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시인들

■ 박은정 시인의 시 2 ■ 작은 경이 & 아사코의 거짓말 & 링링 & 어떤 장례식 & 빙식증

by 시 박스 2024. 10. 10.
728x90

운동화 by. pexels_Ana Vieira

<  >

 

 

작은 경이

 

 

 

  너와 내가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빼고는 다 알았다

  내가 훔친 운동화를

  네가 신고 다닌다는 소문

 

  훔친 운동화는 모르는 길도

  처음 보는 가게도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더위에 숨을 헐떡이는 개

  시소 위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끔은 모든 것이 전람회에 걸린 그림 같다

  지루한 자신을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듯

 

  태풍의 전야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진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점성과 농도로만 이루어져 있을 때

  세계에 가닿을 손끝을 예감했던 것처럼

 

  손목과 발목이 서로 엉킨 채로

  두려움이, 또 두려움 없는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한 몸처럼 먹고 마시며

 

  어떤 사랑은 사랑이 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마음을 죽이기도 하니까

 

  빗줄기가 들이치기 전에

  창문을 닫고 가만히 누워 봐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해서 그려 봐

 

  따듯한 두 뺨

  물집 잡힌 뒤꿈치

  겨드랑이 아래 돋아나는 통증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목숨 같아

 

  가로수들이 휘청이고

  사람들의 우산이 뒤집어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창틀에 고이고

  매미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투명하게 창문을 관통하는 울음

  이것은 우리만 아는 울음이었다

  섣불리 훔친 불행이었다

 

  너의 운동화는 새것처럼 하얗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꿈꾸듯

  우리는 그것을 구겨 신고

  버스를 타고 서쪽  끝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선한 눈을 하고

  서로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이 가지고 놀다 버린

  작은 경이를 훔친다

 

 

  * 커트 보니컷의 『제5도살장』에서 인용.

 

 

아사코의 거짓말

 

 

 

    아사코의 애인은 따듯한 손과 긴 속눈썹을 가졌다. 아사

코는 그가 잠들 때마다 조심스레 그의 속눈썹을 만지는 것

을 좋아한다. 자신의 손끝에서 떨리는 속눈썹의 나약함을

동경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

른다. 애인은 수시로 선잠에 들곤 하는데, 그의 입에서 희미

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분 좋은 꿈을 꾸나 보다. 아사코

는 그 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자신

을 지운 의식 속에서 그렁그렁한 물기가 거울처럼 그를 비

추인다. 그는 지금 파리의 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

실 수 있다. 죽도록 미운 이에게 권총을 겨누며 뇌세포와 기

분에 따른 상관관계를 떠올릴 수도 있다. 아사코는 자신의

창의적인 거짓말을 좋아한다. 거짓말의 타당성에 대해 세상

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누구나 들으면 설득될 수

밖에 없는 뾰족한 입술로. 며칠 뒤에는 벼랑 위 식물원에 도

착한다. 아사코는 이름 모를 가득한 꽃들이 꼭 자신의 거짓

말처럼 아름답다 생각한다. 꽃들은 나약하고 중세의 끔찍

한 고문 기계처럼 아찔하다. 애인이 좋아하는 천변은 멀리

있다. 소리는 부유하는 기억 속에서만 들린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경쾌한 발걸음이나 미운 이의 옷자락을

뚫고 가는 파열음 같은 것들을 아사코는 편집한다. 빛을 배

반하는 그림자를 삽입하고 수치스러운 두개골의 장래를 지

워 버린다. 기적이라는 건 만년설이 쌓인 미래 같은 것. 그

속에 맥락 없이 존재하는 벼랑은 신의 장난질이지. 무언가

빠르게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손끝에서 분명한 통증이 인다. 애인은 갈증이 나는지 침 마

른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소리는 허공을 지우는 담배 연기

처럼 아스라이 멀어진다. 이제 아사코는 물 잔을 건네며 말

한다. 일어나. 반세기가 지났어. 애인의 따듯한 손이 아사코

의 손을 잡는다. 생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빛이 커튼 위를

넘실거린다. 잔상이 할퀴고 남긴 숨소리들. 창틀 위 선인장

에는 몇 년이 지나도록 꽃이 피지 않는다. 조금 전 애인의 숨

소리는 이제 애인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머나먼 오늘의

처럼. 아사코의 투명한 거짓말처럼.

<  >

 

 

링링*

 

 

 

    내가 삼킨 수많은 말들과 낮과는 이율배반적이 밤의 마음

과 사람으로 태어나 짐승의 울음보다 못 미덥던 날들 사이,

신의 선물처럼 여름 바람이 불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고 지나갔다 나는 슬프지 않았고

지낼 만했는데, 나를 통과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건널목을 지나 버스를 갈아타며

    나는 자주 우산을 잃어버렸고 하릴없이 지나는 간판의 이

름을 불렀다

 

    불시에 들리는 빗소리가 집 안으로 들이쳤다

    둘 곳 없는 시선처럼 어색하게 미끄러지는 빗물이

    창틀 모서리마다 흘러넘치고

 

    너는 잘 때마다 왜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자니?

 

    끝이 보이지 않던 날들이 지나고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기억만 남았는데

    나는 괜찮다는 표정만 늘었다

 

    속수무책 내뱉은 말들이 소문이 되고 진실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모자였으며 뒤돌아서면 모두 배신자들이

었지만, 진실은 거짓보다 의심스러웠고

 

    눈앞이 어지러울 때마다 손에 쥐지 못한 것들을 원망했다

줄지어 쓰러지던 야자수들이 뉴스 화면에 비쳤다 링링이라

는 이름의 태풍이 왔다고 했다 두려운 마음이 지어낸 작고

귀여운 이름

 

    다정과 오만으로 서로의 저녁을 밝히던

    하루의 아마추어들

 

    손안에 굴리면 사랑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흔해서 싫어했던 내 이름을 처음 듣는 이름처럼 불러 주는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니?

    태풍이 오려나 봐, 창문을 닫아야겠어

 

    손을 내밀면 작고 귀여운 것이 들어와

    재롱을 부리다 가시덤불을 던져 준다

 

    정적으로 가꾼 정원에

    불시착한 미래의 화염 덩어리처럼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른 채

    신의 선물처럼 흔적 없이 빠져나가는

 

    약속될 수 없는 마음을 실험한 사람의

    볕 들지 않는 안색이 있어

 

    나만 아는 예쁜 꽃을 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이가 흔들렸다

 

    * 링링: 2019년 필리핀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  >

 

 

어떤 장례식

 

 

 

  어리석은 엄마가 내게 선물한 것은

  여자의 삶이 얼마나 하찮아질 수 있는지

  붉은 혀의 거짓말이 얼마나 진실될 수 있는지

  돌 사진도 없는 나는 동네 남자애의 이마를 찢어 놓

았다

 

  죄 없는 돌멩이

  내 죄는 죄 없는 돌멩이에 피를 묻힌 것

 

  아빠의 영정 사진을 앞에 두고

  우리는 절을 했다. 왼손과 오른손 중에 어느 손을

  먼저 맞잡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향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여름밤의 모기들은 집요했다

  입술을 깨물며 십자가를 긋다 조문객들이

  고개 숙여 국밥 먹는 모습을 보았다

  식은 음식들을 정리하는 손이 있다

  성실한 밤이 뒤돌아 나갔다

 

  엄마는 울지 않았고 상복을 입지 않았다

  반짝이는 형광등이 눈부신지 국화꽃 위로

  향 가루처럼 하루살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곳에는 발목이 부러진 멧돼지가 찾아올 수 있다

  길 잃은 고양이가 사람의 기분으로 두리번거릴 수

있다

 

  이천이십일년 칠월 삼십일

  있지도 않은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고

  딸아이는 나와 함께 어색하게 웃는다

  엄마는 이 모든 일들이 다행스러운가

 

  천천히 음식 드시다 가세요

  먼 길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례식장 이 층 난간에서

  몰래 담배를 피운다

  상복에 담배 냄새가 밸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발견하고 돌아설 것이다

  이 모든 지난한 일들이

  죽음보다 앞서 삶을 이끌고 간다

 

  그날 내가 신에게 던진 돌멩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통곡 소리가 들리고

  옆 호실에서는 찬송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죽음이 삶을 데려온다

 

  어떤 울음은 신에게 던진 돌멩이보다

  더욱 처절하게 던져진다

 

  서둘러 장례식장을 나서는 사람들

  바람을 헝클던 나뭇잎들이 벤치 위

  찢어진 이마처럼 붉게 쏟아졌다

 

  손안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있었다

  < >

 

 

빙식증*

 

 

 

  이것이 악취미라면

  머릿속 노란 구름부터 지워 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떤 기분으로 살아 내고 있는지

  말할 수 없는 증상입니다

 

  세계는 무례한 자들의 슬픔과 분노의

  덧없는 기록지가 되어

 

  나는 적의를 표하는 것들에

  살아 있음으로 대항하려는

  허들링의 몸짓입니다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고

  창밖에는 헬리콥터가 나는 정오

 

  거대한 빙하가 입속에서

  물러설 수 없는 쇄빙선과 충돌합니다

  거꾸로 머리칼을 물고 웃고 있는 사람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소용돌이가 입니다

 

  드넓은 초원 위를 달리는 들소들

  어지러운 천장에 수풀이 돋고

  발밑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동안

 

  오늘도 건강한 하루를 견뎌 내는 중입니다

 

  백 번째 어린이날이 오면

  혈색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빙그르르

 

  떨어지고 솟구치다

  성장하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법을

  알아 버린 휴일입니다

 

  짙푸른 초원 위에는 엄마 없이

  한 아이가 새를 쫓아 뛰어가고

 

  집 안에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새의 깃털을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이 있습니다

 

  누구도 내가 얼음을 머금고

  내일을 함구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 빙식증을 얼음을 강박적으로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철결핍성 빈혈과 연관되어 있다.

<  > 

 

 

박은정 시인: 2011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밤과 꿈의 뉘앙스』 『아사코의 거짓말』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