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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김이듬 시인의 시 ■ 입국장 & 법원에서 & 간절기 & 리얼리티 & 저지대.

by 시 박스 2024.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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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2024년 제1회 신격호 샤롯데문학상 시 부문(푸쉬킨문학) 대상 수상,

김이듬,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 2023)

입국장_by. pexels-connor-danylenko

 

 

그녀에게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까

  자동차가 아닌, 사람의 도시라고

  최소한 총성이 울려퍼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일까

입국장

 

 

 

  미국 국적 친구를 기다린다

  심야 공항 터미널은 지나치게 환하다

 

  그녀에게 이 도시를 어떻게 소개할까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파무크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

 

  맞은편 의자에 앉아 통화하는 사람은 미소를 띤다

  왼쪽 옆으로는 불매운동중인 제과업체의 체인점이 있다

  빵공장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플라스틱 빵처럼 내 표정은 굳어 있다

 

  밝은 조명 아래 내 우울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습관처럼 깊이 눈을 감는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습격한다

  밀려내려가다 꼼짝없이 매몰되었던 사람들

  필시 친구는 알고 있을 텐데

  이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경악했을 텐데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는

  그 도시가 더이상 자동차의 도시가 아니라고 했다

  파산 직전의 공장들과 슬럼가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그녀에게 나는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할까

  자동차가 아닌, 사람의 도시라고

  최소한 총성이 울려퍼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일까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운 내 방에 그녀의 잠자리를 만들

었고

  베지테리언 식당도 알아봤지만

 

  말할 수 없겠지

  내가 사랑하는 도시라고

 

  트렁크 끌고 공항철도를 타며

  말해야 할까

  화장실에서는 불법 촬영을 조심하라고

 

  알려줄 것들이 조각케이크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하

다면

  이즈음 나는 어두운 방에 나를 가둔 채 발작하지 않았겠지

  신경안정제 부작용인지 부은 얼굴로 너를 마중하러 나오

지는 않았겠지

 

  네가 예민한 건 아니야

  친구가 와서 나를 안아주면

  환영한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지

  < >

 

 

 

떼야 할 서류가 있는데

  무인 발급기가 나를 식별하지 못한다

  내 살갗 무늬가 나의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법원에서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떼야 할 서류가 있는데

  무인 발급기가 나를 식별하지 못한다

  내 살갗 무늬가 나의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나를 확인한다

  나는 나를 떠나버린 것 같다

 

  "잠시만 안고 있어"

  제 아이를 내 품에 안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여자처럼

 

  비가 오니까

  피부가 촉촉하게 팽창해서

  내 지문이 변했을지 모른다

  빗길에 중앙선을 넘는 트럭처럼 나는 나로부터 잠시 미끄

러졌는지 모르겠다

 

  이탈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민원실에서

 

  의자를 당겼는데 테이블도 움직인다

  분리불안을 느끼는 관계처럼 

  신체와 영혼처럼

  의자와 테이블이 일체형이다

  버릴 때는 폐기물 처리비 납부필증을 한 장만 붙이면 되

겠지

 

  지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나의 여부를 알 수 없다

 

  봄비가 오니까

  사람들은 미래처럼 외로워서 자아라는 존재를 발명한다

  어린 나를 더 어린 내게 던져두고

  사라진 엄마를 미워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 >

 

 

 

오늘은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에 관해 생각한다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까지

간절기

 

 

 

  유리창을 닦는다

  안에서 닦고 밖으로 나가서도 닦는다

 

  유리창을 유리창이 없는 것처럼 닦아놓으면

  새가 부딪혀 죽는다

  사람의 얼굴이 깨지기도 한다

 

  이목구비 안쪽을 닦는

  수양이 중요하지

  교양 높은 이들이 나에게 팁을 주었다

  코뼈 부러지고 뺨이 찢어져봐도 이런 말 할까

 

  커다란 창이 있는 호텔 라운지형 카페에서

  나는 주말에만 아르바이트한다

  바깥 사람들은 상스럽게 부채질하며 말다툼하고

  안은 쾌적하지만 약간 춥다며 붙어앉는 이들도 있다

  내부 적정 온도에 어울리는 이들이 주요 고객이다

  조금 싼 데가 생기면 옮길 거면서

 

  오늘은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에 관해 생각한다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까지

 

  여름과 여름 사이의 시간이 부서진다

  잔상과 전조가 먼지처럼 혼합된다

  <  >

 

 

정말 진짜 같아

 

  누가 사람인가

리얼리티

 

 

 

  해변으로 떠내려온 나체가 있다

  익사체를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진짜 같아

 

  누가 사람인가

 

  단골 술집에서 나온 사람이 눈밭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

  이 세상에 믿을 게 없어요

  이것은 노래인가 아우성인가

 

  지하철 알루미늄의자에 앉아 그는 외국에서 올 여자를 상

상한다

  무료배송으로 도착할 진짜 여자의 촉감을 기대한다

  인터넷 쇼핑몰 뒤져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고르고 있다

  말을 하는 여자는 피곤해

 

  지난번 여자는 해변에 데려가서

  여섯 개의 조각으로 손쉽게 버렸다

  분리수거 봉짓값을 벌었다

 <  >

 

 

 

가난한 시민이 더 변두리로 이동하듯

  천재지변도 생활 여건이 열악한 지역에 집중되는 건
아니겠지

 

저지대

 

 

 

  나는 남은 얼음을 털어넣는다

  공터 구석에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투기할까 망설인다

  이미 쓰레기가 쌓여 있으니까

 

  "기후 재난은 가난한 나라에서 더 자주 발생하는 것 같아"

  걸으며 뉴스를 보던 네가 한숨을 쉰다

  나는 휴대폰으로 튀르키예 위치를 찾아본다

  형제 국가라는데 나는 몰랐다

  지진이 난 나라가 가난하면 복구 과정도 더디다

 

  가난한 시민이 더 변두리로 이동하듯

  천재지변도 생활 여건이 열악한 지역에 집중되는 건 아

니겠지

  매일매일이 잠시의 소강상태처럼 느껴지는 건 아니겠지

 

  다시 우리는 배드민턴을 친다

  작은 공터의 해거름 시각

  너는 자꾸 빈 곳으로 셔틀콕을 보낸다

 

  빈 곳엔 결여가 모기처럼 붐비고

  너의 이 사이와 이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온다

 

  잇몸을 보이며 너는 할머니처럼 웃는다

  "너 망했다 저번보다

  이가 더 듬성듬성하다니까"

  "썩은 어금니 두 개 뺐더니

  그 빈자리 메우려고 다른 이들이 이동하나봐"

 

  세상이 우리에게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기분이다

  내 마음에 처치하지 못할 오물들 쌓여 있어서

 

  '치과 보철 비용은 비싸고 과정도 더디겠지'

  하나 마나 한 말은 삼키고 어두워지는 하늘을 본다

  먹구름이 수재민 천막 위로 이동하고 있다

 

  "배고픈데 뭐든 먹으러 가자"

  배가 비어서 사거리가 슬픈 걸까

  어떤 공복감은 불안으로 분노로 이동한다

 

  네가 사는 동네는 상습 침수 지역이지만

  우리 마음이 이따금 물바다인 건 사실이지만

 

  도피하는 건 아니다

  손잡고 건널목을 달려 가로지른다

 

  덤프트럭들이 여름을 싣고 매립지를 향해 간다

  <  >

  

 

김이듬 시인: 2001년 《포에지》로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샤롯데문학상 등 수상.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이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에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