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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이문재 시인의 시■ 혼자의 넓이 & 우리의 혼자 & 물의 백서 3-얼음 & 활발한 독거들의 사회 & 끝이 시작되었다.

by 시 박스 202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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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청년 by. freepik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혼자의 넓이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으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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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국 드라마 세편을 연속으로 보는 것도

  혼자서 다 하느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는 자기가 혼자라는 걸

  누구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혼자

 

 

 

  혼자는 바쁩니다

  외롭거나 쓸쓸한 겨를이 없습니다

  혼자는 오늘도 모든 걸

  혼자서 다 하려고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것도 혼자

  전기밥솥 예약 버튼을 눌러놓지 않는 것도

  옛 애인 이름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도

  국가고시에 접수만 하고 시험장에는 안 가는 것도

  미국 드라마 세편을 연속으로 보는 것도

  혼자서 다 하느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는 자기가 혼자라는 걸

  누구한테 들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매번 자기 자신에게 발각됩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노출되고 맙니다

  그래서 혼자는 더욱더 혼자이고

  그래서 더더욱 혼자서 잘하려고 애를 씁니다

  혼자 주변에는 온통 혼자입니다

  혼자는 늘 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혼자들도 다 알고 있지만

  서로 다들 혼자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혼자는 바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라도 보기 위해

  어제와 다름없이 열심입니다

  때로 혼자는 뭐가 뭔지 몰라 멈칫합니다

  그럴 때면 자기 이름을 몇번 불러보기도 하고

  일없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기도 합니다

  실내에 있는 전등을 있는 대로 다 켜놓거나

  벽에다 칼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면

  우리 혼자는 다시 대단히 바빠집니다

  그러다가 또 지치면

  혼자는 모든 게 다 그냥 싫다고

  아니 모든 게 그냥 다 좋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우리 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 입구에는

  멋진 붓글씨가 하나 걸려 있는데요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

  눈길을 주는 혼자는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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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밖으로

  터져나가

  으스러지고 싶어하는

  녹아 흐르고 싶어하는

  얼음 속 언 물처럼

 

물의 백서 3

얼음

 

 

 

  초겨울

  얼음이 얼기 직전

  뒤돌아보는 물처럼

 

  초봄

  녹기 직전

  자기 앞을 내다보는

  얼음처럼

 

  한겨울

  얼음 속으로

  얼음의 한가운데로

  꽝꽝 더 얼어가는

  얼음처럼

 

  더 차가워져서

  더 딴딴해져서

  스스로 터져나가기를

  원하는 얼음처럼

 

  제 몸 밖으로

  터져나가

  으스러지고 싶어하는

  녹아 흐르고 싶어하는

  얼음 속 언 물처럼

  

  이윽고

  가벼워져

  구름의 손을 잡는

  새벽 물안개처럼

  보란 듯이 땅을 버리는

  이른 봄 아지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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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거라고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독거에게도 동거가 있다

  스마트폰하고만 살거나 스마트폰에다 개 한마리

  아니 애완, 아니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활발한 독거들의 사회

 

 

 

  1인가구라고 하지 말자

  1인가구하고 하면 사람이 사라진다

  인구에서 인간이, 국민소득에서 국민이 안 보이는 것처럼

  1인의 사람도 안 보이고 하나의 가구도 안 보인다

 

  독거청년이라고 하자

  1인가구 대신 혼자 사는 젊은이, 독거청년이라고 부르자

  독거가 곳곳에 있다 가족과 함께 살든, 학교에 다니든

  군대에 갔다 왔든, 지금 군대에 있든, 가야 하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미혼이든 비혼이든

  아니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도처에 독거청년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수시로 잠깐씩 독거하는 청년도 있다

  독거가 훨씬 편안한 서른을 훌쩍 넘긴 남녀도 있다

 

  그런데 독거라고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독거에게도 동거가 있다

  스마트폰하고만 살거나 스마트폰에다 개 한마리

  아니 애완, 아니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그럼 이제 스마트폰도 단순한 제품이 아니다

  스마트폰도 어엿한 반려, 반려 상품이다

 

  스마트폰 가입자 삼천만, 반려동물 일천만 시대

  독거에게도 애틋한 엄연한 가족이 있는 것이다

  독거는 반려 상품,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것이다

  독거청년은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가끔 거룩해 보일 때가 있다

 

  독거와 독거가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1인 시위처럼

  아무에게도 관심 갖지 않는 개인주의자처럼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않는 완전주의자처럼

  지금 여기, 독거와 독거가 활발하게 독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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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끝이 시작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끝의 시작을 바로 보자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끝이 시작되었다*

 

 

 

  끝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관을 들쳐 메고

  춤추는 아프리카 청년들처럼

 

  춤을 추자

  낡은 것이 가고 있다

  낡은 것이 잘 갈 수 있도록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자 우리 함께 배웅하자

 

  드디어 끝이 시작되었다

  서로 손을 잡고 끝의 시작을 바로 보자

  낡은 것은 가고 있지만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저녁 같은 혹은 새벽 같은 이 시간

 

  마침내 끝이 시작되었다

  땅끝에서처럼 바다의 끝에서처럼

  끝에서 끝을 똑바로 보고 돌아서자

 

  이 끝을 시작으로 만들어내자

  오래된 아침 그래서 처음인 새 아침이

  우리 앞에 있다 아니 우리 안에 있다

 

  바야흐로 끝이 시작되었다

  춤추고 노래하자 안팎의 새것을 마중하자

  이번이 마지막 끝일지도 모른다

  이 시작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첫 시작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관을 메고 춤추자

  요람을 들고 노래하자

  저 낡은 시대의 인간을 위하여

  기필코 두 눈 뜰 우리 안의 인류를 위하여

  다시 뭇 생명 보듬어 안을 어머니 지구를 위하여

 

 

  *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체르노빌」에 나오는 대사.

  ** 낸시 프레이저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책세상

      2021)에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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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가 있고,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시화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