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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현대시』 2024년 9월 호에서 눈에 띈 시: 「불현듯 짐승이」 외 1편(최문자), 「월요일」외 1편(이원), 「동양화」외 1편(고명재), 「찬장의 시」외 2편(안희연).

by 시 박스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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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2024년 9월호 표지

 

 

불현듯 짐승이

최문자

 

 

 

 

  사람들이 당신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했지만

  나는 당신이 자꾸 사람으로 보여

 

  가끔

  당신한테서 툭툭 튀어나오는 짐승

  나는 사람만도 못한 그런 짐승이 좋아

 

  그 짐승

  그 짐승을 찾으러

  당신의 뒤로 가서

  더 뒤로 가서

  당신을 바라보았어

  도대체 어떤 짐승이길래

 

  불현듯

 

  당신은 말했어

  사람으로 가는 구간 구간 그들이 서 있어

  짐승이 너무 많아

  짐승이 자욱해

  사람으로 하다가

  사람이 부족하면

  짐승으로 하다가

  짐승이 부족하면

  짐승만도 사람만도 못해졌어

 

  어느 날

  당신은

  이미 눈물이 말라 있고

  흘러넘치는 사람의 전원까지 꺼버리고

  개처럼 뛰어다니는 당신을 보았어

 

  긴 줄 끝에 텅 빈 자리

  사람의 폐를 숨기고 거기 서 있는 당신을 뭐라 부를지 몰라

  <  >

 

 

 

이응의 세계

 

 

 

    침묵할수록 입술은 이응처럼 순한 발음이 필요했어 창밖에는 내다

버릴 발음으로 가득한데 나무들은 그대로 자랐어 거대하게 이응을 빼버

리면 난 쓸 말이 거의 없어 이응의 세계는 한없이 부드럽지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응 이응" 여러 번 소리 내서 읽어봐 나무가 보여 터지고

싶은 풍선 사이로 헤어지기 싫은 마음도 생겨

 

    너와 나 사이 헤어져야 살아나는 것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알을 까

고 있는데

 

    어제저녁 개미들이 이응같이 생긴 둥근 빵을 물고 돌아왔어 물고 온

분홍 꽃잎들이 개미들이 나를 함부로 건너다녔어 새끼 개미가 물어도

내 피는 둥그렇게 엉겨 있었지 종일 사람들이 꾹꾹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다가 발자국이 되었던 발등은 무겁다가 그냥 슬프다가 이응 같은 자

국이 생겼어 이응은 상처까지 둥그랬어 하다 포기한 생각처럼

 

    저녁 8시 이응이 아닌 개미들에게 끝, 끝 하고 말했어 물고 뜯는 것

도 끝만 남았지 불이 꺼지지도 켜지지도 않는 거실에서 이응의 세계를

시로 썼어 주로 이응같이 생긴 사람들이 읽어줄 거야 이응이 이응 밖으

로 흘러 나가고 있었어

 

 

최문자 시인: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월요일

이원

 

 

 

  미술관이 문을 닫는 날

  박물관도 문을 닫는 날

  12세기 그릇은 21세기 어둠에 잠기고

  울고 있는 여자는 눈물 한 방울에 갇히는 날

  새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목소리를 꺼내는 날

  목소리는 들리는데 새들은 못 보는 날

  시장은 문밖에 과일을 진열하고

  벽 안은 다시 와글거리는 날

  벽은 단단해지고 창은 더 단단해지는 날

  어깨도 부딪쳐도 놀라지 않는 날

  그림자는 몸을 잊지 않고 몸은 그림자를 잊는 날

  예배당이 텅 비는 날

  유모차를 탄 아가들의 두 눈이 흰 천에 가려지는 날

  침대에 벗어 던진 안경이

  꽃집 앞 화분이 흠뻑 햇빛을 맞는 날

  공동묘지 입구에 초록 물뿌리개들이 모여 있는 날

  죽은 사람에게 쓴 편지를 들고 우체국에 들어갈 수 있는 날

  거리가 허공을 조금씩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날

  싱크홀과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구분되지 않는 날

  얼음처럼 내내 자신의 밖에서 녹는 날

  도시가스 점검이 시작되는 날

  빛이 과도하면 검정이 된다

  구름은 자꾸만 제 몸을 지우는 날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수풀 속 웅크린 고양이의 눈과 마주치는 날

  너무 많은 삶들

  사랑과 유머를 돌로 손에 쥐어보는 날

  다른 사람과 손을 바꿔 끼고 회전문을 계속 도는 날

  다른 머리를 집어 들고 회전문을 나서는 날

  막 출발하는 배달 오토바이에 던지고부터 보는 날

  동그랗고 은은한 것을 다 달이라고 믿어보는 날

  <  >

 

 

우정의 방식

 

 

 

  여름이 되자 친구들은 뿔불이 흩어졌습니다

  친구들이 새떼처럼 느껴진 것은 처음입니다

  허공과 겹친 순간이 있었던 것일까요

  검은 몸 검은 날개 사이로 보인 것은 아직도 어린 부리입니다

 

  짐짓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꼭 붙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혼자가 혼자를 들며 날아오르는구나

  몸은 몸을 들어올리느라 중력을 잃어버리느라

  까매지는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구나

 

  겁나는 부리까지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이

  거기에 눈길이 닿았다는 것이 나의 애간장이었습니다만

 

  어디에서 신호가 온 것일까요

  친구들은 동시에 흩어졌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혼자 남아 있을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요

 

  뿌리째 파 올려진 나무처럼

  나도 모르게 낯선 곳으로 실려 온 나무처럼

  잎은 산발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잎처럼

 

  그런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잎들이 내는 소리를 고스란히 듣는 귀였다고 할까요

  듣는 귀가 아니라 소리를 내는 귀였다고나 할까요

 

  소리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버석거림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부서지면 어떡합니까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나뭇잎들 말이에요

  아니 소리들 아니 심정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나뭇잎들 말이에요

 

  떠난 자리는 동그랗고

  남은 자리도 동그랗고

 

  나는 

 

  친구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귀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검은 새떼는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내가 멈추어 있는 여기까지

  파도 소리가 들려왔어요

 

  파도는 밀고 밀며

  물은 놔두고 왔어요

 

  보이지 않는 파도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새들이 저기쯤에

  친구들을 찾을 수 있다면

  팔을 들어 그 곁으로 날아가는 시늉을 하게 되었는데요

 

  수영하는 동작처럼 보였던 것일까요

  지나가던 한 사람이 코를 막는 시늉을 해 보였습니다

 

 

이원 시인: 199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동양화

고명재

 

 

 

  캔버스에 유채 린넨에 아크릴릭

 

  광목에 숯과 모래 승복에 명주실

 

  이마엔 입술

 

  어른 손에는 아이 손

 

  꽃술에 꿀벌

 

  천둥 여름의 소나기

 

  바짓단에 빗물 죽고 싶은 마음들

 

  들풀에 들불 거친 대지와 여름풀

 

  종아리 생채기 정강이 술 취한 어린이

 

  산소에 양팔 가슴 막걸리 목소리

 

  손끝에 잔디 거친 궤적의 여름풀

 

  귓가에 소식

 

  귓속에 먹과 숨과 재

 

  왜죽어왜죽어어떻게날두고죽었어

 

  아이와 불상

 

  빈혈과 여름

 

  충혈과 벌목꾼

 

  손찌검 부처님 부처님 빌었던 손바닥

 

  처마 햇빛 땀띠 갈증 그을린 기와

 

  강렬한 빛 아래 손차양을 해줬지

 

  그늘에 숨어 울었네 어린이 동굴이 되었네

 

  대웅전 바닥엔 고요 날뛰는 단청

 

  엎드린 뒷모습 범종 절하는 사람들

 

  뿌리처럼 절하는 절하는 엎드린 사람들

 

  중천엔 아무도 없네 지문만 묻어

 

 미술관에서 손가락으로 그림을 찌르네

 

  우르르 가슴에 경비원 내달려 오네

 

고명재 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목차

 

 

 

안희연 시인이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시 3편

  찬장의 시

 

 

 

  어느 날, 너는 왔어.

  반으로 갈라진 접시를 양손에 들고서.

  이어 붙일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지.

  이왕이면 깨진 자리를 황금으로 메우고 싶다고도.

 

  나는 고개를 저었어.

  주소를 잘못 찾아왔군요. 나에게 그런 재주는 없어요.

  나는 깨진 자리는 또 깨지게 되어 있고 다시 깨질 땐

  더 처참히 부서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인 걸요.

  친 어깨의 만델린,

  너의 흙빛 얼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너에게 차를 한잔 청했어.

  나에게는 오래된 찬장이 있고

  찬장을 열 때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는 동작을 좋아했으니까.

 

  아끼는 찻잔은 왜 깊은 곳에 있을까요.

  손을 뻗을수록 뒤로 더 뒤로 밀려나 버려서

  결국 의자를 가져와야 했어.

 

  이것 좀 받아줄래요?

  의자에서 내려오는데 중심을 잃고 휘청했어.

  나의 무엇이 꺼내진 걸까. 물을 데우며 만델린,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끼의 촉감을 닮아 있었지.

 

  찻잔이 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한참을.

 

  아까 당신의 찬장이 열렸을 때 말이에요 ··· ···

  내 이름을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만델린. 알칼로이드 발색 시약을 뜻해요.

  그래서인지 나는 늘 한 방울로 존재하는 기분이 들어요.

 

  창 너머 하늘의 색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코바늘을 들고 두 개의 시간을 엮는 자 누구인가

 

  혼자 열고 혼자 닫던 찬장은

  이제 없다.

 

  멀어져가는 만델린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막 지상에 착륙한 비행기처럼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지만

  무엇을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는 몰랐다.

 

 

 

폭발음으로부터

 

 

 

  실을 쥐면

  여름의 풍속이 느껴진다

 

  흘러왔구나

  흘러가고 있구나

  하는 실감

 

  실을 쥐면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방금 돌아눕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당신은 벽 뒤에

  어쩌면 벽 뒤에

 

  실을 쥐면

  매듭을 지어 한 시절을 떠나보낼 수 있다

  매듭과 매듭 사이에서 숨을 고를 수 있다

 

  실을 쥐면

  마른 땅에서 비를 기다리는 사람과

  빗속에서 마른 땅을 기다리는 사람

  쌍둥이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게 되고

 

  실을 쥐면

  어두운 색 공들 사이로 밝은 색 공이 날아든다*

  덤불 속에 손을 집어넣을 수 있다

 

  나는 이 실을

  바닥에 내버려둘수도 있었다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세상을 버릴 수도 있었다

 

  실을 쥐면

  전조등이 켜진다

  이유가 없는데 분명히 켜져서

 

  단 하나, 실뜨기는 혼자 할 수 없다

 

  나는 동작을 멈추고

  다음 주자의 얼굴을 상상한다

 

 

* 레이 브래드버리.

 

 

 

전방 동물 출현 주의

 

 

  어깨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꼭 누군가 밟고 날아오를 것 같잖아

 

  어깨가 아파 주무를 때마다

  당신 영혼의 일부가 소실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받는 것 같다

 

  어깨는 작은 알, 찢으며 태어나는 것

  커다란 바늘을 들고 고독이 걸어온다

  또 당신이에요? 어제도 꿰매주었잖아요

 

  한때 나는 나의 어깨를 자랑스러워했었다

  어깨를 평균대라 생각한 적도 있지만

  체조선수들은 모두 다 떠나갔다

  수평이 안 맞아요 사방에 흠이 패어 있군요

  그러니 자꾸 빗물이 고이는 거잖아요

 

  비를 원망해 봐야 소용없다

  기울어진 채로도 잘 산다

 

  어깨는 흰 종이

  딛었던 발의 무게를 전부 기억하는 나뭇가지

 

  어깨를 나란히 하면

  보이지 않는 구슬이 또르르 굴러간다

  그건 내 안에서 나를 데우는 거예요

 

  이런 식이라면

  나의 소실을 증명할 방법은 많다

  내일은 무릎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울 때 유독 새카매지는 뒤통수

  머리카락 한 올에 깃든 사랑에 대해

 

  내가 얼마나 빼곡하게 살아 있는지

 

  어깨는 증명하고 싶어 한다

  나의 있음을

 

  계절이 바뀌어도 녹아내리지 못한

  나의 뼈들을

  <  >

 

 

안희연 시인: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 수상하며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