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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영광 시인의 시 ■ 평화식당 & 희망 없이 & 나의 인간 나의 인형 & 밀접 접촉자 & 큰 병원.

by 시 박스 202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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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2024년 제11회 형평문학상 수상.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창비, 2024)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할 것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

 

평화식당

 

 

    오래전에는 식당에 혼자 가면 미안해하는 사람이었습니

다 젊어서는, 식당에 혼자 가면 받는 홀대에 분개하는 인간

으로 바뀌었고요 얼마나 옳았는지 몰라요 쉰이 넘자 다시,

식당에 혼자 오면 미안해하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벌레처

럼요 얼마나 옳은지, 몰라요 얼마나 미안한지......

 

    기뻐하지 않기 위해 기뻐할 것

    자랑하지 않기 위해 자랑할 것

    옳지 않기 위해 옳을 것

    옳음의 불구처럼 옳을 것

 

    구가하지 않을 것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가난할 것

    분개하지 않기 위해 분개할 것

    미안하지 않기 위해 미안할 것

    미안의 불구처럼 미안할 것

 

    구가를 구가하지 않을 것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할 것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

    죽지 않기 위해 죽을 것

    죽음의 불구처럼 죽을 것

   <  >

 

 

사랑하지 않을 용기가 없었어요

  고생하지 않을 게으름이 없었어요

  희망 없이 살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있다 희망 없이 살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없다

 

희망 없이

 

 

 

  사람을 얻고 잃으며 바쁘게 살았어요

  마음을 울고 웃으며 곤하게 걸었어요

  어두운 생각이 들면 말을 하지 마라

  혼자 말해라, 

  혼자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고향은 로또같아요 아무걸로나 다시 낳아주세요

  기운 골목과 삼백년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바람들과 귀신들의

  변함없이 힘없는 가호 속에서

  마르고 무서운 당신을 두고,

  또 한번 세상에 나가는 날이잖아요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뜻대로가 없었어

  조금만 더 시든 걸로 만들어주세요

  농담입니다, 피가 나지만, 제가 사랑한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안 되는

  사랑이었어요 되는

  사랑만 남았습니다

  농담입니다

  피가 나지만,

 

  사랑하지 않을 용기가 없었어요

  고생하지 않을 게으름이 없었어요

  희망 없이 살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있다 희망 없이 살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없다

 

  그것은, 기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날아오르는

  주검과 같을까

  그것은 달리다가 걷다가 멎었다가,

  길 위에 길게 눕는 목숨과도 같을까

 

  희망 없이 사는 일의 두근거림이여

  <  >

 

 

그렇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

  사랑했을 뿐이지 않나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인 줄 모르는 나의 인간 나의

  인형이여,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지 않고

  무엇과 싸운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

  사랑하지 않고, 대체

 

나의 인간 나의 인형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피를 흘린 적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피 흘리는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감내하고 희생한 적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감내하고 희생하는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자랑하고 떵떵거린 적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자랑하고 떵떵거리는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명상하고 깨달았던

  시간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명상하고

  깨달은 줄 아는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쾌락의 늪과 회한의 골방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쾌락에 떨고 회환에 젖은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죄지었던 날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죄 많은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의문 없이 누굴 껴안았던 적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의문 없이 그 누구를 껴안은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이겨서 행복해하고 져서 행복해하던 때가

  왜 없었겠나 하지만 이기고도 행복하고

  지고도 행복한 진흙 인간이나 유리

  인형처럼 살아왔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고 아무것도 아닌 것과

  사랑했을 뿐이지 않나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인 줄 모르는 나의 인간 나의

  인형이여, 아무것도 아닌 것과 싸우지 않고

  무엇과 싸운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과

  사랑하지 않고, 대체 무엇과 사랑한단 말인가

  <  >

 

 

 당신을 바로 이 순간 밀접 접촉한 자로서

  흐느끼는 자로서 저도

  찰나에,

  그 양성반응을

  확진 판정을

 

밀접 접촉자

 

 

 

  영안실에 확진가가 발생해 격리된 상주 얘기를 어렴풋,

  들었나?

  상주는 문틈으로 친척이 넣어주는 밥과 자가진단 키트를

받았다고

  취한 채로, 조문이 안 됩니다, 사방에 문자를 보내면서

  도시락을 뜯어 먹고

  키트로 이틀간 한번, 또 한번

  감염 검사를 했던 것

  같았는데, 심야 빈소에 사람이 없다, 시신은?

  시신이 없다, 사람은?

  희뿌연 복도를 가만히 걸어가 출입문 너머 불 꺼진 안치

실을

  밀접 접촉하듯 쳐다보았다는 것 같았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술병이 가득 찬 업소용 냉장고 아래

  쓰러져 있었다 발인 날 아침이었고 입관은 끝났으며,

  화장장엔 따라 들어갈 수 없다고, 누가 말했다

  생시임이 분명한 저승 지척에서 그는 불구경하듯

  하지만 밀접 접촉하듯 화장장 연기를 눈에 담다가

  따로 차를 타고,

  따로 언 산비탈엘 가 먼발치서

  따로 절하고,

  따로 고향집으로 굴러 내려와 늙은 약쟁이처럼

  다시 코를 찌르고 있었던 같았는데

 

  --이제 그만 일어나 아침 먹어야지

  --어머니, 냉수 좀 주세요

 

  또, 꿈에서 깨어났다 소주병이 굴러다니던

  삼십년 전의 건넌방이었다

 

  당신을 바로 이 순간 밀접 접촉한 자로서

  흐느끼는 자로서 저도

  찰나에,

  그 양성반응을

  확진 판정을

 

  받고 싶어요

  받고 싶지 않아요

  받고 싶어요

 

  도대체, 

  어디에

  안 계신 거예요

  <  >

 

 

큰 병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신이,

  안 가려고 하다가 나중엔 그렇게나 가고 싶어하던

  저세상인가 저세상이라면 이,

  폐가와 같은 사체의

  고통 없음과

  고통의 감각 없음과

  고통의 뿌리인 생명 없음과

  생명의 꽃인 넋두리의 사라짐을

 

큰 병원

 

 

 

  어느 시골 병원에 실려 간 병든 노인을 두고

  여기선 손 못 써요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의사가 말하면 다들

  눈앞이 캄캄하겠지 큰 병원이란 대체

  어디에 있는 병원이란 말이란

  말인가, 싶겠지

 

  운명하셨습니다, 하고 큰 병원 의사가 그때

  숨 거둔 환자의 혈족들,

  우리에게 짤막하게 고했을 때

  이렇게 헛들었다

  여기선 안 돼요 큰 병원에 가보세요

  더 고칠 데가 없는 시신 앞에서 더는 말이 없는,

  작디작은 지상의 

  큰 병원이 소개하는

 

  큰 병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신이,

  안 가려고 하다가 나중엔 그렇게나 가고 싶어하던

  저세상인가 저세상이라면 이,

  폐가와 같은 사체의

  고통 없음과

  고통의 감각 없음과

  고통의 뿌리인 생명 없음과

  생명의 꽃인 넋두리의 사라짐을

 

  저승이여 큰 병원이여,

  손써볼 수 있으려나

  없음으로써 있는 이 투명인간을

  이, 보이는 사람

  없음으로 이룩된 투명인간의

  불순한 없음을,

  있음이라는 투명을

  치료할 수 있으려나

  <  >

 

 

이영광 시인: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살 것만 같던 마음』이 있다. 산문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지훈문학상, 미당문학상, 형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