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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들

■ 설하한 시인의 시 ■ 새가 태어나는 올리브 & 나이트 프라이트(Night Fright) & 빛과 양식 & 불가능한 얼굴 &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by 시 박스 2024.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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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앉은 잉꼬 앵무

 

 

새가 태어나는 올리브

 

 

 

 이스라엘은 올리브가 유명하다

 통조림을 열자 씨가 제거된 올리브가 가득 차 있다

 나는 올리브를 접시에 올려둔다

 

 빈 땅에 유대인들이 올리브를 심는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2006년 11월 한 할머니는 마지막 손자까지 잃자

 몸에 폭탄을 두른다

 가족을 잃은 유대인들이 슬퍼하고

 

 만약 보복하지 않았다면 만약 손자가 죽지 않았더라면 만약 올리브를 심지 않았더라면 만약 아무도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만약 그리고 또 만약

 생각이 정전되자

 

 어둠 속에서 올리브가

 접시에 뿌리를 내린다

 그것은 자라 나무가 된다 올리브가 열린다

 새들이 날아들어 올리브를 먹고 씨앗을 퍼뜨린다

 올리브 숲에 새들이 날아들고

 새들은 열매를 먹고 알을 낳는다

 

 불이 다시 돌아오자

 올리브 숲이 사라진 테이블

 

 접시 위에 놓여 있는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새는 빠르게 늙는다 오르골의 실린더가 한 번 회전할 때 빗살들은 몇 번의

 떨림을 견뎌야 한다 새의 등에 귀를 대면

 시간이 소용돌이치며 새의 몸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져서

 

 

 

나이트 프라이트(Night Fright)

 

 

 

 여름, 기르던 새가 죽은 걸 기억한다 평생 인간에게 길들여진 새들은 때때로 겁에 질린 채 잠에서 깨어 마구

 날갯짓을 한다 오르골의 실린더가 회전하며

 금속 빗살들을 밀어낸다 날개가 부러진 새는 손 안에서 몸을 떨었다 되돌아오며 진동하는 빗살들 나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다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소리 하나가 만들어진다

 

 푸앵카레는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세계가

 온전히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오르골이 음악을 반복한다

 피 묻은 깃털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새를 묻고 돌아

 온 저녁

  

 교회에서 사람들은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기다리다 기도가 켜켜이 쌓이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태엽은 한 방향으로 풀리며 작동한다 새장에 먼지가 하나둘 내려앉는 것을 지켜보았던 여름, 볼츠만은 세계가 종말을 맞는 수식을 발견했다

 

 볼츠만의 수식은 푸앵카레의 재귀증명을 통해 반박당한다 볼츠만은

 믿지 않는다 나는 자주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새는 빠르게 늙는다 오르골의 실린더가 한 번 회전할 때 빗살들은 몇 번의

 떨림을 견뎌야 한다 새의 등에 귀를 대면

 시간이 소용돌이치며 새의 몸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져서

 슬쩍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완전히 혼자였던

 기도 시간 사람들을 꿰뚫는 소리가 들릴 것 같던 여름, 나쁜 꿈이었을 뿐이야

 바다가 보이는 휴가지에서 불츠만은 목을 매단다 빗

 살 하나가 부러진다 나는 새의 일부만을 이해했다

 세상이 그냥 망해버리면 좋겠어요

 실린더는 움직인다

 

 푸앵카레는 세계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에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확률을 볼츠만은 견딜 수 없었고

 교회에서 사람들은 기다린다 빈집에서 홀로 주인을 기다리는 새처럼

 오르골이 죽는다 기도는 왜 소용없나요 기도를 계속해야 했던 마음, 마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도 우리가 다시 오길 기다리나요 소용없는 기도 소용 소용 소용돌이

 

 태엽을 감아 넣자 음악이 절룩거리며 오르골 바깥으로

 열린다 볼츠만의 딸이 밧줄에 매달린 볼츠만을 발견한다 부러진 빗살이 다시 부러지는 그런 기적

 새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부러진 빗살이 묵음을 만들어낸다

 나쁜 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새는 내가 마시던 물을 같이 마시곤 했다

 새는 몸을 놓아둔 채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천천히 식어가는 새의 그것을 감싸 쥐고 있었던 저녁

 

빛과 양식

 

 

 

 물컵을 엎지르자 컵 속의 빛도 쏟아진다

 바닥에 쏟아진 빛은 흔적도 없이

 물이 말라간다

 

 새는 내가 마시던 물을 같이 마시곤 했다

 새는 몸을 놓아둔 채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천천히 식어가는 새의 그것을 감싸 쥐고 있었던 저녁

 

 영혼을 증명하려던 의사는 실험 끝에

 죽게 되면 몸은 이십일 그램쯤 가벼워지고 그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결론 내린다

 과학자들은 실험상 오류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오류였을 뿐이라고

 그냥 그랬을 뿐이라고

 

 그러나 세계는 원래 오류투성이라고

 나는 쉽게 결론 내리곤 했다

 죽은 동물이 놓인

 접시 앞에서

 단지 그럴 뿐이라고

 

 우리 내부에 빛 같은 것이 있다는 믿음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 의사는

 양 열 마리를 죽였다

 그들과 우리 내부에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일들을 저지르지

 

 빛은 영원히 살고

 블랙홀 주변의 어떤 공간은

 과거와 미래의 빛이 모두 모인다

 그곳에 죽은 양들의 흰 털빛과

 나와 새가 함께 물을 마시던 유리잔에 머물던 빛도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상상해보는데

 인간은 단지

 고기로 이루어진 생존 기계라서

 영원하기 위해 영혼을 증명하려는

 오류를 종종 겪는 것뿐이라면

 

 나는 바깥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컵에 물을 따르자

 마음에 둥근 어둠이 자라났다

 

 

 

불가능한 얼굴

 

 

 

 언젠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두렵고 당혹스러워 우는 얼굴을 그려

 너에게 주었다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너는 그 컵을 간직했지

 

 플라스틱은 썩는 데 몇백 년이 걸리고

 우리가 죽었을 때 세상에 남긴 것들을 우리의 아이라고 한다면

 그 플라스틱 컵도 우리의 아이일 텐데

 

 새를 떠나보내고

 각자가 서로의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죽고 몇백 년 동안 플라스틱 컵은

 혼자 울게 되겠지

 

 아니, 플라스틱 컵은 분자화합물 덩어리일 뿐이므로 그것은 슬퍼하거나 행복해하지도 않으며

 매립지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들판에 버려진 시체처럼

 조용히 썩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그 플라스틱 컵이 정말로 울게 되는 일

 아이들이 자신의 인형에게서

 인형의 감정을 발명해 내듯

 영혼을 직조하는 일

 

 물질이 물질을 넘어서듯

 우리가 이미 죽은 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영혼을 나누어 받고

 우리가 우리를 초과하고

 

 하지만 테오, 천국에서 만자자*

 

 테오는 아마 친구의 유언을 그의 아버지에게 전해주며

 마지막까지 정말 용감했다고 말했겠지

 시신 없는 묘 앞에서 친구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가족과 조국을 사랑했다고

 추도사를 했겠지

 장례식에 참여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그 옆사람이 눈물 흘리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그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었겠지

 

 그때 그들에게 어떤 천국이 있고

 그들이 그들을 넘어서는데

 그 천국에는 병약자가 없고 유대인이 없고

 들판에서 시신이 이름 없이 썩어가겠지

 

 어떤 인형은 인형이어서

 칼에 찔리고

 산 채로 불태워진다

 

 사랑하는 일의 폭력

 사랑하지 않는 일의 폭력

 나는 우리가 천국에서 새와 다시 만날 거라 믿는데

 우리가 우리를 초과해서 다시 우리인 일

 

 얼굴이 얼굴을 가린다

 다 커버린 어떤 아이들은 인형을 내다 버린다

 

 사람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얼굴에 이목구비를 그려 넣지 못했는데

 이미 얼굴인 얼굴

 다시

 다시

 이해하기

 우리가 인형이 되어

 얼굴이 되어

 

 * 나치 독일의 전투가 조종사 하인리히 애를러(Heinrich Ehrler)의 유언

 

 

 

 

더는 부서지지 않는 곳에서 벗어난 물들이 부서지며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을 흠뻑 껴안았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부서지는 일 역시 인간의 일일 텐데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가을비가 내린다

 떨어진 물방울들의 몸이

 부서진다

 

 나는 비를 좋아하지만

 너는 아니었지

 

 결국 물이 가장 낮은 곳에 머물 듯

 나는 내 마음에 익사할 것 같은데

 방 안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나뭇가지 아래에서

 뻐꾸기가 비를 피하고

 부서진 물방울들이 한데 모여 흐른다

 물줄기가 배수구로 떨어진다

 

 물은 배수 시스템을 따라

 도시를 벗어나고 결국

 더 이상 부서지지 않는 곳에 당도하겠지

 

 우리가 다시 흙이 되고 물이 되면

 부서진 채로 배수관을 흘러가는 물방울들처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슬퍼하지 않고

 잠을 잘 텐데

 

 네가 묻혀 있는 화분에서

 죽은 너의 그림자가 자라난다

 

 비가 그치면 뻐꾸기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이미 서너 명쯤이

 내게 죽은 것 같다

 

 어떤 이들의 고통은 낮고 어두운 곳에 머문다

 

 빗소리

 물방울들이 어둠 속에서 부서지고

 있다

 

 분명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나의 영혼이 나에게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구조에 속하고

 이것은 세계의 생리이므로

 인간이 뻐꾸기의 생태를 이해하듯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불을 끄고 누워

 물방울들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생각한다

 천국이 없다면

 우리를 용서해 줄 사람이 이미 없다면

 어쩌면 좋을까

 

 자라난 너의 그림자가 나를 읽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이 우리에게 있는 일

 

 그날 꿈속에서 나에게 죽은 사람을 만나

 당신의 고통이 당신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구조에서 기인했듯

 내 폭력 역시 구조로 인한 것뿐이었다고

 그렇지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가 미워하는 이

 나를 미워하는 이

 이들 모두가 함께 사는 

 천국을 상상해 보았는데

 분리수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죽은 뻐꾸기를 입에 문 고양이가 관목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또 비가 내렸고

 일기예보에선 가을장마라고 했다

 더는 부서지지 않는 곳에서 벗어난 물들이 부서지며

 비를 피해 뛰어가는

 사람들을 흠뻑 껴안았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

 부서지는 일 역시 인간의 일일 텐데

 사람이 싫었다

 

   

 

 

<시인의 말>

내게서 그리고 문학과 언어를 포함한

모든 교환 체계에서

너를 구하길

 

설하한 시인: 2019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라면》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