝거릴 때
멈춰진 자전거의 세계를 훔칠 듯 다가와서
선잠에 빠진 거울 속으로 날아갑니다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유리 꽃병에 담긴 물이
잘린 줄기의 단면을 보여 줄 때
줄기는 가끔 안쓰럽습니다
물러진 단면은 지독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읽히지 못한 채 부서져 버리니까요
투명한 공기를 헤치고 은점표범나비가 날아갑니다
반투명 노랑은 치명적이죠
은점이 날개 위에서 반짝거릴 때
멈춰진 자전거의 세계를 훔칠 듯 다가와서
선잠에 빠진 거울 속으로 날아갑니다
반투명에서 불투명으로
가방은 그를 데리고 노랑 지붕 옥탑방으로 날아갔을까요
짝짓기를 위해 하늘 높이
은점까지 투명해지기 전에
그가 거울 밖으로
저녁 물안개 속으로
실마리 없는 물뱀처럼 미끄러집니다
미지근한 바닥으로 노랑은 흘러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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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한 밤
선생의 표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도 그때도 없고
지금은 휘발 중이다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윤곽만 남았다
기린의 뿔만 남았을 때와 비슷하였다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가끔은 제스처가 더 많은 말을 전해 주니까
괜찮다
괜찮지 않은 것 같다
손톱이 손톱을 긁는다
의식을 못 할수록 진심이듯
윤곽을 덧씌우고 색을 바꾸면 과장이다
그림책 속에서 쓰러진 기린의 아름다움이
책의 모서리를 계속 긁게 한다
과정이 눈길 밟으며 지나가는 오르골 소리로 들리면
마음은 더 축축한 보풀로 뭉쳐진다
멍한 밤
선생의 표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도 그때도 없고
지금은 휘발 중이다
공중에 비스듬히 매달린 의자에
마음을 얹고
시선은 공중에 걸쳐 놓고
손톱을 손톱이 긁는다
가로수 사이 전광판에서
선생의 써클렌즈만이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미간에 타다 만 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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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 마개는 오랜 시간 찬장을 뒹굴던 건데
입구와 마개가 서로를 품을 때처럼
분리할 때도 같은 소리가 난다
그것은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소리와 흡사해서
민자와 유리병
민자는 말린 순무만큼이나 캐모마일을 좋아해서
햇볕에 한껏 말린 캐모마일을
기쁨에 찬 유리병에 담는다
코르크 마개는 오랜 시간 찬장을 뒹굴던 건데
입구와 마개가 서로를 품을 때처럼
분리할 때도 같은 소리가 난다
그것은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소리와 흡사해서
눈이 부시다
민자는 아침마다 유리병을 매만지며 눈을 비빈다
삶아 둔 수건으로 문지른다
민자가 더 사랑한 건
캐모마일일까
유리병일까
햇살은 아침마다 유리병을 쓰다듬고
코르크 마개는 유리병에 적당하고
전보다 유리병은 크고 늠름해 보이고
민자는 이제 그를 찾지 않는다
아침이면 캐모마일을 아끼며
유리병은 캐모마일을 아끼며
지금도 민자는 캐모마일 차를 마신다
뭉근한 찻잔 가득
꽃잎이 풀어놓는 햇빛 4그램의 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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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접시에 불시착한 뾰족하고 둥근 씨앗들
초라해서 보이지 않는 대단함이 무궁할 것 같아
말라 가는 씨앗
아보카도
확실한 기쁨은 뭘까
그래서 불확실해지는 기쁨들은
불안의 물컹함이 감싸는 기쁨
불안을 걷어 내면 아보카도 씨앗
딱딱한 중심
흰 접시에 불시착한 뾰족하고 둥근 씨앗들
초라해서 보이지 않는 대단함이 무궁할 것 같아
말라 가는 씨앗
말라붙어 뿌리째 뽑히던 흙냄새가
밀려오곤 하지
뒤꿈치 물컹거리는 메리제인슈즈를 신고
버스 정류장 노선을 살피는 사람들에 섞여
바닥까지 슬러시를 급하게 들이키며
확실해진 차가움을 삼키며
아보카도, 구름에 박힌 심장
불안의 깊이가 전해 주는 박동 소리에 집중한다
844번 버스를 기다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작은 트럭에서 떨어진 복숭아가 굴러가
하수구 앞에 멈춰 선다
과육의 물컹함을 뚫을 듯 햇살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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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2014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공중 산책』 『수박사탕 근처』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