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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안태운 시인의 시 ■ 기억 몸짓.

by 시 박스 2025.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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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몸짓

 

 

 

  당신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해식동

  곶자왈

  당신은 어루만졌다

  세월과 물질이 만들어낸 형태들

  인간이 만들어낸 이름들

  당신은 기어간다 당신은 보행한다 당신은 날아다닌다 당

신은 헤엄친다

  내 숨은 또다른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멀리서 영상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잔다

  해령

  몸을 건사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몸을 짊어진다는 건 변태한다는 건 분화한다는 건

  노래를 잎에 달고 사는 얼굴들

  떨림들

  불길을 피해 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번지기 전에

  폭우를 피해 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휩쓸기 전에

  곤충의 솜털

  당신의 몸짓

  당신이 머뭇거리는 시공간

  흩날리는 재가 도시의 불빛에 비친다

  아스팔트 위로 식물이 번창한다

  당신은 걸어간다 당신의 몸을 보호하는 재질들로 꽁꽁 싸

맨 채

  당신은 생산지와 멀어져 살아간다

  당신은 살균된 것을 바라본다

  당신은 지나간다

  어느 날 방아쇠를 다만 건드려보고 가는 동물들을 바라보

았다 그 형태와 질감을 낯설어하는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

  당신은 겁에 질린다

  물감

  동물은 수많은 얼굴을 알아본다

  어느 날 당신은 생태통로를 이용한다

  어느 날 우리가 생태통로를 이용한다

  어느 날 그들의 모습이 희미해진다

 

 

  어느 날 우리는 꿈을 꾸고 깨어난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꿈속에서 젖어 있었다

  작용

  움직임과 빛깔

  깨어난다

  암수한꽃

  어느 여름, 충영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식물이 애벌레에

게 집을 지어주는

  놀라워,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것

  어느 가을, 당신은 계속 자라나고 있었다

  옥양목에 수놓았다

  어느 겨울, 우리가 늙어가는 걸 서로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밀렵꾼으로 인해 코끼리는 상아가 짧아지는 쪽으

로 진화했다

  어느 봄, 춤추는 몸짓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표정과 주름과 홈

  어느 여름, 비인간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인간의 이미지

를 접했다

  어느 가을, 바람이 불었을 때 느끼는 나에 대한 촉감

  어느 겨울, 인간은 음악을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귀기울여

보았고

  세계는 소리로 가득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느 봄, 전쟁이 일어난다

  침묵과 바구니

  난각막

  인간끼리의 전쟁은 인간뿐 아니라 여기 모든 생물과 무생

물에 대한 파괴와 살상

  어느 여름, 추운 날을 그리워했다

  혹은 순간 추워지면 더울 때를 그리워하고

  어느 가을, 제철이라는 소중함

  섬모

  어느 겨울, 기억하려고 낭독회에 함께 모여 있었꼬

  어느 봄,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굴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들며 꿈을 꾸었고

  어느 여름, 조카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타고 가는 중학

생을 보며 그는 내 과거가 아니고 조카의 미래라고 문득 여

겨졌고

  팔랑개비를 만들어보았고

  깨어난다

  어느 가을, 거울의 실금을 눈치챘고

  어느 겨울, 날개응애와 애꽃벌

  스치기

  어느 봄, 옛 기억 속 장면에서는 나를 삼인칭으로 인식하

게 되고

  어느 여름, 끝말잇기를 하는 인간

  아이의 냄새를 맡는다

  아이가 냄새를 맡는다

  어느 가을, 반딧불이와 노루와 버들치를 알았다

  어느 겨울, 사슴벌레와 망초와 물범을 알았다

  모습들

  어느 봄, 해오라기와 코알라와 병아리난초를 알았다

  어느 여름, 말매미와 들소와 안경원숭이를 알았다

  몰랐다

  모른다고 말했다

  어느 가을, 구름표범과 옥구슬이끼를 알았다

  어느 겨울, 낙우송과 파르툴라와 브룬펠시아를 알았다

  오리너구리를 알았다

  점박이영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몸짓들

  다르고 같다는 걸 알았다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어느 날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는 우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드넓어지는 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슬펐다 기뻤다 하염없었다

  그것

  흐르는 강물

  둘레

  산란과 예감

  탄성

  감각들

  우연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되돌아온다

  기척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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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운 시인:2014년 《문예중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산책하는 사람에게』 『기억몸짓』이 있다.
『감은 눈이 내 얼굴을』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