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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던 흰색 팬티
위에 돋은 달[月], 얼룩이 부끄러워서 창밖은 철마다 목
련 꽃잎을 피워낸다
목련 기술자
꽃잎이 손톱으로 조금씩 번져오는 정류소 앞 머플러는
바람을 재촉이며 걸었네 어머니는 나무 밑에서 무언가를
끓여내고 있었지 내일은 나무의 얼굴이 좀 더 싱그러워
질까 가족들을 뒤적이던 어머니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
곤 했네
일요일엔 두 손을 모으고 착한 여자가 되고 싶었네 내
무늬를 좋아하는 남자와 키스를 하고 돌아와서는 차곡
차곡 빨래를 갰지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던 흰색 팬티
위에 돋은 달[月], 얼룩이 부끄러워서 창밖은 철마다 목
련 꽃잎을 피워낸다 나무 위에서 꽃잎은 다리가 길어지
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나무 밖으로 하얗게 흘러나오는 여자들 목련 하고 부
르면 자물통이 잠긴 집을 열어줄 것 같다 목련을 생각하
는 동안 창문은 세탁기에서 뭉개진 꽃잎을 꺼내 빨랫줄
위에 사뿐사뿐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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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긋는 성냥처럼, 당신의 귀가 타올랐어요 그 순간
맺히는 귓가의 불꽃 그걸 로맨스라 하면 어떨까요 늘 듣
고 있는 희귀한 귀 오늘은 귓속이 온통 언덕길이에요
로맨스
#1
귀가 무수히 돋아난 벽, 방 안을 흘러 다니는 귀, 당신
귀에서 흘러나오는 진하고 부드러운 물
남자는 오른손에 구름을 들고 왼손으로 여자의 머리
를 쓰다듬고 있어요 거울 속의 여자는 남자의 귀를 만지
고 있었죠 진한 흑설탕이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사람 관
심 있어요? 행복이란 말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귀를 만질
때 느껴져요 귀 귀 발음하면 귀가 잘린 남자가 나타날
것 같죠 귀가 둥둥 떠다니는 방, 귀의 웃음소리 귀들 떠
다니는 귀신들
#2
확 긋는 성냥처럼, 당신의 귀가 타올랐어요 그 순간
맺히는 귓가의 불꽃 그걸 로맨스라 하면 어떨까요 늘 듣
고 있는 희귀한 귀 오늘은 귓속이 온통 언덕길이에요 나
무들 모여 있는 숲처럼 줄줄이 귀를 세우고 싶군요 어제
의 숲속엔 햇살과 바람이 순한 귀를 열어두었다는군요
이런 귓속은 어때요 사과 소스가 얹힌 물고기가 회 떠
진 귓속 고래 등 위에 혀를 꽂은 구름이 광활한 귓속 귓
속에 갇혀 있던 모든 귀들이 날름거리며 귓속에 돋아난
귀를 잘라먹었던 거죠 귓속 남자는 아직 귓속에 남아 잘
려도 계속 자라는 귀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을지도요
구름과 나무와 바다와 바람이 커다란 귀를 펄럭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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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말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꾸며 산과 들을
달리는 한 마리 싱싱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투명인간으로 사물 통과하기
사물과 사물의 얇은 틈에 실타래를 끼워 넣고
나를 공기의 음악으로 채워 넣고
이 긴 말들의 놀이로 한 뼘 한 뼘 줄넘기를 할 수 있다면
빌딩과 빌딩의 간절한 간격 사이에 한밤중의 비틀어진
감정을 데려와 내 그림자와 오래 흘러갈 수 있다면
당신과 나의 말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꾸며 산과 들을
달리는 한 마리 싱싱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가령 그것을 목을 길게 빼고 하늘에 가볍게 젖어드는 일
두둥실 누워서 바람으로 떠오르는 일
싱그럽게 공기처럼 흩어지는 일
눈을 감고 당신의 입속으로 스며드는 일
나의 눈동자를 고요한 사물에게 박아주는 일
그리하여 텅 빈 몸으로 사물의 중심을 가볍게 통과하는 일
미치도록 죽고 싶어 다시 돌아오는 봄의 환희
거리에 나서면 그렇게 빼낸 나와 당신의 눈동자들이 겨
울의 무거운 옷을 벗고 무수한 꽃을 바람처럼 통과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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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안에 들어가 눈이 크고 불행한 호수의 저녁을 생
각합니다 숨죽여 있는 호수 안에 칭칭 동여맨 시체, 그
사과 속 같은 물속에 한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
사과 안에 들어가 눈이 크고 불행한 호수의 저녁을 생
각합니다 숨죽여 있는 호수 안에 칭칭 동여맨 시체, 그
사과 속 같은 물속에 한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태양이 그
늘의 동쪽에서 작은 사과꽃으로 피어날 때 나는 서쪽 너
머에서 사과를 먹던 상상만으로 둥그런 물속에 오롯이
앉아 사과를 담은 그릇이 되기를 바라며 사과는 둥글고,
그 옆에는 몽글몽글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사과꽃을 삼킨 목인 듯 아프게 환하게 가라앉던 물속
기억, 기억을 멈추게 하는 슬픔은 다시 사과나무가 되어
피어납니다 물속 깊은 곳의 나무 위엔 사과와 내가 얽힌
난해한 나무들이 자라는 세계입니다 바람의 눈과 나의
입, 사과의 귀와 나의 머리카락이 한 몸에 자라나는 세
계를 보고 바람들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나를 부정함으로 새로운 나를
돌보기 위해, 웅크려 있던 세월들, 분홍의 귀여운 사과
나무들이 소시지나 햄의 아름다운 나뭇가지가 되고, 우
리가 버린 얼굴과 기억들이 새로 태어나는 사과 위에서
독특한 조리법이 되고 리바이벌 창문이 되어 골똘한 눈
동자로 죽은 사과들을 음미하는 새로운 입들이 되는 걸
까요
한 손에 칼을 들고 뚝뚝 떨어지는 촛농의 따스한 감촉
을 손등에 느끼며 물속 깊은 곳입니다 여러 번 죽어 다
시 또 죽을 수 있는, 죽은 만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물
방울들의 호수 안입니다
[중략]
나는 끊어진 다리 뒤, 패인 사과 안에 누워, 무수한
상념의 거품을 뿜어 올리며 눈 부릅뜬 작은 물방울들을
밀어 올립니다 테이블의 창문 뒤에는 검고 푸른 빗줄기,
검은 사과들이 줄지어 선 능선입니다
촛농은 손등 위에 뚝뚝 떨어지고
호수의 발가락과 나의 손가락이 붙어 자라는 촛불이
타오르고 사랑하는 껍질은 없고 사랑하는 알맹이도 없고
흰 불꽃은 어느 먼 곳의 공중으로 날아가
죽어 흔적 없는 것들만 사과꽃으로 피어난다는 호수
를 생각합니다 다시 피어나지 않는 꽃들만 물방울로 환
하게 떠오른다는 크고 신비로운 사과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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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감고 말랑말랑해지는 사람 낯선 방문 속으로
팔과 다리를 움츠리고 녹아버린 사람 케이크가 되어 폭
죽이 되어 환하게 폭발하면 좋겠어
케이크가 된 사람
부드러운 시간을 베어 물면 좋겠어 납작한 코와 스펀
지 같은 입 그 입이 물고 있는 초의 긴 손가락이 되어 둘
러앉은 얼굴을 익히느라 움칠 촛불이 놀란다 녹아든 팔
다리가 생크림 위에 앉아 밀어 올리는 촛불의 노래
이웃들이 축가를 부르는 사이 주인공의 얼굴이 붉은
공기처럼 타오른다 한 사람이 케이크 속으로 손을 넣는
다 또 한 사람이 케이크 속에서 어깨를 꺼낸다 층층 겹
쳐지는 단층의 시간들
모두 돌아간 뒤 한 얼굴이 생크림 속으로 들어가 눕는
다 누워서 생각한다
두 눈을 감고 말랑말랑해지는 사람 낯선 방문 속으로
팔과 다리를 움츠리고 녹아버린 사람 케이크가 되어 폭
죽이 되어 환하게 폭발하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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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2015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사과에서는 호수가 자라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