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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창작과 비평』 2024년 가을호(통권 205호)에서 눈에 띄는 시: 「작고 낮은 풀꽂이」 외, (마윤지) &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2년 뒤」 외, (박상순), & ,「부리」 외, (안태운), 「식인의 세계」외 (이기성).

by 시 박스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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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낮은 풀꽂이

- 마윤지

 

 

 

  물레 페달을 밟는 너의 발바닥

  흙을 쥐는 너의 손바닥

 

  두 엄지를 넣어 네가 만든

  구멍 속

  터널. 창고. 새벽 택시. 느린 노래. 10분. 검은 바지. 강에 비치는 쇠오리

 

  두 중지로 네가 올린

  높이 속

  터널. 창고. 새벽 택시. 느린 노래. 10분. 검은 바지. 강에 비치는 쇠오리

 

  쏟아질 때까지

  달려나갈 때까지

  한쪽으로 구르기 시작할 때까지

 

  끝 밖으로

  끝 안으로

 

  네가 두드려 때린

  터널. 창고. 새벽 택시. 느린 노래. 10분. 검은 바지. 강에 비치는 쇠오리

 

  가마 속에 풀꽂이

  가마 속에 불덩이

  가마 속에

  터널. 창고. 새벽 택시. 느린 노래. 10분. 검은 바지. 강에 비치는 쇠오리

 

  불을 꽁꽁 입고서

  불을 전부 벗어나고서

  

  깨지려고

  깨지지 않으려고

  작고 낮은 너의 것이

  <  > 

 

 

고요는

 

 

 

  방향이 바뀌어 있다

  장판에 흘러 들어오는 햇빛

 

  골목에 나가 올려다보니

  옆집 사람이 팔다리를 베어놓았다

 

  이사 오던 날 저 나무에게

  날개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동네에서 저 밑이 가장 깊숙하다

 

  모퉁이에는

  새였던 깃털이

  새의 모양으로 누워 있다

 

  사진을 찍어 신부님께 보여드리니

  직박구리라고 했다

  그게 이름이라고 했다

 

  해가 기우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파랑새

  하고 다르게 불러보았다

 

  파랑새는

  아주 작은 새라는 걸 알게 된다

  처음 듣는 울음이다

  <  >

 

마윤지: 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개구리극장』이 있음.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2년 뒤

 

- 박상순 

 

 

 

    그녀는 '9.5에 1.5'래. 센티미터야. 한참을 내려왔대. 거기는 아주 높대. 그

래도 꿀벌이 있대. 검은 꿀벌이래. 작은 꽃들이 와그르르 피어 있대. 겨울엔

춥대. 높은 곳의 빙산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대. 그만큼 높은 곳에서 여기

까지 왔대.

 

    기찻길 너머 강가에서 나를 처음 봤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

기도 하고,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 기다리다가, 기찻길 건너서 강

변으로 갔는데, 강가에서 나를 봤대. 아무튼 그녀가 검은 꿀 한점을 내 혀끝

에 살짝 전해주었어. 너무 조금이어서, 그냥 꿀맛인가 했는데,

 

    나는 '9.0에 1.2'가 되었어. 센티미터야. 그녀는 까만 센티미터. 나는 하얀

센티미터. 강가에서 나는 아홉살이었는데, 그때 그녀는 스물한살이었대. 그

런데 이상하지. 내 가슴속엔 벌써 황혼이 지고 있는데, 해가 지고 있는데, 그

녀는 지금 서른셋이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내 옆에 작은 꽃처럼,

하룻밤 누워 있었어. 내 가슴속엔 황혼이 지고 있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내

마음은 '9.0에 1.2', 그녀 마음은 '9.5에 1.5'래. 나는 하얀 센티미터, 그녀는

까만 센티미터. 그리고 끝이야. 황혼이 지고 있거든. 그렇지?

<  >

 

 

밤에, 가을은 아름다울까?

 

 

 

  밤에, 가을은 아름다울까?

  밤 10시의 가을은

  아랫배가 아프다 했지, 주저앉았지

  밤 9시의 여름은 길을 떠났지

 

  9시의 여름은 맨발이었지

  별나라의 수도꼭지를 틀었지

  가볍고 짧은 옷을 입었지

 

  9시의 여름은 혼자 떠났지

  한낮의 봄은 아름다웠지

  아침 9시의 봄은 언덕을 올라갔지

  정오의 봄은 숲에서 점심을 먹었지

 

  그리고 비가 내렸지

  오후 7시의 봄은 바닥에 누웠지

  8시의 겨울이 그 봄을 찾아왔었지

  눈이 내린다고 했었지

 

  밤 10시의 가을이 수도꼭지를 틀었지

  9시의 여름은

  절벽 아래의 먼 곳에서 자정이 되었지

  달나라의 수도꼭지를 틀었지

 

  밤에, 가을은 고독의 국경선에 닿았지

  밤에, 여름은 가볍고 짧은 옷을 입었지

  밤에, 여름은 아름다웠지

  <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이 있음.

 

 

 

부리

- 안태운

 

 

 

    발견된 부리들, 수천수만개, 수각류의 주둥이로부터 입이 나왔어. 훗날

입들은 말하고 있었고, 부리는 먹지 않는 부위라네. 그러므로 온전한 형태

로 남아 있었고 발견된 곳은 무덤이라 인간이 이름 붙였고, 새의 부리에는

혈관이 있으며 물론 피가 흘렀다. 나는 눈꺼풀로 유희했다. 나를 까뒤집었

다. 부리는 돋움체와 바탕체의 분별점이라고, 나는 예전에 그에게 말한 적

있었다. 예전이 있었다. 그는 이후에 발생했다. 나는 더 이후에나. 둥지를 솎아냈고 활강했다. 나는 가로질러 걸어갔다. 나는 내 이빨을 오도독오도독씹었다.<  >

 

 

작은 미더덕 작은 미더덕

  

 

   작은 미더덕 작은 미더덕. 출수공으로 나갔다 입수공으로 들어왔다. 끝과시작을 어울렁더울렁 해보았다. 물을 흔들어보았다. 커튼을 쳐놓은 채 창문을 열면 빗물이 적셨다. 나는 작은 미더덕 작은 미더덕이었다. 나는 꼬리를감추었다. 나는 표면을 감각하고 있었다. 작은 미더덕은 둘이면 좋소. 한 화면에서 더 작아져야 하니까. 나는 둘이면 좋소. 나는 나는 내가 겹칠 수 있으니까. 유생 때 기억이 바닥에 붙어 자라났다.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작은 미더덕 작은 미더덕. 나는 할머니를 기다렸어. 나는 손주를 기다렸소.<  > 

 

안태운: 201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산책하는 사람에게』 『기억 몸짓』 등이 있음.

 

 

 

식인의 세계

- 이기성

 

 

 

  쇳소리 날카로운 빛이

  적막을 가르며 쏟아지는 순간에도

  여자는 신의 처벌을 받은 천사처럼 담담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채 무구한 눈을 깜빡였다.

  기계에 낀 몸은 신기하게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것은 커다란 접시에 놓여 있다.

  어떤 슬픔도 없이

  우리는 조용히 먹는 일에 열중한다.

  <  >

 

 

 

우리 모두의 애도

 

 

 

    시인이 죽은 뒤에 마을에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

로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이는 생각한다. 애도-죽음-애도-죽음의 회

로가 돌아가는 것 같다. 공장이 폭발하고 애도하고 기차가 탈선하고 애도하

고 죽은 시인을 애도하고······ 어린 새와 아이들 ······ 그런데 애도가 뭘까요?

    아이는 노인에게 묻는다. 노인은 이빨이 빠진 입으로 말라빠진 무를 씹고

있다. 아이는 주머니 속 젤리를 만지작거린다. 애도의 끝은 어디일까요? 애

도가 끝나면 파란 하늘을 보고 트램펄린에서 뛰어놀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아이들은 검은 옷을 벗고 새들도 애도애도 울지는 않을 것이다.

    침을 흘리면서 졸던 노인이 애도는 흰 종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

이 쓰여 있든 그걸 오래 씹으면 물렁한 무처럼 검은 비애처럼 달아진다고.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의 머릿속은 정말 백지장처럼 하얗고 어떤 기

억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의 주름진 입술이 애도로 검게 물들고

있다. 아이는 노인에게 파란 젤리를 주고 작은 새처럼 명랑하게 학교고 간

다. 새로운 애도를 배우기 위해서. 젤리가 목에 걸려 컥컥대며 쓰러지는 노

인을 그대로 두고 곧장 앞으로 걷는다.

 

이기성: 199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