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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박세미 시인의 시■ 생산 라인 & 순환 세계 & 뒤로 걷는 사람 & Balkon & 나는 터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by 시 박스 202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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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로 2024년 제42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으로 선정되심을 축하합니다.!!!

발코니_by. pexels-sevenstormphotography

 

 

 목과 손목을 여미는 품위로부터 나는

  달아날 수가 없고

  축 늘어진 와이셔츠의 소맷자락을 잡고 질질 끌며 걸/었던

  밤거리마다 단추가 놓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생산 라인

 

 

 

  화이트 셔츠 공장

  이곳이 내가 선택한 품위다

  마흔 가지가 넘는 와이셔츠 제작 공정에서 칼라와 커

프스를 다는 것이 지난 20년간 지켜온 나의 업무

 

  숙련된 자들에게선 고르고 안정적인 소리가 난다

  원단을 가르는 가위로서

  박음질하는 미싱으로서

  뜨거운 김을 내뿜는 다리미로서

  20년이다

  그러니 검붉은 피가 번지는 일

  노릇하게 구운 냄새가 나는 일

  옆자리의 동료가 사라지는 일

  결코 실수가 아니다

  하얀 옷감이 하얀 옷감을 오염시키는 걸 매일 목격하는

  이곳에서

 

  목과 손목을 여미는 품위로부터 나는

  달아날 수가 없고

  축 늘어진 와이셔츠의 소맷자락을 잡고 질질 끌며 걸

었던

  밤거리마다 단추가 놓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단추를 달고 실밥을 처리하고 다리미질을 마친 와이셔

츠는 출고 작업에 들어간다

  나의 동료는 어깨를 제일 먼저 다렸다 항상

  퇴근 시간을 알리는 라디오 디제이

  그리고 동료의 얼굴을 나는

  모른다

  <  >

 

 

 

입구로 들어가 입구로 나온다는 것

  멀리 갈수록 가까워진다는 것

  절벽과 절벽의 사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순환세계

 

 

 

  두 손은 잠들면서 두 눈동자를 협곡에 내던진다

  눈동자는 신체에서 가장 멀어지기를 원한다

 

  강물은 눈동자를 운반한다

  입구를 만들기 위해 동굴을 침식한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오늘을 씻어내고

  동굴로 굴러 들어가

  본다

 

  1985년식 철산주공아파트 8단지를, 보도블록 언덕을,

벚나무의 검은 가지를, 자전거 보관대 꼭대기에서 점프

하는 아이를,

  쿵, 하고 동굴이 무너질 때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본

다 눈동자는 2020년 늙은 엄마의 뒷모습을 비추어 아이

에게 보여준다 울음을 그치고

  아이는 미래에 잃어버릴 눈동자를 본다

  멀어지는 기차가, 자꾸만 쏟아지는 이삿짐이, 땡볕에

말라가는 화분이, 여전히 울고 있는 어른이

  보인다

 

  입구로 들어가 입구로 나온다는 것

  멀리 갈수록 가까워진다는 것

  절벽과 절벽의 사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동굴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의 하류에는

  그동안 씻겨 간 오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눈동자는 감길 줄 몰라서

  협곡 위 가장 구체적인 두 손을 본다

  <  >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바로 옆에서 사라져버렸다

 

 

뒤로 걷는 사람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앞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바로 옆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

  <  >

 

 

 

어느 날 리자가 말한다

  사실 발코니의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 그렇

지요?

 

Balkon*

 

 

 

  나의 딸 리자는 발코니를 건물의 정면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라고 한다**

  오늘도 리자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 중이다

  등 뒤에서 다른 가족들이 식사를 하든 말든, 집 안 청

소를 하든 말든, 노랫소리가 들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앞에 펼쳐진 바다만을

경험한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방금 돛을 펼친 사람처럼

 

  어느 날 리자가 말한다

  사실 발코니의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빠 그렇

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지, 무언가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어보는 건 어때? (바다 한가운데서

바다를 계속 찍으면 무엇이 보일까? 그건 나도 모른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발코니 아래

  끊어진 닻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 Orhan Pamuk, Balkon, Steidl, 2019. 그는 2012년 12월부터 2013년

   4월까지 5개월 동안 자신이 사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8천5백여 장의

  사진을 찍었고, 그중 5백여 장을 묶어 책으로 냈다. 그의 아파트 앞으로

  항해하는 배가 지나가곤 했다.

** 지오 폰티, 『건축예찬』, 김원 옮김, 열화당, 1979.

<  >

 

 

 

  눈을 뜨면 터치

  까만 액정을 떠돌던 전자가 나의 검지로

  모이는 순간

  열린다 팔로잉하는 1,338명의 어제

 

 

나는 터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눈을 뜨면 터치

  까만 액정을 떠돌던 전자가 나의 검지로

  모이는 순간

  열린다 팔로잉 하는 1,338명의 어제

 

  어젯밤에는 슈퍼문이 떴다 단 하나의

  나는

  착각한다 슈퍼문을 나도 보았거나 나만 보지 못한 것

으로

  터치할 때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수백 개의 슈퍼문

  손가락을 건너 수정체를 건너 뉴런을 건너 내 몸에 들

어온다 신체에 구속된다

 

  정수리와 두 팔꿈치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서 있는

  사람=전자적 이미지

  그것을 이루고자 요가 수련원에 간다

  가서 잘 굽혀지지 않는 등을 굽히려고 애쓴다

  지도자는 나의 등에 손을 얹는다

  터치

  느린 터치 오랜 터치 따뜻한 터치

  모인다 몸속을 떠돌던 달들이

  등을 뜨겁게 밀어낸다

  숨을 크게 내쉬면 적혈의 달들이 쏟아질 것 같다

 

  저녁을 차려놓고 나는 터치한다

  내 앞에는 두 개의 식사가 떠 있고

  계속 나는 터치한다

  고로 존재한다

  무엇을 먹는지 모르는 채로

 

 

*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야후! 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사, 2001 변용.

 

 

 

박세미 시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가 나일 확률』, 『오늘 사회 발코니』 등.
김만중문학상 신인상 수상.
박세미 시인은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 로  2024년 제42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자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