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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변혜지 시인의 시 ■ 내가 태어나는 꿈 & 대과거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언더독 & 무해한 놀이

by 시 박스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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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헤지 시집 표지

 


가끔 서로를 깨뜨리면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말을 남기게 된다.

병원으로 가. 가서 나를 데려와.

 

내가 태어나는 꿈

 

 

 

  가족들은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박두한 세계를 맞닥뜨리고 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기를.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받아 든 부모의 손길에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기를.

 

  갓 태어난 나는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감격한 부모가 만들어내는 눈물과

 

  포대기에 싸여 금세 잠든 어린 나의 위에 켜켜이 쌓이고 있는 수많은 소원의 형상과

 

  수많은 축복의 선언들

 

  나를 안고 병원을 나올 때, 나는 잠든 부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내내 평안하기를,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나는 품에 안아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배불리 먹고도 웃지 않는다. 기저귀를 더럽히고도 울지 않고, 짓무른 엉덩이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나는 아직 원망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끈으로 묶어 나의 손목에 걸어둔

  나의 이름은 달아나려는 개처럼 자꾸만 몸을 뒤튼다.

 

  나는 가끔 움켜쥔 것들을 화들짝 떨어뜨린다. 이토록 사소하고 아름다운 물건들로

  손쉽게 나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워서 떨리는 나의 손을 내려다본다. 그래도

 

  나는 나를 유아차 태우고 밖으로 나간다. 내가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려고 차양을 내린 유아차 한쪽으로 부채질을 해주다 보면

 

  가끔 서로를 깨뜨리면서 나는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말을 남기게 된다.

 

  병원으로 가. 가서 나를 데려와.

 

 

 

 

 아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치료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좋아질 예정이었다.
그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바늘을 꽂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과거

 

 

 

  아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치료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좋아질 예정이었다. 그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바늘을 꽂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무 밑에 앉은 사람들이 집에서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무를 보기 위해 종종 소풍을 오곤 한다고 했다.

 

  겨울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오른쪽 가장자리가 녹슨 우편함과 반짝이는 녹물에 대해서, 결코 우편물을 찾아가지 않는 이웃과 이웃의 우편함에 꽂힌 초대장을 꺼내 든 일.

 

  우리가 가장 빛나는 순간에 사랑하는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렇게 적힌 초대장에 나의 이름이 있었던 일에 대해. 그런 곳에 가서는 안 된다고 중얼거렸던 것에 대해.

 

  왜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그는 골똘한 얼굴로 바늘이 꽂힌 나의 팔을 내려다본다. 그는 나의 건강에 관심이 많고, 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겨울이 중요한가요?

 

  창문 밖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모두 나누어 먹고 다 쓴 연탄처럼 누워 있었다.

 

  끝이야. 모두 끝났어.

 

  그런 말은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울기 시작한다면 나는 바빠질 것이다.
바빠서 가슴을 두르리며 실패한 이야기를 읽는 자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보아야 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흐른 눈물을 최대한 맛본 뒤에, 눈물의 맛을 적어야 한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손꼽아 기도하던 날이 도래하였고, 그리하여 모든 이

들이 엽총과 포도 한 송이를 손에 쥐고 세계를 떠났다.

그것은 풍요를 바라는 의식으로, 이제 와인은 틀렸군. 창

밖을 보다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이번 시도 실

패할 것이다. 세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 울거나 결심하

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나의 칩거에는 사람들의 눈을 잡

아둘 여지가 없다. 떠나지 않으려던 게 아닌데. 하필 잠

이 많아서. 하릴없이 나 홀로 이렇게 창문 바깥을 바라

보며 서 있는 것인데. 하늘에서는 흰 것과 검은 것이 쏟

아져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무無로 되돌리고 있었다. 충

분히 절망해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주먹을 쥐어야 하는

데.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것이 눈인지, 비인지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자, 나는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하

였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도무지 눈물 같은 것은 쏟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울고 싶은 것이

다. 그러는 동안에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울기 시작한다

면 나는 바빠질 것이다. 바빠서 가슴을 두르리며 실패한

이야기를 읽는 자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

다. 거울을 보아야 하고, 최대한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뺨에 흐른 눈물을 최대한 맛본 뒤에, 눈물의 맛을

적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눈물울 닦아주려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눈물 흘리는 이유를 경멸하는

자가 뒤에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눈물을 옹호

하려는 자 또한 있을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 너무 많은

자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는 반쯤 질려버릴 것이다. 그러

는 동안 그리고 또 그러는 동안······ 나는 눈으로 길러낸

것들을 다시 눈 속으로 넣겠다. 창밖에 쏟아지는 것이 여전

하고, 나는 그것이 눈인지 비인지 여전히 모른다. 아직

까지 페이지를 덮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해 주는 사람이 또한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고, 그것은 이야기

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적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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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언더독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 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

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를 노려보았다.

 

  너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ㅣ

 

  비로소 이 꿈의 구성 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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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두 손을 짚을 때, 너는 단정

한 얼굴을 되찾고 두 발로 선다. 기다려. 네가 말하는 동

안 나는 움직이지 않고

 

 

무해한 놀이

  

 

 

  좋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나는 너의 목에 목줄을 걸어 개처럼 끌고 다닌다. 개의

형상을 한 너의 등에 올라타 채찍을 휘두른다. 이럇, 이

라럇, 박차를 가할 때마다 너는 새의 형상으로 무너진다.

 

  네가 얼마나 잘 참는지 시험하려고, 나는 너의 등 위에

쌓아 올린다. 고함과 폭력이 지나간 광장의 소란스러움과

철창에 갇힌 네발짐승들의 섭생을, 죽으리라 결심했다가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해질 산책자의 밤의 오랜 배회를. 

침을 질질 흘리며 네가 민달팽이처럼 꿈틀거릴 때.

 

  너의 등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가벼워졌

는 지 보려고.

 

  등 뒤에 선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나를 무릎 꿇리고 나에게 목숨을 걸어주려고 나

의 어깨 위에 올라타 인내심을 시험하려고.

 

  내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두 손을 짚을 때, 너는 단정

한 얼굴을 되찾고 두 발로 선다. 기다려. 네가 말하는 동

안 나는 움직이지 않고

 

  시작하라고

  네가 말하자 등 뒤에 선 사람이 내게 다가온다.

 

  좋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기다려.

  네가 말한다.

 

  아무리 가지고 놀아도 나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시인의 말

 

 

 

"문을 열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너를 기다릴 거야."           

             목소리를 따라 나는 안내되었다.

 

        아름다운 찻잔을 건넬 준비를 한 채

                문 너머의 내가 기다릴 텐데.

 

            결심하는 동안 평생이 지나갔다.

 

 

변혜지 시인: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