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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격발된 봄
나는 격발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폭발하지 않았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달아나는 풍선
나의 방향엔 전방이 없다 멀어지는 후방이 있을 뿐
아무 구석에 쓰러져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어느 것도 봄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봄
이 볕의 풍선을 뒤집어쓰고 달려가고 있다
살찐 표적들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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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
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살갗을 벗기며 저무는 황혼의 저녁
敵國의 가을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내걸린다, 저 맹세들
어떤 역모가 해마다 반란의 풍속을 되살리는가 허
공을 파지로 구기며 진격하는 북국의 나팔 소리
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
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살갗을 벗기며 저무는 황혼의 저녁
붕대로 풀어지는 구름의 거적과 벌겋게 나뒹구는
태양의 해골바가지
모든 문자가 추억처럼 타올랐으므로 한 장 한 장
시절이 실연을 흔들며 투항하는 시간의 유적지에서
연기의 문장으로 원군을 청하는 늦은 후회여
계절의 부장품은 기다림이다 반란의 나팔 소리가
허공을 디디며 번져가는 파지의 밤
구겨진 산과 구겨진 강과 구겨진 채
날이 밝으면 빈 나뭇가지에 낮달이 반지처럼 끼워
져 있을 것이다 도망하라 화를 피해 그러나
나무마다 붉은 심장이 뛰고 있다, 저 맹세에
내 눈물도 역모의 증거임을 안다 돌아가지 못할 길
에서 진압당할 마음이 돌멩이처럼 떨어져 내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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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뚫는 바람은 슬픔의 뿔
바닥에 뒹구는 꽃잎의 휜 등을 보면 어느 슬픔이
바람이 되는지 알리, 어느 바람이 뿔을 가는지
슬픔의 뿔
은빛 문을 달고 하늘이 흘러간다 부드러운
경첩의 고요를 따고
꽃잎 하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 가지에서 바닥까지
미닫이 햇살이, 드나드는 것들의 전후를 기록했다
오로지 구름의 필적으로
석양의 붉게 찍힌 이면지 위에
새의 이름으로만 허락된 통행,
문밖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손등처럼 말아쥔 머리를
세워
두드리면
주인은 꽃잎을 날리며 덜컹거리는 한 계절을 닫는
다 철문의 마른 소리처럼
반짝이는 빗장 위로 적막이 스쳐갈 때
어둠보다 굳게 닫힌 허공의,
문을 뚫는 바람은 슬픔의 뿔
바닥에 뒹구는 꽃잎의 휜 등을 보면 어느 슬픔이
바람이 되는지 알리, 어느 바람이 뿔을 가는지
문틈에 찢겨 환하게 피 흘리는
석양의 눈먼 독법으로
혹은 구름의 행갈이로
새가 날면, 차례차례 열리는 문 저 끝에서 먼 밖을
내다보는 주인의 두 귀에
울음으로 짠 밤의 그물을 펼치리
그리하여
경첩에 박힌 못처럼 별이 빛나고
사람들의 머리가 부풀고
밤하늘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허공의 모든 문이 회
전하기를, 그리하여 햇살은
가지에서 바닥까지 슬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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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알, 얼음 속에 환하게 불을 켠
개구리알, 불 속에 환하게 얼음이 된
개구리 증후군
개구리는 제 무덤 깊이 잠들어 있고
불은 아직도 개구리의 입 속에 있고
겨울은 어느 작곡가의 싸늘한 노래비를 지나 맹세
의 참수된 머리카락처럼
흘러간다, 이제 뛰어서는 건널 수 없는 깊이를 세
워 금빛 수면을 출렁이는 빌딩 속으로
개구리알, 얼음 속에 환하게 불을 켠
개구리알, 불 속에 환하게 얼음이 된
도시는 어느 사거리의 우회전 신호를 지나 기억의
잘려나간 지느러미처럼
흘러간다, 칸칸이 쌓아올린 창문들의 호수 그 속에
갇힌 울음의 하얀 연기처럼
긴 노래를 감고 목을 매는 눈발처럼
그러나 심장은 한 번도 잠든 적 없다, 낮에도 켜져
있는 가로등 붉은 눈망울로 깜빡이며
녹슨 표지판 아래 해변이 쓰러질 때
피의 망치를 들고 와 힘껏 내리친다
개구리밥, 알루미늄 휠이 돌리는 파문의 무지개 가
슴 복판에 단 초록색 리본처럼
개구리밥, 꿈속에 퍼지는 노래의 말
흘러간다, 이제 맹세로는 세울 수 없는 높이를 뉘
여 젖은 바닥을 드러내는 도로 위에서
울음소리, 눈 속에 요란한 경적이 된
저녁은 어느 교회당 십자가의 피뢰침을 지나 청춘
의 불타는 공동묘지처럼
불은 아직도 잠든 개구리의 입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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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무 날의 도시
식당 간판에는 배고름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빈 내장처럼
환하게 불 켜진 여관에서 잠들었다
뒷문으로 나오는 저녁
내 머리 위로도 모락모락한 김이 나는지 궁금하다
더운 밥이었을 때처럼
방에 감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다 돌아
한 무더기 암호로 남는 몸
동숭동 벤치에서 가방을 열며 나는 내가 가지지 못
한 내과술에 대해 생각한다
꺼낼 때마다 낡아 있는 노트와 가방의 소화기관에
대해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 바닥씩 누운 배고픈 자들이 아득히 별과 별을
이어 그렸을 별자리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거리는 환하게 어둠을 켰다 빈 내장처럼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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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날의 도시』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나의 끝 거창』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시론집 『비로 만든 사람』, 소설 『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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