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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백은선 시인의 시 ■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2편 & 검은 튤립이 만발하던 계절 & 생일 축하해-구유에게 & 가장 아름다운 혼

by 시 박스 2024.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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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지 않은 상자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당신이 결국 갖게

될 미래라고.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그네 아래는 하얀 꽃이다

 

  폴란드 폴란드

 

  새가 날아가는 순간 새는

  무언가 놓고 가는 것만 같고

 

  하얀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다고 믿었다

  불타는 

 

  나의 폴란드

 

  아름다운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웃고

  아이들은 손과 손을 겹쳐 흔들리지 않는 탑을 만들지

 

  소리 없이

  날개를 접는

 

  물속에서 영원을 구할 때 너는 눈과 코와 입을 잃었고 그

위로 떠내려간 입이 부른 노래가 가장 긴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물속에서 영원을 구할 때

  찌를 드리운 노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 들여다보

면 들여다볼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당신이 결국 갖게

될 미래라고. 그 말은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퍼져나갔지. 그

것을 절망이라고 부르려 했지만

 

  젖은 종이에 쓰인 말은 알아볼 수 없고

 

 알아볼 수 없기에 완성되는  

 

 폴란드 폴란드

 

 계속

 

 그네는 흔들리고 꽃은 하양을

 

  무력한 것만이 유효하다는 믿음은 손쉽게 이루어지면서

도 부서지기 때문에 너는 그럴듯한 기분으로 태도를 지키기

좋았지. 시 안으로 꽃이 다뤄지는 방식으로. 미래처럼. 절망

하기 위해 태어난 포즈는 늘 호응받기에, 너는 줄곧 들여다

보았지. 들여다보지 않는 순간에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것

이 바로 흔들림이라고 적었지

 

  손과 손을 놓고 멀어지는 연인들처럼 

  다리 위에 매달린 기쁜 숨처럼

 

  기울어진 것은 두 가지 사건에 관해 

  간결한 견해를 표명하고

  8과 0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네가 다가갈 수 없는  

  대립

 

  폴란드

 

  열리지 않는 

  대립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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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또 누워 있으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시계가 갖고
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싶어 누군가에게 갑자기 말을
고 운명처럼 친해지고 싶어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수박을 사서 돌아가던 길이었지 옥탑을 향해 계단을 올라

가다 쉬다 다시 오르면서 

  숫자를 세고 눈앞의 반복을 꼽아보며 나는 오로지 무게를

견뎌야 하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지

 

  그거 알고 있니 때로 불필요한 것도 전부 갖고 싶어질 때

가 있다는 거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았

지 팔 년을 돌아보며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토록 많은 시

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

해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수박을 넣을 자리가 없어 베란다에 둔 채

  나는 갔어 먼바다에

 

  파라솔 대여비가 만원 텐트 치는 데 만원

  누워서 끝없이 모래를 털고 털며 짜증을 냈지 바다에서

들었다

  파돗소리 아이들 꺅꺅대는 비명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끝

없이 떠드는 취한 어른들 높아진 목소리 나는 모든 것들 동

시에 듣는다

  결국 또 누워 있으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시계가 갖고 싶

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싶어 누군가에게 갑자기 말을 걸

고 운명처럼 친해지고 싶어 갖기 싫어 먹기 싫어 가까이하

고 싶지 않아 나는 찢어지고 찢어지는 나를 구경하며

 

  아 재미있다 아 재미있다

  모래를 털고 숙소에 들어서면 모래가 밟혔다 샤워를 하

고 나와서도 모래를 밟았다 이불속에서도 서걱거림은 계

속되고

 

  어쩌면 이런 계속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티브이를 보며 어두운 방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오늘 세상이 끝난다면 어떨까 습관적으로 말해보며

  짠내가 섞인 끈적한 바람이 불어왔지 나는 어떤 기분으로 

유효해질 수 있을까

  그거 알아? 온도는 때로 망쳐놓는다는 거

 

  바람이 나를 만질 때는 새들도 눈을 감고 내려앉는다는

거 누군가는 결코 끝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

게 나라는 거

 

  첫 번째 손이 와서 이야기를 전해주었지 넌 이제 곧 알게

될 거라고 나는 여전히 모르고

  두 번째 손이 와서 함께 살자며 침대를 차지했지 어느 날

돌아와 보니 새끼손가락만 베개에 놓여 있었고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몇 계절을 헤매고

  세 번째 손이 왔을 때 나는 커다란 장갑 속에 손을 가두고

냉동실에 처박아버렸어 처음부터 손이란 걸 알았던 적 없

는 것처럼

 

  기후는 비, 비 오는 바다는 썰렁하고 입수금지 우산을 쓰

고 맨발로 해변을 산책했다 높은 파도

  즐거웠어 너무나도

  이제 이제 이제

  나는 몇 번의 공로상을 받고 대출도 받았지 슈퍼에 가면

계란 우유 파 삼겹살을 사는 보통의 삶을 살고 싶었어 계속

이 계속되는 것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생활이란

  부엌에 서서 새우깡을 뜯어먹으며 노트북을 켜고 신문을

들춰보는 손과 눈의 역할을

  세상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재밌다 재밌다

  아아 재미있다

 

  돌아가면서 나는 약간 흥미로운 생각을 했어 너무 쉬워서

웃음이 나기도 했고 화도 났지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길을 빨리 달리면 생각은 속도에 맞춰 무성해지는 순간

도 온다고 함.

 

  베란다 문을 열자 물크러진 수박 위로 초파리가 잔뜩 날

아다니고 있었지

 

  청소의 날은 그렇게 시작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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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튤립이 만발하던 계절

 

 

 

  나는 머리를 잘랐습니다

 

  눈빛은 다 이야기하고

  나무는 어둠 속 초처럼 꽂혀 있어요

 

  폭설이 내리던 밤

  끓는 물을 들고 숲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던 길고 긴 밤

 

  다 식혀서 가져오면 어떻게 하니

  엄마는 등을 밀며 말했습니다

 

  검은 튤립이 다 져버렸을 때

 

  잎이 무성한 빛무늬들 속에서

  나 하염없이 웃었습니다

 

  끓고 있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빛은 다 보여줍니다

  멍든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엄마는 이제 됐다고 했지만

 

  검은 튤립이 만발하는 계절

  나무에서 자란 양들이

  꿈으로 뛰어들어올 때

 

  나는 머리를 풀어요

  오래도록 그것을 놓지 않습니다

 

   

 

 

고양이를 두고 온 사람에 대한

  백 년 전의 소설을 읽었어

  고양이를 둔 자리에 며칠 뒤

  고양이를 찾으러 다시 갔는데

  고양이가 없어서

  우는 사람

 

 

생일 축하해

 -구유에게

 

 

 

  초침이

  두근거리는 소리

  나는 어두운 식탁에 앉아

  듣고 있었어

 

  칫칫칫

  쯧쯧쯧 그렇게 들려

 

  고양이를 두고 온 사람에 대한

  백 년 전의 소설을 읽었어

  고양이를 둔 자리에 며칠 뒤

  고양이를 찾으러 다시 갔는데

  고양이가 없어서

  우는 사람

 

  생명을 이해 못 해서

  바보다 바보

  나는 비웃으면서 읽었는데

 

  이곳과 그곳의 시간은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흐르니까 심장은

  돌 속에 안전하고

  계단도 없이 높아지고

 

  백 년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대

  심장을 돌 속에 둔 채

  먼 길을 걸어갔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소녀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몇 통의 편지와 마른 꽃

 

  새벽에 깨면 계속 이야기를 읽었는데

  고양이는 사실 고양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려서

 

  반복해 읽기 시작한 뒤로

  영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

  물고기 안녕

 

  마침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손

  털이 난 손

 

  굴뚝에서는 쉴 새 없이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멀리서 보면 물음표 같아서

  높아지는 것에 골똘해졌어

 

  생성의 비밀을 다 깨달으면

  다음은 파괴일까

  상자가 덜컹일 때마다

  우수수 쏟아지던 날개들

 

  소녀가 노파가 되고

  땅에 묻혀

  마침내 물고기가 되는 날

  고양이는 돌아올 거래

 

  그런데 있잖아,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

  중얼거리는 동안

 

  이곳과 저곳이 비껴가며

  찢긴 편지가

  공중에 흩날리는 동안

 

  시계는 째깍거리지

  칫칫 칫칫

  마치 끝을 아는 것처럼

 

  

 

< >

 

불가능한 것이 너무 많아서

  믿음이 생겨나듯

 

 

가장 아름다운 혼

 

 

 

   1

  엄마 나는 봐요. 세계가 비틀린 육각형으로 기우뚱 회전

하는 것을. 그게 엄마 눈에도 보이는지 궁금해요.

 

  사람은 언어로 생각을 한다는데 한 번도 말을 배운 적 없

는 나는

  그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치만

 

  사람은 언어로 생각한다는 말은 틀렸어요.

  나는 냄새로 공기로 빛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결핍은 존재를 알아야 발생하는 거예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리워할 수는 없으니까요.

 

                                *

 

  엄마가 여니야 하고 부르는 순간

  내 뺨을 만지고 등을 토닥이는 순간

 

  세계는 천천히 돌기 시작했고

  나는

 

  절망을 배웠어요.

 

                           *

 

  엄마

 

  우리가 건넌 다릴 아래로

  파란 물이 넘실거리던 거

 

  나무들 사이에 비죽 솟은 작은 버섯이

  너무 깨끗해서 웃었던 거

 

  참 이상해요, 그치?

 

                          *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차가운 쇠를 핥을 때의 피맛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아주 천천히 움직이던

  한 조각 빛을 만지며 놀던 오후

 

  밤이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서

  팔을 긁고 깨물던 일

 

 

  2

  내가 자라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날 엄마는 아침으

로 소시지 야채 볶음, 감자볶음, 미역국을 차려줬잖아. 난

미역국이 너무 싫었어. 미끌거리는 걸 입속에 넣을 때마다

억지로 삼켰어. 매번 그랬잖아. 피가 맑아진다고. 피가, 맑

아지는 게, 뭔데?

 

  학교는 너무 시끄러웠어.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의 작은

문을 열고 하얀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했어. 거기서

사각거리는 이불을 덮고 고요하게 침잠하는 상상. 그게 나

를 구했어. 그런데 내 방은 너무 약해서 누가 툭 치고 지나

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버렸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맑

게 웃고 있는 애들의 입을 다 찢어버리고 싶었어.

 

                             *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된 날부터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졌잖아. 그게 나는 좋았어. 좋은데 엄마가 슬퍼 보

여서 미안했어.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엄마가 미웠어.

 

  불가능한 것이 너무 많아서

  믿음이 생겨나듯

 

  세상에는 처음부터 잘못된 자리에 놓인 것도 있어. 제자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냥 거기 있어야 되는 것도 있어.

그걸 엄마는 모르는 거 같았어. 나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

했어. 가만히 누워 있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빈집의 정적 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것들

  비틀린 채 돌고 있는

  기울어진 풍경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

 

                              *

 

 

  난 절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시인의 말

 

 

  영혼은 어디 있을까?

 

  너의 배꼽

 

  그치, 우린 질문으로 시작해야지

 

 

 

백은선 시인: 201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 《가능세계 》, 《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 》,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가 있다.
김준성 문학상,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