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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현대시』 11월호-2024년 등단 시인 특집 1부: 「다락의 노미」(구윤재), 「죄수의 방」(김유수), 「생츄어리」(김진선), 「세상에 없는 아이」(명재범), 「흔痕이 연혁」(문지아), 「고백」(안중경).

by 시 박스 202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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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의 노미

- 구윤재

 

 

 

    노미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된 노미를 모두 어려워했다 노미는 여

전히 노미일 뿐인데 노미는 자신에게 연결된 투명한 줄을 잡았다가 놓

았다 노미가 장난을 치면 모두 난감해하네 그래서 노미는 슬퍼 노미는

쓸쓸해 나는 노미의 곁에서 노미의 손을 잡았다가 놓쳤다 노미의 손은

차갑고 노미의 손은 돌아가지 않는 문 손잡이구나 노미는 여전히 궁금

한 게 많은 노미일 뿐인데 아무도 노미의 궁금함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

저 노미에게 건강하라고 건강하라고 투명한 줄을 노미에게서 빼앗으며

이제 노미는 건강할 수 없는 노미구나 그렇게 노미는 상자가 된다 나는

상자가 된 노미를 품에 안고 놓지를 않았는데 어느 날 잊어버렸고 잊어

버렸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렸고 노미는 다락방의 노미가 되어 여전히 투

명한 줄을 길게 늘였다가 놓는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노

미를 발견한 날엔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 나는 습기 찬 다락방에서 쭈글

쭈글 우거진 노미를 본다 보고서야 내가 너무 오래 노미를 잊고 살았구

나 노미를 만지면 노미는 차갑고 노미는 축축해 나는 드라이기를 길게

늘여 노미의 머리카락을 말려준다 말릴수록 상자에 주름이 지고 노미가

하얗게 바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노미는 뭐가 좋은지 낮게 흥얼흥

얼 노미야 그건 무슨 노래야? 바람 사이로 질문이 흘러가면 노미가 몸

이 가벼워진다는 걸 노미는 알고 있을까 바삭 마른 노미는 이제 더 말릴

것이 없구나 가벼워진 노미가 숨을 늘였다가 놓는다 하여간 못말리는

노미 나는 노미가 짓궂을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싶다 노미는 단정하게 닫

혀 있다

 

구윤재 시인: 202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죄수의 방

- 김유수

 

 

 

  감옥에 온 뒤로 감옥을 보았다.

 

  그러나 배식이 오고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감옥에 온 뒤로 바깥이 있었다.

 

  출소하니 아무도 없다.

 

  아주 옛날에 아내 있었을 때 같이 목침 베고 누워 있던 아침에 아내는

항상 동물농장을 틀었다. 저런 아이들을 가지고 싶다고

 

  아주 옛날에 대학 근처에 같이 상경한 친구 놈과 살았을 때 추운 겨울

에도 맨손으로 속옷을 빠는 친구 놈의 뒷모습이 생각이 난다. 군대에서

도 복학해서도 항상 달고 다니던 그놈. 속옷은 세탁기에 빨아서는 안 된

다고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오늘은 방에만 있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화요일 저녁에는 시장에 다녀온다.

 

  목요일 밤엔 재활원에 간다.

 

  오늘 밤은 안 마실 것이다.

 

  가끔 밤을 삼킨다.

 

  자주 약 먹는 것을 빼먹지만

 

  심각한 지병은 없다.

 

  윗집에는 주인 할머니가 산다.

 

  아랫집엔 사이좋은 모녀가 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김유수 시인: 202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생츄어리

-김진선

 

 

 

  누구나 마음속에 사람 하나 품고 산다

 

  이 말 들은 뒤부터 살게 되어버렸나 인사를 했네 엿보았네 포수는 총

을 내보이지 않고도 상대를 장악하는 재주가 있다

 

  참으로 가엾구나

 

  툭 뱉은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발각되는 짐승처럼 나는 슬픔의 인

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두가 안전하고

 

  누군가는 마음속에 문지기가 산다고 아니, 한참을 살았다고 했네 지

켜내거나 쫓아내거나 포수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모두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다니

 

  밤낮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비밀이 되지 않았다

  대신 그때 생겨나는 어떤 상심이 어떤 수치가 비밀이 된다

  우글거리는 수풀 뒤로 숨을 필요가 없는 곳

  덫의 생김새를 모르게 되는 곳

  용기의 배후가 되는 곳에서

 

  포수의 고충이란 영영 방아쇠를 당길 일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과녁

은 사방으로 쓰러지고

 

  죽기로 작정한 순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게 마음속 사람이라면 더더욱

 

  모두에게도 그런 순간은 온다니

 

  작은 소요처럼 속임수처럼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할 때 내가 먼

저 울게 된다는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상심과 어떤 수치 속에서 나는 잠시 쉬었나

 

  순서 없이 푸른 능선을 달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안내자가 될 수

도 있었을 텐데

  그럼 그때 아주 먼 풍경으로부터 총성이 들렸으리라

 

  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되었습니까 물어보지 않는다

 

  참으로 가엾구나

 

  나는 내 마음의 주어가 되지 못한다니

  마음이 하나 이상인 것도 몰랐다니

 

  그러나 이곳에서는 모두가 자꾸 살고만 있었다

 

  겨누었네

  내가 책임지는 것이었다

 

김진선 시인: 2024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세상에 없는 아이

-맹재범

 

 

 

  우리는 백 년 간격으로 태어난 쌍생아였다

  너는 백 년 동안 살아와서

  사라지는 수많은 엄마들을 보았겠지

  너는 너의 백 년처럼 사그라지는 불빛을 보고

  나는 나의 백 년처럼 마른 장작을 던져 넣었다

  우리, 참 닮았다

  자세히 보면 다를 거야

 

  우리는 엄마를 공유하고 물을 공유하고

  빗방울이

  강이

  실은 수없이 바다에 다녀와서

  있었지, 엄마

 

  인적이 끊긴 모닥불 주위에

  너랑 나랑 남아서

  너는 이제 불 속으로 들어가도 되겠다 하고 

  나는 너를 건져낼 생각을 한다 불이 타는 동안

  배가 불룩해진 엄마들이 병원에 실려 가고

  너는 백 년 동안 살아와서

  태어나는 수많은 엄마들을 보았겠지

 

  우리 같이 있었다 너는 아름다워서

  너에게 등을 내주면

  귓속말에서 자꾸 파도소리가 들려

  물방울들이 후둑후둑 떨어지다 쏴 하고 쏟아지기 시작할 때

  방금 출산을 마친 엄마가 강보로 싼 물방울들을 안고 와서

  불을 끄고

  이불을 깔고

  머리맡에 앉아서 우리가 잠들 때까지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도 잘 자고 있을까 이마에 열이 좀 있어서

  너는 잘 자고 있을까 생각하면

  옛날에 너랑 똑같이 생긴 엄마가 있었는데

  엄마, 내가 어떻게 보여?

  흐르고 있지

  영원히 일렁이고 있는

  바다 속에서

 

맹재범 시인: 202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흔痕의 연혁

-아무 밤의 찰나적 악몽

 

-문지아

 

 

 

    알 수 없는 묘연한 것들이 부재의 기미로 다가오는 그런 시간 그믐에

어울리는 형체를 걸친 달은 교교한 태도로 이 모든 상황을 곁눈하고 있

다. 이미 완전하게 죽은 사람들이 히죽거리며 헐렁한 걸음으로 죽어가

는 후임들을 배웅하고 있다. 다 죽은 사람들이란 바쁠 게 없지. 하루라

는 시간이 습관적으로 저항 없이 지나가는 과거로 다시 한 번 부식되어

가는 밤이다. 멀리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옅게 옅게 풍겨오는 그런...

지극히 안개 적으로 희붐해져 오는

 

    한 꺼풀 한 꺼풀 어느 날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는 전생이 되어 분위

기를 정성스레 벗기 시작한다 습관처럼 한 손이 다른 손을 포개어 감싸

쥐고 하루치의 용기를 애써 쥐어 짜내며, 앉을 주인이 없는 늙은 나무

의자들을 줄 맞춰 세워본다 의미를 배설해 낼 수 없는 창문들이 스스로

함구하고 제 몸에 드러나는 시절의 흉터들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한다

멀리서 창공을 벗어난 노란 새의 추락이 보인다 삶을 잃어가는 초점 없

는 눈이 오래도록 마음에 와 박힌다 무음의 진하고 독한 메시지가 어느

날 무심코 날렸던 부메랑처럼 천천히 돌아와 가슴속에 박힌다 일종의

복선이 되어지는 걸까 너무나도 낯이 익은 아무 날 아무 때의 랑데부 같

은.

 

    어둠에서도 매끄럽게 빛이 나는 돌들이 있었다 앞엔 무엇이 펼쳐져

있어도 상관없을 거야 그저 바다여도 혹은 그저 강이어도 그마저 아니

면 그저 호수라도 말이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웃으며 집어 들

고는 하나씩 하나씩 삼켜 넘기고 있었지 조그맣고 하얀 매끄럽게 빛을

밭아내는 그곳의 돌들을 말이야 뚝뚝 일정한 반죽을 떼어낸 동글동글

손바닥 위에서 정성스레 새알심을 굴려내던 어린 시절 엄마의 얼굴이,

엄마의 땀방울이 떠오른 건 아주 잠시였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귀

한 걸 받아먹듯 우리는 천천하게 천천하게 다시 천천하게 그것들을. 아

주아주 매끄럽게 식도를 쑥 타고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가는 건 통쾌하

고 기적과 같은 일이었어. 그 흔한 상흔조차 없이 뜨뜻미지근한 것은 아

무것도 역류하지 않더라

 

    얼마나 삼켰을까 까맣던 주위가 빛처럼 퉁퉁 불고 나는 미래에 폐기

될 낡은 기타줄처럼, 너는 기타처럼 손을 맞잡았나, 하얀 돌들이 돌에

대한 상상처럼 계속 쌓여만 갔지 이건 영혼의 머리? 꼬리? 나도 모르고

너도 몰라 그런데 왜 아무도 죽지 않을까, 훈 내가 물컹하도록 딱딱해진

다. 내가 삼킨 것들의 형태가 나보다 더 안기 좋다. 안고 머리를 비비기

좋아 훈아, 우리는 꿈속에서도 사람이었는데, 왜 물속에서도 늪 속에서

도 살 수 없었나 먼지들만이 밤의 굵기를 측량한다 너의 빗변은 나의 신

 

    깜빡 잠든 사람의 손가락이 밤새도록 누르고 있는 스페이스바처럼

실외가 멀어져 가는구나

 

문지아 시인: 2024년 《시사사》로 등단.

 

 

고백

- 안중경

 

 

 

 

  꽃은 하늘을 날고 싶어

  얼굴 속으로 하루 종일

  햇빛을 모았네

  뒤통수로는 비를 맞았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여름내 기다렸네

 

  피고 또 피었네

  가느다란 끝에서 숨을 쉬었네

  꽃은 하늘을 날고 싶어

  얼굴 속이 점점 깊어졌네

  목구멍이 검게 타올랐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기다리고 기다렸네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안중경 시인: 202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