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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차도하 시인의 시 ■ 입국 심사 & 쉘 위 댄스 & 빈집 & 추모 & 미래의 손.

by 시 박스 202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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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입국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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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심사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

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

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 - 마음 - 맘마를. 먹으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밥그릇을. 태어나고 길러진 모든 습관을.

 

    살아가며 했던 모든 말이 적힌 책을 찢어 파쇄기에 넣는

다. 나풀나풀 얇은 가루가 된 종이를 뭉쳐 날개를 만든다.

날개를 달면 거기 적혔던 모든 말을 잊어버린다.

    날고 싶은 방향으로 날아간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사람들은 천사를 보았다 말하

겠지만

    천국의 주민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것은 깃털의 일부가 되었을 따름이고 다른 단어와 같

은 무게를 지녔다.

 

    때로는 아무것도 버릴 게 없는 경우도 있다. 가진 게 없

거나 이미 버리고 온 사람들.

   울지 않는 아기. 비쩍 마른 노인.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

   버릴 게 생기면 다시 오세요.

   천국은 그들의 머리를 떼어 지상으로 힘껏 던진다.

 

    비가 오려나.

    어떤 사람이 물방울을 맞았다.

    그날 비는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

 

    물방울을 맞은 사람이 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고 이 시도 파쇄기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쓸 것이다.

    많이 쓸 것이다.

 

    오늘의 구름은 양떼구름

    외국에서는 물고기의 비늘이라고 부른다.

 

    그래, 천국에서는 하늘과 초원과 바다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양과 물고기는 있다.

 

    양몰이 개와 그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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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 위 댄스

 

 

 

    빛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자주 넘어졌다 보이지

않았기에 만져야 했는데 더듬어도 가늠되지 않는 사물들,

손이었다가 나무였다가 벽이었다가 문이고 절벽인 사물들

을 만나면 이리저리 부딪히다 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에 빛이 없었으므로 모두가 나처럼 이리저리 부

딪히고 굴러다녔다

    먼저 눈멀어본 적 있는 자들이나

    눈이 없는 동물들과 식물들은 고요히 웃었을까

    함부로 가늠하지 않기

    빛이 없어진 후로 나는 그런 것을 배웠으므로

    상상 속의 웃음이 멎었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서도 춤을 추는 사람은 춤을 출 것

이다

    손을 뻗는 자리가 막혀 있고 발을 디딘 곳이 푹 꺼져도

 

    이런 것은 상상해도 좋지

    부드러워진 상처처럼

    아프고 사랑스럽지

 

    빛이 있으라, 빛이 있으라 ······

    중얼거리는 사내의 손을 잡고

    없어도 돼요

    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군가 넘어질 것 같을 땐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따듯한 피 냄새가 났다

    따듯한 젖 냄새 같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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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그 개는 당신의 마음이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고

그 빛은 당신의 어둠이 되기 위해 내려앉은 것이 아니며

그 새는 세상을 뜨지 않고 그저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그

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더 이상 깨끗하게 닦을

수도 없는 흰 접시를 바라보고만 있을 거라면

 

    거기에 샐러드를 좀 담아도 될까요?

 

    나의 친구들은 어느 날 모여서 채소 하나씩을 가져와 샐

러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사는지는 비밀에 부치

고 가져온 재료를 모두 넣기로 약속했어요. 모두가 양상추

를 가져온다면, 그런데 아무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모두가 양상추를 가져와버렸습니다.

 

    너희들이 그럴 줄 알았지.

    한 친구가 승리한 듯 웃으며 딸기 한 팩을 꺼냈고

 

    아니야, 우리들은 너를 믿은 거야, 너라면 보통은 샐러

드에 안 넣는 걸 들고 올 줄 알았으니까 양상추를 들고 온

거라고.

 

    보통 딸기는 샐러드에 안 넣나?

    안 넣지.

    안 넣지.

    안 넣지.

 

    사실 난 넣는데 안 넣지,라고 대답했지. 우리는 웃었지.

그러니까 나는 누가 더 이상 깨끗하게 닦을 수도 없는 흰

접시를 바라보고 있으면. 딸기 샐러드를 대접하기로 했다.

좀 웃기는 맛이죠. 안 웃긴가요. 웃기지 마세요. 웃지 마세

요랑 웃기지 마세요 중에서 웃기지 마세요가 더 웃기는 말

이죠. 당신이 웃다가 울다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되기 위

해 이 접시를 샀다면. 나에게 파세요. 그 값으로 시답잖은

농담을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떠난 빈집에서 이야기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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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영정도 위패도 없이 흰 국화만 가득한 곳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가요.

  내가 물었다.

 

  사람들은 꽃에다 대고 묵례를 했다.

 

  이곳은 추모 공간입니다.

  침묵해주세요.

  누가 내게 주의를 주었다.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가요.

  나는 다시 물었다.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식입니다.

  누가 답했다.

 

  장례식은 산 사람을 위해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묻자 누가 다시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세요?

 

  왜 

  나는 질문을 쥐고

  장례식장 입구를 서성였다.

 

  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지

  왜 죽은 사람은 죽어야 했는지

 

  질문이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그것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폭발했다.

 

  불이 났다.

  흰 국화가 재가 되었다.

  검은 연기가

  멀리까지

  날아갔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영원히

 

  예측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했다.

  미친놈이 그랬다고 했다.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고

 

  끝없이 옮겨붙었다.

  도시가 불탔다.

 

  영원히

 

  재가 된 도시 속에서

  영원을 믿지 않는 한 사람이

  내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시신을 옮기고

  연구실에서

  나를

  내 손을 오래 바라보다

 

  이런 기록을 남겼다

  : 그는 무척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다

 

  일지를 쓰다 엎드려 잠든

  그의 꿈속으로부터

 

  도시가 재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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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손

 

 

 

    이 시에는 공원이 등장하지 않고, 시인이 등장하지 않으

며, 사랑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에는 공터가 등장하고, 중학생이 등장하며, 등장할

수 없는 사랑이 등장한다.

 

    중학생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공원은 금연구

역이기 때문에, 공터는 비어 있는 터이기 때문에 공터. 그

렇다면 중학생의 마음도 공터.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

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는 아빠에게서 훔친 것. 아빠는 사랑할 수 없는 것.

가족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 친구도 애인도 사랑할 수 없

는 것. 선생과 제자라면, 신과 신도라면 더더욱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을 떠나서. 그 모든 관계가 아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중학생이 생각하는 동안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 가고. 중학생이 고개를 조금 숙

이고 담배와 연기를 바라보는 동안. 세상의 필터도 조금씩

타들어 가고, 세상의 모든 관계가 지워지고. 비어 있는 곳

빼고 모든 것이 지워져서.

 

    세상엔 공터만이 남았다.

 

    공터에 덩그러니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거나. 울거나.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만이 남아

 

    세상은 한층 조용해졌고. 중학생이 문득 고요를 느끼고,

담배를 버리고 신발로 그것을 짓이기고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은 저녁에서 밤으로 색깔을 바꾸고.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원래란 뭐지?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중학생은 담배

를 피우면 안 되고. 중학생은 담배 냄새가 빠질 때까지 산

책을 좀 하다가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담배 냄새

는 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중학생이 하는 질문은,

 

    혼을 낼까? 혼을 내지 않을까?

 

    예측할 수 없는 체벌.

    중학생의 마음을 공터로 만들게 한.

 

    그러나 우선은 공터에서 빠져나와 담배 냄새를 빼기 위

해 산책을 하기로 하고, 중학생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

다가

  

    주머니 속에서 어떤 손을 잡았다.

 

    그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선생도 신도 아닌

    시를 쓰게 될 중학생의, 미래의 손.

 

    하지만 지금 이 시에는 시인이 등장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깊게 손을 찔러 넣은 중학생이 당신을 지나

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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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하: 1999년 경북 영천에서 남.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산문집 『일기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이 있다. 시집 『미래의 손』은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되었다. 2023년 10월 22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