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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유희경 시인의 시■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당신의 자리 & 내일, 내일 & 코트 속 아버지 & 벌거벗은 두 사람의 대화.

by 시 박스 202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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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셔츠를 입은 모습 by. pexels-cottonbro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 ··· ]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  >

 

 

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

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 ··· ]
당신은 내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

내 머리 위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
 

당신의 자리

 

 

 

    나는 당신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다 왼쪽

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사람이다 당신 발밑으로 가라

앉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다 당신이 눈 

감으면 사라지는 그런 이름이다 내리던 비가 사라지

고 나는 점점 커다란 소실점 복도가 조금씩 차가워진

다 거기 당신이 서 있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그것은 모르는 얼굴이다 가시만 남은 숨소리가 있다

오직 한 색만 있다 나는 그 색을 사랑했다 당신은 내

오른쪽의 사람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사람이

다 내 머리 위에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당신이

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

 <  >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

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내일, 내일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

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들,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

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

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

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

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

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  >

 

 

그 흐릿한 자국들 코

트 속 아버지는 아직도 춥고 나는 망설인다 아버지

왜 그러냐 좋으세요 좋을 리 없지 않겠니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코트 속 아버지

 

 

 

    지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나는 코트 속 아

버지를 발견한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있

었다 젖은 발처럼 내 코트 속 아버지 어떻게 해야 우

리는 낯섦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빈 주머니

에 손을 넣고 아버지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흐릿한 자국들 코

트 속 아버지는 아직도 춥고 나는 망설인다 아버지

왜 그러냐 좋으세요 좋을 리 없지 않겠니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그 질문은 내가 해야지 나는 사라져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과 가로수 사이 잎

들이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싸워야 하는군

요 같은 코트 속에서도

<  >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충격과 충동에 대해, 언어와 억울에 대해 우리는 침

묵을 선언한 사람들처럼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다.

 

벌거벗은 두 사람의 대화

 

 

 

  그는 그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하늘, 그러니까 파랗다가 보랏빛으로 변해

간 그날에 대해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읽다

만 책처럼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가 입을 다물었을

때, 나는 날아오르는 한 무리 새 떼를 본 것이라고 생

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어둠에 대해 그 어둠을 뚫고 달려가

는 속도의 굉음에 대해, 더 녹지 않는 늙은 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펼쳐 읽고 싶다는 상

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충격과 충동에 대해, 언어와 억울에 대해 우리는 침

묵을 선언한 사람들처럼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다.

그는 사람은, 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들은

것 같고 나를 감싸고 어디론가 데려갈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나였는지 그였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렇듯 마주 앉아 있었고 서로를 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그저, 막막하게 귀를 기울인 것은

나임이 분명하다.

<  >

 


유희경: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이다음 봄에 우리는』 『겨울밤 토끼 걱정』 등. 산문집으로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사진과 시』 『나와 오기(유희경의 9월』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작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 대표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는 어둠의 혼란 제거되고 좀 더 밝고 맑은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시여! 건강하고 행복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