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 신영배
골목이다
한쪽 둔덕에서 나무들이 쓰러졌다
그 나무들을 모두 들어낸 골목이다
음식점과 카페를 검색하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테이블을 정하고 메뉴를 정하고
앉아서
골목이다
나무들을 들어낸 후에야 나무 냄새가 나
진하게
괜히 꺼냈나 하는 말을 안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나무가 나무에게 전하는 냄새겠지
웃기도 하면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표정도 신경 쓰면서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그 골목이었던가
예전 이야기도 꺼내며
아무도 없을 거야
이후의 골목도 꺼내면서
골목은 골목들과 겹치며
골목이다 골목이다
쓰러진 나무들이 한 그루씩 들것에 실려서 빠져나갔던 골목이다
그 나무들의 줄이 삼백 미터나 되었던 골목이다
나무들이 사람처럼
사람들이 나무처럼
골목이다
나는 삼백 미터 되는 바다를 가졌어
어쩌자는 건가 하는 말도 안고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테이블 아래에 두 손을 넣고
손이 거북해서
엄지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이 골목은 향이 좋아
커피도 고르면서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빛이 좋아
이 골목은
말이 없어지고
어디론가
혼자가 되며
1물 2물 말을 이으며
말을 이동시키며
다시 골목이다
3물과 나무 한 그루가 다시 쓰러진다
4물과 5물과 6물과 나무들이 다시 쓰러진다
7물 푸른
8물 바다다
9물 10물 검은
11물 12물 13물 14물 15물
다시 바다다
삼백 미터의 바다다
1물에서 15물까지 삼백 미터를 떠간다
다시 1물에서 15물까지 삼백 미터를 떠간다
테이블이 하얘지고
다시 골목이다
찻잔이 흔들리고
다시 혼자가 되며
1물 2물
끊어지고
망가지고
씁쓸한
텅 빈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다
< >
15물
쓸쓸한 물입니다
걸어도 걸어도 두 다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물에 젖어서 이파리가 피어납니다
한 사람이 나무가 되어 길을 나섭니다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려고 합니다
전철역 입구에서 그 나무를 봅니다
계단을 따라 미끄러지는 리프트 위에서
그 나무를 봅니다
사람들이 서 있는 승강장에서
그 나무를 봅니다
전철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또 들어오고 나갑니다
문이 열리고 닫힙니다
또 열리고 닫힙니다
나무가 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두 다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물에 젖어 이파리가 피어납니다
나는 이파리-손을 하고 걸어갑니다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전철역 앞에 그 나무가 있습니다
쇠사슬로 몸을 묶었습니다
철제 사다리를 목에 걸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에
구두 한 짝이 놓여 있습니다
그 구두를 신어 봅니다
이파리-손으로 구두를 그립니다
최소한의 형태로 구두가 놓입니다
그 구두를 물로 지웁니다
계속 지웁니다
구두가 물로 넘칩니다
물로 구두가 놓입니다
그 구두를 신어 봅니다
어디로 무작정 가는 꿈도 꿉니다
기우뚱합니다
걸어도 걸어도 두 다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쓸쓸한 물입니다
15물입니다
무쉬*라고도 합니다
무쉬는 힘없이 움직이는 소리 같습니다
나는 이파리-귀를 하고 걸어갑니다
걸어도 걸어도 두 다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 무쉬: 조금 다음 날인 음력 8,9일과 23,24일. 조수가 조금 붇기 시작하는 물 때이다.
신영배 시인: 2001년 《포에지》로 등단.
비산화
- 서윤후
기후위기에서 구해주세요 팻말에 그려진
북극곰 이마 위로 반짝이 별 스티커를 붙이고 돌아서는
중학생의 운동화 코
회전축 하나가 내 안경에 빗금을 긋고 지나갈 때
목이 말라 숨길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약속한 적 없이 하늘에 대해 떠든다
기어코 고개를 들어 올려보다가
교회 첨탑 십자가 밑으로 지어진 새 둥지를 발견한다
살기로 약속한 적도 없이
슬리퍼는 언제 버리지?
그곳을 떠날 때만
느낌과 기분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치명적이야
내가 회사를 그만두던 날 네가 해준 말
목이 말라서 아무 대꾸도 없이
붉은 종아리들이 죽은 신발을 타고 걸으며
언젠가 시침질해둔
여름을 뜯으며 걷는 여름이었다
이젠 차가운 구름 솜을 덮어야겠구나
북서 태평양에 사는 틀링기족은
빙하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대
그 위에 서서 험담이나 거짓말은 하지 않는대
얼음은 진실에 가깝대
사람은 녹아갈 때마다 넘어지곤 해
맞아, 사실 지어낸 말이야
드라이기로 젖은 머리 말리며 하던 이야기
차가운 농담이 이름에 박혀 시려오면
눈동자 위를 하염없이 미끄러지기도 한다
흐리게 보일 정도로만 닦는 눈물
부축할 수 있을 정도로만 넘어짐
나의 열기를 주고 너의 냉랭함을 받는다
꼭 돌려받아야만 했던 일처럼
불이 꺼지지 않아서 내려올 수 없는 열기구 타고
작별을 근사하게 말하는 법 모르고
서로의 이마를 부딪쳐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어
한쪽 안경에 빗금을 마저 긋고 싶어
갈증의 터울을 헤아리며 걸어갈 때
내가 탔어야 했던 버스에
목발 쥔 학생이 절뚝이며 올라탄다
< >
유리가미
사람들이 물레를 돌리며 연을 날리고 있다
내 기억의 뒤뜰에 모여서
하늘과 통신에 성공한 수화기처럼 기다란 실을 쥐고
바닥을 보지 않으며 걷는 잰걸음들이 좋아
나는 실내에서 그들을 구경한다
깨끗한 습자지 한 장을 끌어안고
내 여백이 시끄러워진 기억
허허벌판 공중을 떠도는 것만은 아니다
연과 연이 뒤엉키기 전까지
다른 연의 목줄을 끊고 돌아와야 끝나는 놀이
연과 함께 날린 가미의 용도가 그렇다
사기그릇 조각이나 유리를 매달고
어떤 쪽이든 끊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빛에 굴절되어 반짝이거나
천방지축 아릿하게
미소를 지우지 못하면서 나의 뒤뜰에 모여 있는
이곳의 등장인물이 마음에 든다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려고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끊어진 연을 주우러 또 올 수 있게
방패연 나비연 가오리연 반달연 삼동치마연······ 그 사이로
나의 연은 창백하게 펄럭인다
주름을 당기며
기다린 시간만큼 실은 물레에 감겨 있어
바람을 기다린다
중심을 갖지 않으며
끊어질 각오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은 어때?
뒤뜰에는 터진 고무공 하나
물이 고인 나무 벤치
손을 떠난 연은 이제 나를 잊어버린다
지루해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각자 날카로운 가미를 쥐고서
뒤뜰 울타리 문 닫히고
여기는 아직 깨지지 않은 항아리
내 유리가미가 허공을 그은 자리마다
비 웅덩이
상철 아닌 별
없는 밤
내 오랜 파수把守의 역사가 밝아 온다
서윤후 시인: 2009년 《현대시》로 등단.
어여쁘겠다
- 권박
어여삐 여기는① 사람이 만든 글자로
어여쁜 바늘을② 추모한 사람에 대해
짓겠다
어여쁜 사람이 ······ ( ) ······ 될 때까지
짓겠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사랑을
얼굴을
이런 시는 그만 찢겠다
짓겠다
내내
어여쁘겠다③
적당한 말을 아니지만
어여쁘겠다④
꺼진 밤, 멈춘 밤,
부러진 바늘의 밤,
위험한 커다란 돌 하나 하늘에
불꽃 튀긴 전신주 젖은 전선들
얼굴과 목이 해체된 여자 있다
모든 되는 신은
불구不具하면서
불구不拘하므로
어여쁘겠다
① 『훈민정음』
② 유씨부인, 『조침문』
③ 역사役事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가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 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중략)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이상, 「이런 시」, 『이상 전집』 2, 가람기획, 2004 변주.
④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適當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人間 사람의 얼골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人間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한용운, 「님의 얼굴」,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 서정시학, 2009 변주.
해바라기
비명①, 비명②, 비명③, 비명④, 비명⑤, 비명⑥, 비명⑦, 비명⑧, 비명⑨
① 사랑에 관한 시인가요. 꿈에 관한 시인가요. 죽음에 관한 시인가요. 삶에 관한 시인가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청년 화가 L을 위하여」에서 비석에 새기는 이름을 의미하는 비명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간의 법률에 묘비에 이름을 새길 수 없는 여성들의 투쟁을 전해 들었습니다. "내 이름은 어디에? Where is my name?" 운동을 통해 출생신고에서부터 사망신고서까지 이름을 찾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을 전해 들었습니다. 비명碑銘을 위한 비명悲鳴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②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과 관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887년 8월, 파리에서의 해바라기. 바닥에. 꺾인.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 1888년 8월. 아를의 노란 집에서의 해바라기. 화병에. 장식된. 여러 송이. 해바라기. 1888년 12월 23일. 발작. 면도칼. 귀. 시간의 흐름과 관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피. 흐르는 피. 밤. 멈추지 않는 밤. 태양 덕분입니다. 깨어 있습니다. 우울 덕분입니다. 깨트렸습니다. 병원입니다. 익숙히 있겠습니다.
③ 익숙히 있을 수 없겠습니다. 들겠습니다. 해바라기를 들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해바라기를 들겠습니다. 밀실에서 거리로 국회로 검은 옷을 입고 해바라기를 들겠습니다. 익숙히 있을 수 없겠습니다. 듣겠습니다. 대만 가수 등려군의 「해바라기向日葵」를 듣겠습니다. 금지되었던 노래를 듣겠습니다. 밤에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노래를 듣겠습니다. 하나의 중국에 대만 사람들의 투쟁을 비명悲鳴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④ 회복을 기원합니다. 행운을 기원합니다. 꽃집이니까 해바라기 화분을 기원합니다. 이상합니까. 화장실에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다, 화장실에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까. 바짝 온몸을 비추는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다. 바짝 온몸을 비추는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까. 꿈에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다. 꿈에 해바라기 화분. 이상합니까. 화장실 같은 꿈이 계속돼. 이상합니다. 화장실 같은 꿈이 계속돼. 이상합니까. 이상합니다.
⑤ 사랑을 믿었다면. 찾아서 헤맸다면. 전쟁 중에 해변으로 기차역으로 설원으로 초원으로. 다다른 초원에 펼쳐진 해바라기 밭이었다면. 마구 흔들리는 태양 아래 초원에 펼쳐진 해바라기 밭이었다면.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었다면. 간절히 버렸어. 하루하루 어긋나고. 멈추지 않는 비의 밤. 영화로 남기로, 남기로. 뒤돌아 보지 않기로, 않기로. 해바라기 밭으로, 밭으로. 현실이었다면.
⑥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고, 그 밭에서 씨를 수확하고,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리기가 밭을 이루고, 그 씨에서 기름을 짜고.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고. 그 기름을 볶아 먹고.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고. 그 밭을 목숨 걸고 지키고. 무덤을 딛고 지리멸렬 피어난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고. 파괴되고. 댐. 항구. 학교. 아파트. 수도원. 발전소. 산부인과. ······· 아가들. 임산부들. 아른거리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⑦ 사랑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는데요. 보험약관을 확인합니다. 진단코드를 조회합니다. 뇌입니다. 엉키고 끊어진 거미줄입니다. 발작입니다. 흐르며 멈추지 않는 피. 거리입니다. 덕분입니다. 수도원입니다. 덕분입니다. 거실입니다. 다행입니다. 아버지입니다. 25년째입니다. 응급실내 화장실. 내 뒤에 그 여자. 해바라기 센터로 연결 가능합니까. 그리고 ······· 여자를 가리키는 경찰관들. 뒤돌아보지 않기로, 않기로. 뒤돌아보기로, 보기로, 웃는 해바라기 꽃으로, 꽃으로. 마주보기로, 보기로. 보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
⑧ 사랑할 필요가 있을까요. 답할 수 없습니다. 결혼할 필요가 있을까요. 답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답할 수 없습니다. 결혼의 규범과 사랑의 윤리와 여성의 자유에 관한 시인가요. 답할 수 없습니다. 미완의 시. 그게 현실 아닐까요. 죽은 사랑의 묘비를 남편과 함께 세우는 시. 비명碑銘을 위한 비명悲鳴의 시. 벗어난 시. 싸우는 시. 침범한 시. 실패한 시. 알아주는 사람 없는 시. 그게 보통 아닐까요. 떨어야 할 까요. 떨쳐야 할까요. 문답하겠습니다. 부처夫妻가 불체不逮에서 불체不體가 될 때까지. 추도는 유보하겠습니다.
⑨ 이 시 역시 유보하겠습니다.
권박 시인: 201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작노트가 인상적이다. "짓는 사람은 찢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