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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이영주 시인의 시 ■ 시각장애인과 시계 수리공 & 엎드려서 & 활선공 & 어린 밀수꾼 & 생장의 방식.

by 시 박스 202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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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장애인과 시계 수리공

 

 

 

  시계를 고쳐주고 돌아섭니다

  그는 창고에서 울고 있습니다 자신이 묻혀 사는 목

소리를 떠나려고

  시간 밖에서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너의 손은 매우 젊구나 가장 낯선 부분을 만지면서

 

  때로 닫힌 눈을 생각할 때 그는 수수께끼라고 여겼

습니다

  철근을 붙잡고 이것은 수수께끼라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삶은 어떤 시간입니까

  돌아선 채 한 장소에 머물러 있습니다 손으로 볼

수 있는 시계를 쥐여주고

 

  고대 슬라브 교회의 기도문에는 한숨이 있습니다

창고 문을 열고 소금과 감탄사, 머리카락과 눈물, 수

염과 손가락 들을 모아놓은 죽은 목록을 들추어봅니

다 모든 것은 명징하고 해독할 수 없는 양식만 남아

생활이 되었습니다 시계는 살아서 움직이고 이제 밖

으로 가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사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자신을 떠나려면

  새로운 불행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그는 고마워서

  내 손을 잡으며 젊은 자의 피부란 물고기 비늘처럼

비린 것

 

  문을 열어두고 가렴 나는 내가 그렸던 동그라미는

아니겠지 언젠가는 공백이 되겠지 텅 빈 것이 되면

지금을 남겨두려고 가장 낯선 손을 놓고 있습니다 바

라본다는 것이 어떤 불행일지 몰라 허공을 만지고 있

습니다 침묵 한가운데에서 섬세하게 시계를 만지고

있습니다

 <  >

 

 

엎드려서

 

 

 

  피가 돌지 않는 다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손끝으로 번져오는 뜨거운 온기

  이것은 내 온도일까요 증발해버린 어떤 피의 마지

막 지점일까요

 

  고대의 철학자는 하늘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달 아래의 세계에서는 무엇인가 자라고 죽음의 세

계에서도 무엇인가 자랍니다

  그의 피는 점점 다리에서 벗어나 땅속으로 스며듭

니다

 

  먼 길을 떠난 적도 없는데

  달 아래에서 그저 열심히 모든 시간을 바쳐 자랄

뿐이었는데

 

  엎드려 잠든 밤

 

  나는 피가 돌지 않아 자라기를 멈춘

  딱딱한 물체를 주무릅니다 이 다리 안에서 이제

  무엇이 흐를까요 빛은 소멸하는 별 때문에 찾아온

다고 합니다

  그가 폭발하는 시간이 되면

 

  죽음의 세계에서도 빛이 자랄까요

  우리는 이쪽 하늘과 저쪽 하늘에서도 그저 자라는

것뿐일까요

 <  >

 

 

활선공

 

 

 

  고압전선에 앉아 있어

  새처럼 발을 모으고 어깨를 안으로 집어넣을까

  바람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면 아슬아슬하게

건너갈 수 있을지

 

  공중에 드리워진 선

  타오르는 자기장

 

  나는 위로 올라와 지상에서 떠도는 목소리를 들어

  전도체를 타고 흘러 다니면 이상한 음악이 되는

  사물들이 숨을 죽이고 조금씩 잘려 나가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앓고 있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성되는 구름

  바람보다는 구름이 통과하는 선

  수많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밥냄새

 

  나는 그 공포 사이를 걷지

  구름을 꼭 잡고

  고압전선을 이어 붙이면서 나는 마른침을 삼키네

  꿀꺽

  뼛속으로 들어오는 불의 감각

 

  어느 순간 바람 안에서 재가 된다면

  바닥보다 더 깊은 밑으로 떨어지고 싶다 아무 감각

도 느끼지 못하는 흩어지는 것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재주는 허공에서 선을 타는 것

  위로 올라와 현기증을 앓는 것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을 예감하는 것

 

  새들이 전선에 모여

  어느 활선공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지

  듣고 있네 발톱을 세우고 깃털을 툭툭 털어내며

 

  고장 난 고압전선을 이어 붙이는 사람

  그 사람은 가장 조심스러운 발바닥을 가졌지

 

  공중에 걸쳐 있는 발바닥에서 음악이 시작되고 있다

  울고 있다

  <  >

 

 

어린 밀수꾼

 

 

  여행을 한다는 욕망도 없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

다 나에게는 돌아올 뒷모습이 없습니다 누워 있으면

밖이 더 잘 보입니다 세계의 어느 방이든 천장이 밑

으로 떨어진다는데요 나는 때로 천장을 이고 거리로

나섭니다 너무 무거워서 앞으로만 가야 해요 어려서

국경을 넘었고 심장은 생기다 멈추어버렸습니다 발이

뭉개지고 나서야 그곳이 국경인 것을 알았죠 아무리

걸어도 문이 보이지 않으니 언제 멈추어야 할까요 키

가 큰 나무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쪽으로 휘고 싶

어 합니다 가장 더럽고 복잡한 구덩이에서 모락모락

냄새가 피어오를 때

 

  나는 죽음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다정한 친구들은

만지면 바스라집니다 큰 가방을 메고 빛을 피해 걸어

갑니다 무엇을 하러 은신처를 떠도는 것일까요 그림

자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본 적 있어요 친구들 부서지

면서 다정하고 다정한 유리병들 굳이 이곳에 있을 필

요는 없습니다 아래쪽으로 휘면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색깔은 만지는지 방 안이 검은색이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둠을 입습니다 시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구덩이 오래된 곡괭이를 불에 달구

면서 냄새에 중독되고 있습니다 마자막에 만나게 될

전리품은 무엇일까요 아즈텍의 추장들은 하늘에서 칼

을 얻었습니다 너무 무겁고 슬퍼서 돌아갈 수 가 없습

니다

<  >

 

 

 

생장의 방식

 

 

 

  맞은편 4층집 창문 밑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아

무도 심지 않았는데, 창문 안의 늙은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멍든 등을 긁는다 이불을 끌어당겨 정

수리를 덮는다 생장의 비밀을 본, 아주 사소한 나는

밤마다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왜 자꾸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를 향해 계속해서 추락하는지, 푸른 잎이

손가락을 쫙쫙 펴서 수액을 떨어뜨린다 식물의 피, 악

몽의 피, 누군가 떠단다는 사실 누구나 떠난다는 사실

 

  장마가 지나가고 나면 악몽의 키는 커지고 이 고립

은 무엇일까 너무나 사소해서 아무도 심지 않은 사람

의 고립은, 창문 안에서 소리 죽여 울음을 감추던 이

불 같은 사람은, 밤이면 서로를 마주 보고 사소한 격

차로 떨어진다 흰 피를 흘리며 지붕이 들뜨고 창틀에

금이 갈 때 밤이 말을 하려고 한다 고요한 노역이 우

리를 빛나게 하는가 이 끝나지 않은, 고되고 비밀 같

은 노역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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