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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다니 다행이야
미움이 나를 밝힐 테니까
털이 빠졌을 뿐인데
불빛이 들어오는 두 손
탈모 예방법
나의 장래희망
버스 바닥에 엎질러진 아저씨의 가발의 되는 것
흐느적
탈모를 예방하라니
무슨 말이야
다 빠져버려야 더 이상 빠질 게 없다고
벼락 맞은 뒷담은 가으내 기른 풀포기를 몽땅 잃었고
동병상련이라니 레트로한걸
우리가 미움을 돌보지 않는데, 미움이 우리를 돌보기 바라?
낡은 담장의 벽돌을 뜯어내
뽑아버리자
네가 온다면 내주고 싶어
빠진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티백
함께 차를 마시고 거실 바닥에 침을 뱉자
청록색 덩어리들
왜 그러냐 물어봐줄 필요는 없어
침을 뱉으면서
침을 뱉을 자리에 침을 또 뱉고 침을 더 뱉고 침을 칵 뱉으면서
운명이란 말을 믿는 거야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명명백백해지는 몸과 마음으로
빠져버리자 머리머리
머저리들아
손 비비면 겨울 그림자의 찬 냄새 맡아지고
너 같은 새끼는 꼬부라질 거야, 머리털도 다 빠진 채
축하합니다, 기도가 이루어졌군요!?
내가 싫다니 다행이야
미움이 나를 밝힐 테니까
털이 빠졌을 뿐인데
불빛이 들어오는 두 손
빈 정수리에 부적을 붙이고 기도를 드려
이루어지는 예언도 있잖아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될 때,
차라리 밑으로 파고 내려가는 기술을.
주식회사 알파카 건설
복슬복슬 털로 구멍을 만들어버렸어요. 애초 주셨던 건축 도면은 잘 씹어 먹었고요.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추락하는 중이라 잘 안 들려요. 뱃속에 자꾸 종이비행기가 날아올라서요.
내장이 구불구불 하늘이 되는 기분.
구멍에 쑥 하고 한번 떨어져 봤어요. 곤란하시다고요? 그건 우리 회사 사훈인데요.
돈을 못 주시겠다고요? 아니, 우리도 잎맥만 뜯고 못 살아요. 이를테면 창문을 좋아하는 알파카는 창유리만 담당하죠.
심지어 빌딩 없이도 허공에 창문을 박아 넣죠. 그러면 수천 개의 태양이 공중에 둥실 반사되어 떠올라버리고.
허상이라고요? 믿음은 다 진실입니다. 우린 네 다리로 에어 워크도 한다고요.
죽은 노을빛을 건축하는 건들건들. 공기 사이로 복슬복슬 철근 구조대를 빚는.
숨을 쫙 들이켜보세요. 원하셨던 건물이 가슴 안에 들이찰 겁니다. 그 방은 너무 꿉꿉하지요?
무언가 메시지 담긴 건물을 자꾸 요청하셨잖아요. 어차피 그건 못 지었고요.
짜잔, 저희가 바로 메시지입니다. 여물을 우물거리며 흰색 종소리 퍼지는 두 눈.
얼굴에 햇살이 비치면 소외되는 기분. 떨어질수록 뾰족해지는 귀는요.
사랑스러운 절망의 안테나. 사장님, 구멍이 이렇게나 길어졌는데.
일했으면 돈을 줘야죠. 높은 빌딩은 못 지었지만, 더 깊은 구멍이잖아요. 싫으세요?
아랫배에 만월을 모셔놓은 우리의 라마단을 보여드릴까요?
보름달은 본래 욕조 마개고. 안데스보다 높은 건축물은 없죠.
사라질수록 완성되는 우리들의 건축 기술.
구멍이 지구를 관통한다면?
안데스 보름달에서 뿅 하고 사장님이 튀어나오신다면? 구멍이 아니라 천상을 발아래로 거머쥔 샘.
돈은 안 주셔도 되겠습니다.
지금부턴 구멍이 우리 회사 주식. 양보할 수 없겠어요. 차라리 사장님도 알파카가 돼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간단합니다. 알파카! 하고 외치면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요. 복슬복슬 털이 자란다고요.
거북목 척추가 일자로 펼쳐지는 소리. 머리를 잘 쥐어뜯는 자세.
몽실한 안개 안경을 늘 쓰고 다니는 사람. 이미 우리 복슬 건축 노하우를 익히고 계신 거예요.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될 때, 차라리 밑으로 파고 내려가는 기술을.
이빨을 딱딱거리면 누런빛이 풀려나가는 주둥이. 아, 잠시만요. 벌써 그렇게 알파카인 척 굴진 말고요.
버려야 될 빗들 화병에 꽂아놓고
새로운 방식의 꽃다발을 만들어요
내일의 신년, 오늘의 베스트
정수리에 잎 그림자 몰아치는 날
슬픔이 꼭 훌륭해야 할 필요 없잖아요
버려야 될 빗들 화병에 꽂아놓고
새로운 방식의 꽃다발을 만들어요
털가닥이 쏟아지는 구름
무너지는 겨울 장마의 한편을 헝클어뜨릴 계획이니까요
단정해지는 건 싫어요
당신의 말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졌던 길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가르마에 대해
차라리 밀어버리자고요
적당히 우스워지며 실패를 사로잡는 법
나무빗의 손잡이를 잡을 때
아직도 난 빗을 숲이라 믿는 사람
화장대에 놓인 숲을 머릿속에 들이미는 사람
딱딱하고 무심한 덩어리, 빗질을 따라 흩어지는 벌레들
이 빗을 망치 삼아 휘두른다면?
당신의 뒤통수, 연약한 구멍의 어딘가를 후려친다면?
코피를 질질 흘리며 저물녘 하늘에 가닿을 거예요
피를 흘리는 일에게, 피를 흘리는 자로서
어제도, 내일모레도, 그제의 그제도 실은 전부 신년이니까
매일 버릴 수 있는 또 다른 빗이 놓여 있고
그건 우리의 죽은 숲
새로운 띠의 동물이 매일 현관 앞에 죽어 있어요
꼬리가 지평선만큼 긴 흰쥐
벼랑을 입에 문 갈색 강아지가
매일이 선물이 아니라면 뭐지요?
그 선물이 반드시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우린 노을빛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
죽은 동물을 우리 밖에 풀어버리세요
새로운 띠를 간직하는 골목들
그래요,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시인의 말> 중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공동이 함께 살아내고 마는 삶의 끊임없는 장소가 되는군요.
누구는 그것을 그라운드 제로라 부르고, 누구는 그것을 4·19 민주묘지라 부르고, 누구는 그것을 한숨이라 부르고, 누구는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든 부르고, 말조차 하지 못하는 말이 그렇게 탄생하고······
죽음은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군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이 끊임없음 앞에서.
나는 기어코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윤제 시인: 경기도 성남 출생. 2021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부문 당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진 스토리작가 공모전 선정. 시와 소설을 쓰며 작품 활동 중이다.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문학동네시인선 200 기념 티저 시집, 2023),
소설 《나는 엄마를 바꾸기로 했다》(고즈넉이엔티, 2023)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