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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임지은 시인의 시 ■ 사물들 & 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 & 유기농 엄마 & 혼코노 & 세탁기 연구.

by 시 박스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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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_by. pexels-sarah-chai>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사물들

 

 

리본과 화분이 약속한다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한다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

 

새로 산 우산이 겨울비를 맞는다

계단이 물 자국을 빨아들인다

투명한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쓴다

 

오래오래 잘 사세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머리부터 집어넣는 티셔츠의 세계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

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인다

 

컵과 얼음이 만나서 완성되는 여름

구멍 난 장갑이 눈사람의

차지가 되는 겨울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래

< >

 

 

식물도 깊은 잠이 필요하니까

잠자는 나무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면

 

하늘에 새들이 피어 있었다

횡단보도가 얼룩말인 척 누워 있었던

침대에 심어 놓은 인간이 뿌리로 걸어 다녔다

 

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

 

 

사람들이 둥근 것을 좋아해서

서울에는 원이 많다

 

학원 병원

식물원 동물원 유치원

 

동그란 식탁에 모인 동그란 얼굴

동그란 컵에 담아 마시는

동그란 웃음

 

태어난 자리에서 죽은 나무가

밑동만 남겨진 채 잘려 나가는 걸 볼 때

동그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식물도 특별히 살고 싶은 곳이 있을까?

한여름에 얼음을 껴안고 있는 펭귄은 남극을 기억할까?

 

사람들이 좋아해서

심은 나무와 좋아해서 잡은

생선과 좋아해서 데려온 동물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시간이 원을 좋아해서

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

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고

 

휴일에 찾은 식물원은 문을 닫았다

 

식물도 깊은 잠이 필요하니까

잠자는 나무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면

 

하늘에 새들이 피어 있었다

횡단보도가 얼룩말인 척 누워 있었던

침대에 심어 놓은 인간이 뿌리로 걸어 다녔다

<  >

 

 

여자가 마시고 가라며 유기농 주스의 뚜껑을 따 준다

  편하게 입을 옷을 주고 동화책을 읽어 준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왜 이제 왔냐고 한다

 

  집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유기농 엄마

 

 

 

  옆집 아이가 초인종을 누른다

  제가 좀 심심해서요

 

  아이는 책상 위에 쌓인 잡동사니를 만지며

  뭐에 쓰이는 물건인지 물어본다

 

  신기한 게 많네요

  아이는 이 집에서 제일 신기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른다

 

  다음 날도 옆집 아이가 초인종을 누른다

 

  이제 아이는 잠이 오지 않는다거나

  병뚜껑이 열리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찾아온다

 

  아이를 위해 유기농 주스를 산다

  방을 환하게 꾸미고 편하게 입을 옷을 준비한다

  자고 가는 건 어떻겠냐고 묻는다

 

  찬 바람을 사랑하는 계절이 오고

  아이가 놀러 오지 않아

  옆집 문을 두드린다

 

  이제 막 잠에서 깼는지

  부스스한 얼굴을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여자가 자신은 아이가 없지만

  잠시 들어오겠냐고 한다

 

  여자의 집은 신기할 정도로 잡동사니가 많다

  그중 어떤 것은 갖고 싶지만

  아이 없는 집에

  머무르는 것이 어색해

  그만 가 봐야겠다고 일어선다

 

  여자가 마시고 가라며 유기농 주스의 뚜껑을 따 준다

  편하게 입을 옷을 주고 동화책을 읽어 준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왜 이제 왔냐고 한다

 

  집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방금 나를 찾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  >

 

 

한글과 영어가 섞인 글자의 줄임말이

  일본어처럼 들린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혼코노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혼코노

  혼코노

 

  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 가

  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그럼 여기 나 있어요, 는

  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혼코노

  혼코노

 

  자주 오면 단골이라고 하던데

  여긴 무인 상점이군요

 

  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요

  전 오늘 처음인 걸요

 

  사실 일본어는 잘 몰라도 됩니다

  혼코노는 혼자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요

 

  한글과 영어가 섞인 글자의 줄임말이

  일본어처럼 들린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렴 어때요

  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랫말처럼

  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혼코노 혼코노

 

  동전만 될 것 같은데 의외로

  카드도 됩니다

  <  >

 

 

빨랫감끼리 싸우고 있다

  때가 빠지는 중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계가 정리되면

  아무것도 닦지 않은 한 장의 수건을 가질 수 있다

 

 

세탁기 연구

 

 

 

  네모 안에 둥근 속을 감추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엔 잠들어 있다

  세탁기를 깨우고 옷을 넣는다

 

  세제 투입구를 열고 알칼리와 산성을 고민하다

  중성 세제를 넣는다

  옳고 그름 사이에서 인생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작동

하고

 

  세탁물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라니 얼마나 솔직한가!

  좀 전엔 속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

으면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빨랫감끼리 싸우고 있다

  때가 빠지는 중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계가 정리되면

  아무것도 닦지 않은 한 장의 수건을 가질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선 가족이 목욕한 물에 몸을 담근다던데

그건 그 사람의 때를 용서해야 가능한 일이다

 

  매번 늦을 때

  섭섭할 때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새삼 용서의 어려움을 깨닫는다

 

  다 된 빨래를 꺼낸다

 

  서로 엉켜 있어 떼어 내기 어려운 이것을 포옹이라 불

러도 될까?

  한층 복잡해진 마음을 털어 건조대에 넌다

 

  양말 한 짝이 모자란다

  지난번에도 한 짝이 사라졌으니

  세탁기는 철저하게 균형을 추구하는 셈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