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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자켓 시인의 시 ■ 프랑스에서 영화 보기 & 복어 가요 & 말고라는 고양이 & 거침없이 내성적인 & 유니버스 진화珍話

by 시 박스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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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관 by. pexels-tima-miroshnichenko

내 어깨는 좁고

  녹색 모직 코트는 까끌까끌

  네가 내게 기대면 나는 네게 기대고

  우리 사이는 극명해지고

  그 쓸쓸한 거리를 걸을 테니까

 

프랑스에서 영화 보기

 

 

 

  조그만 영화관에서는

  조그만 자리에 구겨 앉아

  조그만 화면으로 영화를 보죠

  자막 없는 이국의 영화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화가 났군요

  울컥했군요

  고요하네요

  신이 났군요

  영영 잊었군요

 

  너는 졸고 있습니다

  고개를 앞뒤로 꾸벅이다

  때론 옆 사람에게 머리를 기대기도 합니다

  어째서 내 쪽이 아니라

  이국의 관객 쪽으로 머리가 쏠릴까요

  그쪽이 편할까요

  그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내 어깨는 좁고

  녹색 모직 코트는 까끌까끌

  네가 내게 기대면 나는 네게 기대고

  우리 사이는 극명해지고

  그 쓸쓸한 거리를 걸을 테니까

 

  저 배우는 언제부터 수면 위에 떠 있었을까요

  평화로워 보여요 속을 알 수 없이

  불투명하네요 상영이 끝날 때까지

  수면은 맑을 예정이고

  너는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죠

  끝끝내 내게 기대지 않는군요

  정말? 묻습니다

  뭐가? 되물어도

  잠꼬대는 끝났어요

 

  수면 밖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집니다

  잠에 취한 네가 먹먹한 박수를 보태고

  관객들은 좌석에서 빠져나갑니다

  붉은 계단이 잠시 낮아집니다

  그 폭만치 내 어깨는 좁아요

  이런 어깨에 기댈 사람 있나요?

 

  너의 손이 왼쪽 어깨를 두드리고

  이제 가자, 말해요

  잠긴 목소리가 나를 데려가요

  그곳에 서서 앉고 누워요

  눈보라가 부는 파란 지붕 밑으로

  수신호 없는 극지방의 벽난로 앞으로

  천장에서 떨어진 이구아나가 드러누운 숙소 침대로

  엉거주춤하게 모닥불이 피어오르죠

  손을 내밀어 덥히면 좋겠지만

  이젠 가야 해,

  영화는 잊고

  이제 가야 해요

  <  >

 

 

불을 붙이고, 신발 뒤축으로

  얼어버린 물웅덩이를 부수었다

  얼음 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 맥없이 나뒹굴었다

 

복어 가요

 

 

 

  합정까지 걸을까?

  추운데

  목도리 빌려줄게

  너는?

  난 추위 잘 안 타

  추워서 머리가 멈췄나 봐

  겨울이라 그런가

  차디찬 골짜기인 거야

  그곳에 도달한 생각들은

  모두 얼어붙은 거지

  그 골짜기 다 녹여주고 싶다

  그럼 범람할 거야

  아무 말이나 쏟아져 나올 거야

  그건 안 돼

  왜?

 

  저거 들려?

  뭐?

  구세군 종소리

  연말이긴 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요즘 살쪘나 봐 패딩 탓인가

  나 부해 보여?

 

  조금 떨어진 채

  빗물 언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한적한 합정에는

  이 거리 끝에도 저 거리 끝에도

  담배 태울 곳이 없어서

  '그런지' 라는 카페를 지나고

  솔방울식당 지나고

  푸르게 칠한 건물과

  목련이 자라는 주택 지나

  어둑한 골목에 들어섰다

  불을 붙이고, 신발 뒤축으로

  얼어버린 물웅덩이를 부수었다

  얼음 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 맥없이 나뒹굴었다

  종소리가 한 번, 두 번

  이편저편 맴돌았다

  

  10번 출구가 보였다

  목도리를 돌려받았다

  조심히 가

  너도 ······

  넌 뒤돌아보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매끄럽게 사라졌다

  점점 작아지는 뒤통수를 보다

  돌아섰다

  코트 주머니에는 킹 크룰의 앨범이 들어 있었고

  움켜쥔 목도리는 방어 태세의 복어만큼 부풀어 올랐다

  <  >

 

 

있잖아, 말고, 말고

  듣고 있어?

  무얼 자꾸 파내는 거야, 거기가 궁금해?

 

말고라는 고양이

 

 

 

  있잖아, 옆 도시엔 도와 시가 없대

  2지구부터 4지구까지만 있대

  모두 트럭을 타고 다닌대

  적재함에는 각 얼음이 깔려 있고

  얼음 속에서 빈 병이 흔들린대

  막 부딪친대

 

  옆 도시의 교차로에선

  세단을 탄대 드라이브를 한대

  단독주택이 많고 집마다 사랑이 있대

  응 ······ 거짓말

 

  2지구부터 4지구 거리에 널브러진 식물은

  혀가 길대

  일단 내밀고 본대

  트럭에서 흐르는 물을 핥는대

  물을 핥은 혀에 키스한대

  그리고 민달팽이가 된다나 봐

  진짜로 ······

  화내지 말고 들어

  나, 이사 가

  미리 말해주잖아

  그게 뭐냐고?

  중고 거래

  응

  응

  응

  말 돌리지 않았어

 

  있지, 이사하려면 선발대가 필요하대

  출발하고 돌아올 때 수가 다르대

  귀환자가 많고 적은지······ 모르는 일이야

 

  기름 냄새가 잔뜩 나는 고목과 마당이 있다네

  수습공을 할 수 있대

  버섯을 키우는 일인가 봐

  혼자 자라니까 곁에 두고 보는 거래

  어······ 갈증

  참아야지 갈증

  나체여도 모자는 쓰고 싶어

  있잖아, 말고, 말고

  듣고 있어?

  무얼 자꾸 파내는 거야, 거기가 궁금해?

  <  >

 

 

  괜찮다, 그것으로 당신이

  오키나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거침없이 내성적인

 

 

 

  오키나와 아저씨 슈

  오키나와 출생 아니다

  섬에서 자라지 않았다

  오키나와 출신의 친척과 친구

  모두 없다

 

  괜찮다, 그것으로 당신이

  오키나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그를 만난 곳은

  명동에 있는 호텔 로비였다

  슈는 야자수가 한가득 담긴

  액자 밑에 앉아 있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악수 청하자

  슈, 쑥스럽게

  손에 쥔

  명함을 내보였다

  독특한 질감의

  명함 가벼웠다

 

  명동 한복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15분 정도 걸었다

  무더위 탓인지 슈가 입은

  노란 반소매 셔츠

  등 자락이 젖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물으면

  그저 (끄덕) 할 뿐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시키고

  더위가 식자

  그는 면 소재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었다

  잠시 눈을 감은 듯

  하다 잠들었다

  여객선이 도착하는 저녁까지

  여유가 있었다

  명함을 살펴보았다

  뒷면 구석에

  섬 하나가 있었다

  녹색으로 뒤덮인 육지와

  파도 조각들

  그 모양새가 재밌어

  유리컵 표면에 맺힌

  물기로 적셔보았다

  명함은 젖지 않고

  물방울이 옮겨 붙어

  매달렸다

  

  잠에서 깬 슈는

  두툼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고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자주 졸아서요

  밤에는 도통 못 자다

  잠깐 시간 나면

  거침없이 찾아와요

  견딜 수 없이 잠이 몰려와

  허름한 울타리를

  뛰어넘는 동안

  넋이 나가는 거죠

  꿈에서 사람이 무척 붐비는

  섬마을에 가요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서

  땀이 무척 나죠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땀방울 끝에

  바다가 보이죠

  동네 아이들 말로는

  공원 벤치에서도

  시소에 앉아서도

  제가 잔대요

  별명을 붙여서

  노래 부르는 애들을 두고

  그냥 끄덕여요

  그게 재밌는지

  자꾸자꾸 그래요

  슈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 자세오 두 번

  (끄덕) (끄덕) 한다

 

  공항 휴게 의자 주변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충전 선을

  조심스레 넘는 슈를

  떠올려본다

  한 걸음과 다음 걸음

  연착된 여객선을 기다려도

  괜찮다, 그것으로 당신이

  오키나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  >

 

 

크루즈가 침몰하는 와중에

  나무판자를 붙잡고

  말 안 끝났어, 매달리게 한다

 

유니버스 진화珍話

 

 

 

  만석 아닌 버스에 서서

  춤추는 일 있겠냐만

  흥 나는 뽕 앞에 눈물 흐르는 참이다 

  안개낀 도로에서 시점은 멀어져야 하고

  크루즈가 침몰하는 와중에

  나무판자를 붙잡고

  말 안 끝났어, 매달리게 한다

  빨랫감은 통에 넣어두라 했지

  벗어둔 채로 여기 두면 누가 치워

  얼굴에 흉이 난 보안관 하나가

  모텔 벽에 튄 피를 청소한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론 햇살이

  그의 금색 배지를 밝힌 뒤

  투숙객이 떠난 방을 정리하러 온

  청소부가 카펫에 남은 머리칼을

  눈동자 가까이 집어 든다

  개방된 창으로 좀비가 몰려온다

  아우성 속에 어린 좀비는 침착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근엄한 표정의 진화가

  나를 벽에 밀친 뒤 선언한다

  대답. 진화의 팔에 갇혀 끄덕인다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서류 가방을 쥔 채 폐공장을 떠나는

  인류, 최후의 변론

  구명보트를 발로 밀친 뒤

  엄지를 치켜세우고 기관총을 갈긴다

  이상 무! 병명을 진단한 의사

  이것 좀 보게, 속삭이며

  고개 젓는 동안 오후에 가기로 한

  주말 풋살의 가망이 사라진다

  < >

 

 

이자켓 시인: 2019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거침없이 내성적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