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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현대시』 2024년 8월 호에서 눈에 띈 시: 「노아의 연산일기」(함기석), 「올빼미의 눈을 감기려」(김경후), 「영원과 에러」(김선오), 「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외 2편(권민경).

by 시 박스 202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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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8월호 표지

 

노아의 연산일기

- 함기석

 

                   

 

                    끝없이 폭우가 내렸다

  신의 연산놀이, 무더운 덧셈이 시작되었다

 

하늘이 제 몸의 흙탕물 피를 빼 인간의 땅에 뿌렸다

                   온 세상이 홍수에 잠겼다

 

별들은 색색 눈동자, 은하수 타고 먼 우주로 달아났고

                  자연은 가혹한 곱셈에 잠겼다

 

             바람이 회오리쳐 인간의 신전을 습격했다

어제와 오늘이 용이 되어 내려왔다 내일의 불을 뿜으며

 

             하루를 빛과 어둠으로 나눈 왕이 타죽고

노아는 여자와 배를 나누었다 외로운 괄호 내가 태어났다

 

                                { }

 

                                    나는 텅 빈 배

성채집합 {nothing}에서 아기의 혀 닮은 일곱 꽃이 피어났다

                     밤새 천둥이 울고 흑조가 날았다

 

            말이 탔다 곰이 탔다 얼룩말이 탔다 코끼리가 탔다

사자가 탔다 사슴이 탔다 기린이 탔다 하마가 탔다 낙타가 탔다

 

                                그래도 나는 공집합

                모든 원소들의 합이 0인 영원한 표류물일뿐

 

천국수도원의 악업을 증언하자 신의 얼굴 가득 주름이 번졌다

                  노아! 노아! 비둘기가 통곡했다 그때마다

               아라라트 산자락 가득 익사체들이 떠밀려왔다

 

                                       나는 취한 배

                벼락 치는 황토 바다를 출렁출렁 떠다녔다

 

신의 신음이 인간의 울음에 닿을 때 쌍둥이 괄호여자가 태어났다

                                            그녀는

 

             공집합의 집합, 만물의 집합, 나의 참혹한 혈족인 시

                                  구름이 허연 뇌를 토했다

 

                                 {{ }}

 

                                텅 빈 배를 태운 텅 빈 배

                       부분집합이 자기 자신뿐인 사람들이 울었다

 

구원의 배는 없어! 괄호 바깥으로 비명이 계속 번져나갔다

 

               신의 역산놀이, 무서운 뺄셈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가뭄이 계속되었다

 

                             계약의 무지개가 없는

           해도海圖에 산 자의 피를 빤 모기들이 앉았다

 

손바닥으로 탁 치자 더러운 피가 시방十方 세계로 튀었다

 

                      노아! 노아! No我! 서기 6024년

      쩍쩍 갈라진 땅에서 노아의 연산일기는 유실되었고

 

                         { {{  } } }  침묵하는 세계는

    진행형 멱집합 시간, 괄호가 겹겹 무한 반복해 태어났다

  

함기석 시인: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올빼미의 눈을 감기려

- 김경후

 

 

 

  밤이 와도

  밤이 오지 않아도

  누구나 심장 속엔 올빼미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아무리 눈앞이 컴컴해도

  올빼미는 눈을 감지 않지

  지혜나 미래를 구하는 건 아니야

  그건 이미 얼어붙어

  이미 불타

  감고 싶어도 감지 않을 뿐

  범죄와 피의 냄새

  시력은 없음

  안대를 씌워도

  감지 않지

  끝나지 않는 사막과 광기에도

  심장 속 올빼미 두 눈 부릅뜨고 있지

  졸거나 쉬어도 된다고

  그만하자고

  다신 눈 뜨지 말라고

  온몸에 구멍을 뚫고

  진통제와 마취제를 부어도

  시바 여신의 모든 손이 몸을 파고들어도

  기어코 그 손목을 물어뜯으며

  올빼미

  감지 않지

  눈 감은 적 없지

  붉은 흙물이 심장까지 차올라

  심장이 보이지 않아도

  감지 않는 올빼미의 두 눈

  그걸 뭐라 부를지 몰라 우리는 울부짖지

  뼈 피리 구멍 사이로

  비눗방울을 불며

  우리는

  그렇게 올빼미의 눈이 되어가지

  <  >

 

김경후 시인: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영원과 에러

- 김선오

 

 

 

 

 

  원은 굴러가고 싶다.

  점 하나가 몸에 박혀 있어 쉽지 않다.

 

 

  

  원의 균질한 신체에서 점은 얼굴의 역할을 한다.

  벽에 붙은 원들은 무수하고

  원이 생각하기에 얼굴의 연속은 리듬을 만든다.

 

  원은 사회를 원한다.

  리드미컬한 사회를.

 

  다른 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원은 점을 통해 다른 원들의 있음을 가늠한다.

  점은 원 혼자만의 것이지만,

  혼자는 너무 깊어서 혼자 아님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벽의 뒤편에서 비가 쏟아질 때

  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원은 미약한 치통을 느낀다.

 

  비가 그치면 점은 잠들 것이다.

  얼굴을 재우고 원은 영원히 깨어 있을 것이다.

  영원이 자신의 결함이라고 생각하면서.

 

  원에게 거울이 주어진다는 상상은 원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원은 반려 얼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다.

  원은 반려 얼굴의 수명을 모른다.

  반려 얼굴이 원보다 먼저 죽는다면······

  원은 반려 얼굴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원이 하늘이라면 반려 얼굴은 태양일 것이다.

  여기에서 보았을 때 태양은 하늘에 포함되어 있지만

  태양의 시선에서 하늘이란 작은 점에 빛을 건네는 짧은 시간일 뿐이다.

 

  ●

 

  원은 옆자리의 원과 자리를 바꾼다.

  바꾸지 않아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원은 계속 생겨나며 계속 소멸한다.

 

  자세히 보면 원에 속한 점의 테두리가 조금씩 변형되는데,

  그것이 시간의 변화 때문인지 공간의 변화 때문인지

  거울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

 

  점이 원을 벽에 고정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원이 벽을 점에 고정하고 있다고 정정하겠다.

 

  정정 과정에서

  점의 힘이 상실되었다.

  벽의 힘이 상실되었다.

  원은 원래 힘이 없다.

 

  동서남북이란 벽이 꾸는 꿈의 형식이다.

  어느 쪽이든 바다에 닿는다.

  그러니까 힘은 없어도 된다.

 

 

 

  곁이라는 것이 얼마만큼의 거리와 방향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심장은 얼굴의 곁에 있는 것인가?

  심장 소리는 어쨌든 리드미컬하다.

 

  도열한 원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해 악보를 만들 수도 있겠다.

  원들이 자꾸 굴러가려 해서

  악보가 엉망이 될 수도 있겠다.

 

  엉망은 얼굴을 편안하게 한다.

  점들이 부풀었다 작아졌다 제멋대로다.

 

  음표와 음표 사이에 부는 바람이 춥다.

  이런 감기라면 좋겠다.

 

  원은 원의 곁에서 원을 하고

  점은 점의 곁에서 점을 하고

 

  이 음악을 사랑하게 될 거다.

  겨울 공터 철근 사회의 음악을.

 

  점은 원을 안아주고 싶지만

  몸을 껴안는 얼굴이란 지나치게 허구적이다.

  곁이라는 것이 그렇다.

 

  벽의 너머가 벽과 함께 지속된다.

  반복한다.

  빗소리가

  반복한다.

 

  영원히 회전하는 물기둥이 있다.

 

  ●

  

  점이 원을 연다.

 

  ●

 

나는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뛰어내리는 점의 뒷모습을 보았다.

<  >

 

김선오 시인: 2020년 시집 『나이트 사커』로 작품 활동 시작.

 

  

<현대시 8월호 목차>

 

 

커버스토리:
권민경 시인이 독자들에게 읽어주는 시 3편

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둥둥 뛰는 부정맥과

  고양되는 기분

  고양돼서 사람을 죽이는

  개새끼들 씹새끼들

 

  당신은 부피를 갖고 질량을 갖고 무게와 길이로 수치화된다

  존재감은 모든 것을 퉁치는 말이지만

  사랑이여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니, 아니, 사람이여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팀파니를 둥둥 울리며 걸어갑니다-그건 불가합니다

  둥둥 울리며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귓구멍으로 들어와 해골과 공명

합니다 뇌도 자극합니다 가능합니다

 

  어떤 불가와 가능성이 우리를 한 공간에 몰아놓고

  감히 되도 않을 연주를 시키네

  쇼스타코비치여 그때 당신이 만든 교향곡에 편성한

  팀파니와 팀파니 주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만을 위해 언젠가 팀파니 협주곡을 작곡하겠다는 꿈

  이루지 못할 꿈을 뒤로하고

  우린 시시각각 클래식이 되는 중

  클래식을 희망하는 중

  낡은 것 중 쓸 만한

 

  하지만 사랑은 절찬 상영 방영 공연 대유행중이므로

  쿵쿵쿵쿵쿵 하고 두 팔을 힘차게 교차하고

  킹콩이 되고

  ---킹콩도 사랑을 했지, 암 그렇고말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중한 것을 지키며

 

  누군가의 가죽이 아닌 스스로의 가죽으로 만든

  악기 물리적인 악기 생각과 말이라는 악기 성대는 종종 악기로 비유

되고

 

  공간을 꽉 채우는 공명과

  텅 빈 객석을 생각합니다

  공명과 공동

  비어야 소리가 나기에

 

  사랑해주세요 사랑을 주십쇼 감히 가까이 다가가기에도 두려운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검증하며 조심스레 말을 걸지만

 

  증명하시오 당신의 불경함을 당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슬픔과 기쁨을

이것이든 저것이든 이분법적이지 않은 당신의 정체를

  해골이 소울을 가득 담아 연주하는 북처럼

  경이로운 연주로

 

  팀파니 주자여 찢어진 가슴을 더 두들겨 찢어주시고

  새 자루에 새 술 담듯 새 악기에 새 사랑과 새 영혼과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들 가득 담아주소서

 

  사랑이여 담겨주소서

  남의 가죽이 아닌 나란 자루에

  우승 기원으로 담근 과일주에

  연주만을 위해 지어진 전용 홀에

  눈구멍 속에 담긴 눈알 같은 

  이 지구에

  <  >

 

 

오늘의 운세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

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몸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몰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  >

 

 

종일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멈췄다

 

  너는 지물포 집 사내아이

  2학년 4반

  맨 앞에 앉아 있고

  피부가 검다

 

  너를 더듬고

  빚어보다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는

  날씨들이 흘러간다 흘러

 

  둑을 터뜨리고 마을을 집어삼킨다

  똥물에서 헤엄쳐 피난 가거나

  옥상에서 수건을 흔들 때

  우리는 수재민이라 불린다

 

  그거 어쩐지 사람 이름 같아

  킬킬거리다 하늘이 밝아온다

  뉴스 속보는 흘러가는데

  

 영원히 아홉 살에 멈춰 있는

 

  너의 죽음을 검색하면

  고양군이 나온다

  고양군은 고양군으로 멈춰져 있다

  고양시가 나타나도 소용없는 일

 

  야산은 어느 산의 이름일까

  동명이인은 왜 이렇게 많을까

  수재민의 아이들도 수재민

  아이들이 구호품으로 받은 학용품을 품에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종일이가 없다

  나는 없는 종일을 영원히 있게 하려

  시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내 어리석지만

  멈추지 못했다

  <  >

 

 

권민경 시인: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