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빛
-엄시연
00.
시간은 길을 잃은 지 오래. 눈을 떠도 잠이 왔고 눈을 감아도 잠이 왔
다. 초인종을 뜯어놔도 귀에서 벨이 울린다. 밀린 잠은 보름을 새도 갚
기가 힘들었다. 나에게 맡겨진ㄴ 글들이 너무 많았다. 잉태의 의무 무거운
데 잠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계속. 수천 번째 지속되는 날들.
하지만 이제는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기까지 모든 게 다
시 시작되기까지. 아직 나에게 남은 것들이 많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분출하는 감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이건 한 번만 봐 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손가락을 부드럽게 꺾어 나를 깨워주세요. 내겐 고통이 필요해요.
수면제도 푸른 소금물도 커터칼도 붉은 잉어 고기도
모두 소용이 없었어요. 나는 더 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더
주세요. 더. 입으로만 남았어요 나의 욕구. 나는 원해요 갈급해요 마려
워요
고통
파세요? 되는대로 고통을 사들여도 늘 모자라요.
모지라, 그만 정신 차렸으면 좋겠는데 죽지 않아요 멍청함이 이년이,
지났고 내 몸에 동백꽃이 활짝 피고 지는데 아직도 죽지가 않습니다.
지금이 겨울인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핏방울
내 팔은 동시에 붉고 동시에 파랗다. 녹지 않는 나의 친구, 끝이라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우리는 왜 끝을 기다리고 있는거지, 암막 커튼 사이
로 침입하는 남의 새벽빛...... 블루, 너는 끝없이 우울하다, 이중국적의
소녀야,
무슨 꿈을 꾸고 있어?
상상해도 아픈 꿈...... 깨어나도 아플 꿈......
이불 밑이든 이불 밖이든 맞아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우리 육체의 방향뿐. 푸르거나 붉어야만 하는
나를 알아?
허락되지 않은 블루
아아
나에겐 네가 없어
괜찮아
너에게도 내가 없어
아아
강인한 영혼은 나약한 육체로부터 만들어진다.
사회가 나를 뭐라고 불러도 소용없어. 아름다운 홍학, 권태로운 블루
탱, 잔다르크, 혹은 블루 블러드.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어차피 전부
내가 아니며 동시에 전부 나란 말이야. 아아 빌어먹을 다 상관없다고.
소녀야, 너의 신체로 너의 이름을 부른다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통받는 나의 바이올렛Violet....]
내리쳐도 무너지지 않는 여름날의 하늘......
될 때까지 반복할래.
뒤섞이는 조이트로프,
사랑스러운 나의 친구들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폭력이야.
러브 앤드 피스 따위
조각조각 박살내버릴 만한 크고 단단한 빠루
과거는 과거에 두고 멀리 멀리 떠나라
나를 깨워 줘
나 를깨 워줘 나 를 깨워 줘 나 나
나를 나 를 나를나를나 를나를 나 를나나나나 나
깨워 줘 깨워줘 깨워 줘깨깨깨깨 깨
깨 워
줘
부서지지 않는 유리창.
나는 탄환이 필요해요.
엄시연 시인: 2024년 《현대시》로 등단.
일지 1
-처음의 기록
- 이실비
아직 살만한 가 보다.
아침마다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그건 환청이다. 운전할 수 있는 차도
사람도 없는데, 시동 걸리는 소리. 깜빡 눈 감았다 뜨면 낯선 광경으로
돌진할 것 같은 소리. 시시각각 창밖이 새벽 아침 오후 저녁 밤으로 바
뀌는 소리. 목격한 창문의 색깔마다 하나씩 다른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그 이름들을 정성껏 불러주며 창문을 깨부수고 싶다. 쏟아지는 유리 파
편 얼굴을 베어가는 유리 파면에 비치는 무순한 입술. 웃고 있어.
웃고 있어?
도서관 뒤의 공원은 점점 더 깊은 숲이 되어 간다. 먼 곳을 응시하면
가까워지는 게 있을 것 같아 자꾸만 멀리 봤다.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는 버섯이 있다. 조용하게 포자를 늘려가는. 옆으로 쓰러진 전나무를 뒤
덮는 버섯 무리.
조금씩 이쪽으로 올 거야.
시간이 걸릴 거야.
도서관이 버섯에게 먹히면 어떻게 될까.
이곳에 처음 왔던 날에
나는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 먼지 쌓인 서가. 낯선 창문. 창문에 걸터
앉은 뒷모습. 폭격이 지나간 마을. 나의 뒤척임에 놀라며 칼을 드는 한
사람.
말하지 않은 게 있었어.
칼을 가진 사람이 내게 칼을 겨눈 순간,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다고.
생존이란 걸 모르고 지냈을 땐 그렇게 욕을 달고 살았으면서
이제는 누구라도 만나면
좋은 말만 해주고 싶다.
불만과 욕설이 가득한 일지는
적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 일 층에 걸린 그림만 봤었지.
유성 물감으로 칠해진 심장. 두근거릴 때마다 조금씩 갈라질 것 같았
는데. 살아 있는 것 같아 좋았는데.
이제야 적기 시작한다.
썩기 직전의 자두나무에 대해.
바닥에 깔린 꽃잎을 누렇게 죽죽 밟으며 자두의 깜깜한 얼굴을 함께
베어 물던 사람에 대해. 그는 이제 이곳에 없지만, 그와 나누었던 먼 이
국의 소매치기 이야기가 남았으니까.
그 소매치기는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쓴 편지를 훔쳐 간대.
훔쳐서 어떻게 하는데?
그 편지에 있는 문장 중에 가장 상냥한 문장 하나를 오려간대. 그리고
그 편지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대신 보낸대.
가장 상냥한 문장 하나가 지워진 그 편지를 기다리면서.
이실비 시인: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네 지네는 아름답다
- 이정화
너는 그게 꼭 아름다운 자두나무인 듯이 말한다
눅진한 진물을 닦아낸 기억이 없는 너는
스치는 순간마다 눈감은 적 없는 너는
자두를 베어 물 때
입술을 따라 흐르는 과즙을
곧 피어날 연둣빛 새 잎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 속엔 딱딱한 씨앗
깊게 베어 물 때 앞니를 긁어
몸 안쪽으로 털이 돋게 만드는
지네는 그런 것이다
온몸을 기어다니던 지네가 몸을 눕히자
네가 지네의 등을 쓸어내린다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
모든 게 사라질 것만 같은데
징그럽게 긴 몸
물살에 휘말려 흔들리다가
네 말대로 아름답게
끝을 맞이할 것도 같은데
눈을 뜨면 손등엔 조금 더 붉어진 지네가 몸을 틀고 있을 뿐이다
몇몇의 생물은 변장한다
잎이나 나무에 붙어
자신의 이름을 버리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너는 이 붉은 지네가 여전히
내 속에 잡초를 뜯어먹고 산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긴 더듬이를 움직이며
거친 흐름의 몸으로
지네는 향한다
눈 밑 깊숙한 고요
닿지 않는 저편
나무 한 그루
떨어진 자두의 벌어진 상처에
이름 없는 날벌레들 몸을 적신다
지네는 내 몸을 비집고 나가
떨어진 자두 안으로 파고든다
네 상처는 아름다워
너는 내 손등에 있는 지네 같은 흉을 감감히 만져준다
이정화 시인: 2023년 《문학동네》로 등단.
식사食思
- 장대성
문을 열었다 죽은 동물의 배를 가르는 티브이 속 부족민처럼 먹기 위
해서는 무언가를 열고 속을 꺼내야 해서
문 사이로 팔을 깊게 집어넣었다
좌우로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것이 없고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만큼 한숨을 쉰다 먹으려면 일을 하고 일을
하려면 먹어야 하는데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겠어
닭과 계란 처음과 끝 낮은음과 높은음...... 배고픔이 생각을 밀고 가
는 동안
부족장이 썩은 내장을 한데 모아 태우는 장면 손에 손잡고 기도하며
춤추는 모습 작은 아이의 목걸이에 툭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태우면 태울수록 연기는 검게 솟아올라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아는 사람도 저렇게 사라졌던 것 같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말하며
안방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누렇게 물든 벽지에 등을 붙여 앉으면 벽지에 스민 기억이 몸에 밴다
잘 익은 김치 냄새가 방에 퍼지고 등 좀 밀어줘,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
두고 으쓱거리던 어깨가 떠올라서
데리러 갈 수 없는 먼 거리를 헤아리며 팔을 힘껏 뻗는다 겨드랑이 안
쪽까지 닿게
닿다 못해 뭉개지도록
아침을 아픔으로 착각하던 날을 지나
배고픔도 아픔이었다는 생각 너머
어느새 밤이 되어 부족민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시간에 계속된
다는 자막을 끝으로
나는 쌀을 씻어 안치고 흰 연기와 함께 밀려드는 밥 냄새를 맡아야
한다
팔을 꺼내고 문을 굳게 닫는다
손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물방개가 발밑을 기어나간다 이제야 무언가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장대성 시인: 2024년 《파란》으로 등단.
체인질링
-추성은
신이 버리고 간 세계의 배경은 습지였다. 전기가 흐르는 나선 모양의
버섯이 자랐고 늪에서는 악어가 사람을 포식한다는 괴담이 즐비했다.
모든 사람이 녹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초록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붉은색 전조등만이 사람들을 안심시켜주었
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정지해 있었다.
그들에게 공포는
논리 있는 질서가 되어 있었다.
악어는 고능한 생물이었다. 언제 재앙이 닥쳐올지 잘 알고 있었다. 늪
지대와 수풀을 기어 다니며 가끔 사람을 포식하고 가끔은 알을 낳았다.
알을 애지중지 키우기도 했으나, 가끔 알을 깨트리며 놀기도 했다. 악어
는 고능한 생물이므로 유희하는 법을 알았다.
신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금기나 공포를 만드는 건
너무 쉬웠다.
그래서 악어를 풍경의 일부로 조성했지만, 늪에 깃드는 건 백자 같은
천사도 투명한 뿔을 가진 말도 아니었다. 대신 큰 잎사귀에 누워 잠드는
아이나, 악어가 물고 간 아이가 죽지 않고서 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야
기가 있었고. 그건 건 누군가 감지할 수도 있었지만. 깜빡거리는 빨간
불빛 아래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잊히고 말았다.
추성은 시인: 202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짐
-한백양
나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유리문 너머
그림자 속에 도사린 개들이 뛰쳐나오고, 그들을 기다렸던 구름 속 문
어 괴물이 선명해진다 서로에 대한 잇자국들이 맞물리지만 아무도 놀라
지 않는
문밖의 규칙적인 광경을 이기지 못하고
내 의심은 말해버린다
나, 좀 이따가 나가면 안 될까,
문 안쪽에서 아직도 웃고 떠드는
사람들은 들어주지 않겠지만
나는 손이 부족하게 태어난 거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하려고
태어났으면서 손은 두 개뿐이라서
햇볕의 무수한 촉수를 빌리고 싶은데, 나갈 수가 없었다
문손잡이를 잡을 손이 없었다
종이에 베이면 손이 늘어나는 꿈을 언제까지 결핍이라고 할 거니, 안
쪽으로 내지른 소리가 안쪽이 아니라 공중화장실에 쌓여갔다 진짜 급하
면 거기 들르라고, 간만에 만난 친구에게 당부했지만, 그가 절대로 들르
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그가 내게 친구의 결핍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화장실에 문이 달리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지 않았다
너도 당해봐, 너도, 너도 죽지 말라고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오줌 얼룩
경첩 흔들림도 없이 들어선 사람들, 언젠가 내 안을 파내어 집을 짓겠
지, 그들이 들여놓은 가구들이 어색해서, 나는 웃으면 안 될 때도 웃어
버리겠지, 죽은 사람 얘기를 할 때, 생명선이 중간에 끊어졌다는 말을
들을 때, 그런데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거냐고
사람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물어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있잖아요,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고 누워서 하는 거, 있잖아요, 옆집
에 살았던 예쁜 사람이 뺨을 얻어맞는 거, 있잖아요, 한 번도 문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은 당신이 예쁜 사람의 시작과 끝을 다 기억하는 거, 있
잖아요, 지옥에게 이목구비가 있다면 개를 닮았을 거고, 개를 앞세우는
산책에서 당신이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걸 아무도 지적하지 못하는 거,
있잖아요, 풍화되지 않을 거면서 매번 달라졌다고 말하는 거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에게 손을 가변적이다
들어줄 수 없는 것들을 말해야 할 때마다 나는 조금 느려지고, 때때로
어깨가 부딪쳤다고 덩달아 느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착한가, 착
한가, 삐뚤게 말해도 느려지는
그들에게
나는 오줌 방울만큼의 관심도 없다
지하철 환승 통로 한복판에 서서 몸을 떨던 사내에게만 관심이 있다
어디에도 문이 없는데 그가 여닫혔고, 알아차렸거나 정말로 몰랐던 사
람들 모두 바쁘게 움직였지, 화장실은 왜 멀리 있고, 신발 앞코로 다가
온 투명하고 노란 물은 가까울까, 신발을 가로질러 흘러가 버린 색채들
이 어디서 자유를 포기했을지 생각하는
그거, 너잖아,
대답할 수 없는 내가
문 앞에 있을 때
쓰다 남은 파스타 면을 떠올리고, 지붕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발자국
을 떠올리고, 생활을 생활처럼 떠올리면서도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가끔, 아니 가끔, 이라는 건 없다
문 안쪽의 사람들
짐을 내려놓는 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걸 훔쳐보면서도
나는 왜 결핍이 이상하지 않을까, 한쪽 어금니로만 씹은 껌에 납땜한
금이 달라붙어서 뱉어질 때
노을이 엉긴 바깥은 노을이 침범한 안쪽이 훑고 있었다
끝날 때에는 모든 괴물들이 깍지를 낀 채 무대 바깥으로 흘러가곤
했다
그러려고 태어난 거야, 들어주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해
유리문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을 던질 손은 있구나, 웃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돌을 받아내는 손
한백양 시인: 2024년 《동아일보》,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