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예지에서 읽은 시

『창작과 비평』 2024년 여름호(통권 204호)에서 눈에 띄는 시: 「최전선」 외, (김수우) & 「언덕 위 재개발지역」 외, (박형준), & ,「여름, 여름 아이」 외, (송정원), 「사운드트랙」외 (한여진).

by 시 박스 2024. 7. 14.
728x90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 속표지>

 

 

 

 

김수우 시인: 1959년 부산 출생.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뿌리주의자』 등이 있음.

 

최전선

 

 

 

  바구미 한마리 모니터 앞을 기어간다 수상하다, 느릿느릿

 

  오래된 만행인 듯 어린 척후병인 듯 돌아본다

 

  다음 날 선풍기 옆에 또 한마리 서성인다 조심조심, 의아하다

 

  부엌서 베란다서 자꾸 마주치는 여섯개 발목을 가진 점, 점들, 점들

 

  밤을 새웠는지 큰 산을 넘었는지 비틀비틀, 어디서 출발했을까

 

  나흘 만에 그 첫 길을 발견한 날 후두염이 시작됐다

 

  묵은 쌀 봉지에서 새까맣게 기어나온 무수한 바구미의 무수한 이데아

 

  그 치밀한 절망 그 꼬깃꼬깃한 혁명을 막을 수 있을까

 

  모든 고독은, 모든 모순은 최전선을 가지고 있다

 

  우끄라이나의 총알도 팔레스타인의 핏자국도 인디언 아이가 부는 자칼 호각도

 

  걸어 걸어 구멍 많은 지평선을 꿰매는 중

 

  귀신보다 더 귀신 같은 슬픔, 난민들의 찢어진 목록이 펄럭인다

 

  점점이, 살아내라 살아내라, 닳은 발톱마다 화약 냄새 진한데

 

  순간순간에 부지런히 목숨 걸었던 저 눈물화석들

 

  그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멀고 멀다

  <  >

 

 

한잎의 무덤

 

 

  꽃은 언제나 완벽한 예언체였다

 

  해마다 사월이면 꽃가지마다 무덤들이 매달린다

  

  한잎 무덤 옆에 두잎 무덤이 돋고, 그 아래 세잎 무덤이 솟는다

 

  피를 먹은 안부들, 돌아오지 않는 이름들에 날개가 돋는다

 

  풍경이 진화하는 이유는 황소 같은 통곡들이 도착하는 까닭이다

  소유할 수 없는 여명을 매일 끌어올리는

  죽음과 죽임은 서로 거울이 된다, 안녕하신가

 

  환상의 편견을 삼킨 두루마리구름이 증인이다

 

  비린내 나는 눈물로 푸른 징검다리를 낳는 사월

  보따리 보따리 꽃잎 풀어헤치는 비명 앞에서

  고향이 없는 자도 고향이 많은 자도 찬란한 젯밥이 된다

 

  무덤이 붉다 무덤이 빛난다 무덤이 팔랑거린다

 

  미래는 하루하루 과거를 낳고 있으니

  송이송이 흔들릴 때마다 멈출 때마다 말씀이 반짝인다

 

  바벨탑의 폐허를 날아오르는 바람이 증인이다

 

  주검으 잊지 말라 한잎의 음성

  가만있지 말라 한잎의 명령

  영원이 되어 돌아오는 저, 한잎 한잎의 부탁들

 

  꽃은 언제난 완벽한 예언체이다 제목 없는 시집이다

  <  >

 

 

박형준: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저녁』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등이 있음

 

 

언덕 위 재개발지역

 

 

  잘못 접어든 산책길에

  서쪽에서 들어오는 초저녁 빛을 따라

  평안으로 난 길이려니

  한참 언덕을 올라가다 만난 재개발지역

  철망이 없어도 철망으로 경계를 두른 듯한

  급류로 쓸려나간 도심의 시간이

  무덤처럼 모여 멈춘 곳

 

  골목골목마다 집이 있는,

  위로 올라갈수록 복비가 저렴한

  복덕방 주인과 손님이 노상의 평상에서 흥정하는,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홑이불 한장에 고단한 몸을 누일 것 같은

  첩첩지붕들,

  골목 사이사이로

  언덕 꼭대기 교회의 십자가와

  이슬람사원 첨탑의 흰 초승달이 보이는,

  갈림길의 언덕에 또다른 계단이 나타나는

  계단이 만든 쓸쓸한 탐험길 한 끝에

  또다른 동네, 또다른 골목이 펼쳐지고

  오래된 비디오 대여점과

  전봇대 밑에 봉지로 싸인 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탄재들

 

  초저녁 빛은

  골목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고

  골목 어느 길로 가든

  서쪽 하늘을 향해 가는 길은 트여 있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 바라보니

  언덕 맨 꼭대기 집 옥상에 빨래가 널려 있다

  발아래로 서울 시내 마천루와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아침 햇살에 빨래를 널던 사람은

  창공까지 쥐어짜며 자기 삶도 바싹 마르길 기원했을까

  더는 올라갈 데 없는 산동네의 저무는 언덕에서

  거둬들일 손 없이 흔들리는 빨래를 깃발 삼아

  우연하게 시작된 오늘의 산동네 등정은 끝이 난다

 

  공가 팻말이 붙은 집들이 늘어나는 철거 중인 산동네

  계단마다 서로 다른 삶을 한층 한층 쌓아올리며 어울리던

  집주인보다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은 곳,

  울타리에 생선과 모자가 함께 널려 있듯

  이름을 몰라도 서로 어울리기 좋아한 사람들 떠나고 나면

  이곳에 들어설 단지명이 영문인 아파트

 

  산동네의 계단을 다 내려와

  대로로 통하는 언덕길을 걸어가는데

  길 한복판에 풀어져 속이 휑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륵스륵 따라온다

  뒤돌아보면 딱 멈췄다가 발걸음을 떼면 따라오는

  집뱀 같은 비닐봉지

  어둠을 채 가리지 못한 가로등 불에 반짝인다

  <  >

 

 

봄이 오는 무덤가에서

 

 

  내 목소리는 언덕 하나를 넘지 못해서

  언덕 너머로 양들이 한마리 두마리 도망치기 시작하고

 

  여자의 노래는 양들이 사라진

  언덕 너머 두번째 세번째 언덕을

  가없이 넘어

  설산 아래까지 가닿아

 

  내 목소리가 놓친 양들이

  설산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여자의 노래를 따라 돌아오고

 

  해진 신발 밑창에

  뭉툭한 발가락이 드러나는

  유목민의 발걸음을 닮은

  그 여자의 노래

  야생에서 죽어가는

  짐승들의 숨소리를 닮은

  그 여자의 노래

 

  내 목소리는 언덕 하나를 넘지 못하고

  언덕 너머로 도망친

  양들은 설산 아래서

  길을 잃고

 

  그 여자의 노래

  언덕을 넘고 넘어

  도망친 양들의 귀에 가닿아

  설산을 기어오르려던 양들이

  뒤를 돌아보는

 

  풀과 눈이 뒤엉켜 있는

  초원의 언덕에

  그 여자의 노래가 배어 있다

  양들의 발걸음에 차일 때마다

  땅에서 눈을 뚫고 솟아나는 풀을 닮은

  그 여자의 노래

 

  그 여자의 무덤을 덮고 있는

  눈을 헤치며 솟아나는 풀을

  손으로 쓸어본다

  설산에서 길 잃은 양이여

  돌아온 양이여

 

  언덕 위 그 여자의 무덤에서

  뒤돌아서 고향집을 바라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마을 바깥으로

  길과 들판을 넘어가던

  나를 뒤돌아서게 하던 그 여자의 노래

 

  울타리 가에 서서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던,

  동구 너머까지 들리던

  몇개의 언덕을 굽이치는 그녀의 옥타브

  <  >

 

 

송정원 시인: 1979년 서울 출생. 2020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여름, 여름 아이

 

 

  기억이 목구멍에 걸릴 때가 있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을 때

 

  연필을 깎는다

  흑연 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선풍기를 등지고 앉아

 

  나무 냄새는 칼날 위로 올라타 춤을 추고

  칼날은 나 대신 검게 그어진다

 

  깎을수록 깎이는 것은 칼의 예리함이어서

  무뎌진 칼은 어느 순간

  내가 쥔 것에 파고들지 못한다

 

  흙에는 지금까지 죽은 모든 여자가 있고

  연필의 몸은 그들의 품에서 자랐지

  그러니 연필을 꼭 쥐는 것은

  그들과 한꺼번에 포옹하는 방법

 

  겹겹의 체온에 기대

  끈끈한 체액을 흘리며

 

  침묵의 소리를 받아 적는다

  이름의 뒷면을 옮겨 적는다

 

  내가 가두었던 검은 머리 아이가

  사각사각 나타날 때까지

 

  나를 닮은 아이의 눈에는

  나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이 없고

  아래 앞니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아이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내 앞에 차가운 물 한잔을 둔다

 

  검지와 엄지에 힘을 줄 때마다

  아이가 움직인다

 

  오른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민소매 끈을 

  자꾸 추어올리는 아이의 손

  <  >

 

 

그래도의 마음

 

 

  거리는 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

 

  사계절의 모든 옷을 몸에 수납하고 혼잣말을 크게 하는 여자

 

  여자는 돌고 있는 전자레인지 같습니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집니다

  안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데워지지도 종료되지도 않는 상태는 조금 위험합니다

  아, 이건 내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깜깜해지기 위해 극장에 갑니다

  깜깜한 곳은 마음껏 깜깜해지기 좋아요

 

  아이 몸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남자

  깁스한 다리로 달리는 학생

  폐버스 안에서 웃는 아이들

  자신의 해부를 지켜보는 여자

  그들의 눈물이 내 눈에서 흐르게 둡니다

  극장에 몰래 나를 버리고 나옵니다

 

  거기 쪼그리고 앉아 튀밥 기계를 돌리는 남자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튄 튀밥을 쪼아 먹는 비둘기들

  튀밥을 기다리는 아이와 엄마

  뒷짐 지고 구경하는 백발의 여자

  누구도 새들을 위협하거나 쫓아내지 않습니다

 

  물에 떨어진 잉크 한방울처럼

  이름 없는 마음이 퍼집니다

 

  보도블록 사이의 풀은 잡초가 아니라고

  다 이름이 있다고 말하던 여자가 떠오릅니다

 

  보도블럭 사이의 풀은 잡초가 아니라고

  다 이름이 있다고 말하던 여자가 떠오르니다

 

  무명의 마음에 그래도,라는 이름을 지어주려고요

  그래도, 어때?

  비둘기들이 고갯짓으로 찬성합니다.

<  >

 

 

한여진 시인: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있음.

 

 

사운드트랙

 

 

 

지금 강원도에는 눈이 내리고요

다음 곡 듣겠습니다

 

                    *

 

쌍둥이 자매를 둔 어머니가 보내온 사연입니다

 

                    *

 

  거기에도 눈이 내린다지요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 노래 하나 듣겠습니다

 

                    *

 

  오늘 같은 날에는 유독 잊어버린 것들이 떠오릅니다

   예를 들면 ······ 집으로 가는 길

 

                    *

 

  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다 잠시

  졸았나

 

  엄마, 엄마

  언니, 언니

  불러도 집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는 집은 왠지 낯설어서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다 문지방을 밟았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더라

 

  나쁜 것들을 잊기 위해

  꿈속에서 모은 사연들로 밥을 지어 먹었다

 

  비릿한 풋콩의 맛

  배부르니 또 잠 쏟아진다

 

  어디선가 베틀 소리 들리고

  빈집에는 길쌈하는 이 없는데

 

  저절로 돌아가는 베틀과

  하얀 천에는 하얀 자수 화려하다

 

  낙산사의 해당화

  금강산의 금강야차

  창도군의 꿩과 사슴

 

  손바닥으로 쓸어보며

  이게 다 언제 적 이야기일까

 

  모든 아이는 죄와 함께 태어난다고 했다

 

  장독대 깨서 까만 간장 국물로 흰 눈발을 어지럽힌 일

  하도 울어서 소매 끝이 다 닳아버린 일

  계란 껍데기를 잘못 삼켜 잠시 숨이 멎은 일

  뜨거운 바닷물에 들어가 차가운 몸으로 나온 일

  대관령을 달리던 자동차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 일

 

  그 모든 것이 다 나의 일이었음을,

 

  그래서 아이는 죄와 함께 멀리,

 

  엄마랑 언니랑 나

  우리는 셋 이 집의 방은 다섯

  남은 것들로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누군가 알려주면 좋을 텐데

  누군가 집까지 바래다주면 좋을 텐데

 

  (주파수 조정하는 소리)

 

  여기는 엄마의 꿈이에요 언니의 꿈이에요

  꿈에서 문지방 밟거들랑 그 꿈 나에게 팔아요

 

  하얀 자수 수놓은 하얀 옷 완성되면

  나 얼른 입고 집으로 돌아갈게요

 

  (다시 주파수 조정하는 소리)

 

  베틀 기계가 멈춘다

 

  식탁 위에 올려둔 하얀 호빵 하나

  사라진 일

  누군가 눈치채길 바라며

 

                    *

 

  이제야 오셨군요

  오래 기다렸어요

  노래 한소절 들려드릴까요?

 

                    *

 

  (라디오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 뉴스속보, 인터뷰, 심층토론, 폭설주

의보, 보험광고, 영화광고, '다들 안전한 귀갓길 되에요'라는 디제이의 목

소리)

<  >

 

 

환대

 

 

 

  이름을 알려달라 했는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어서

 

  마당 한가운데로 돌을 던졌다

  괜스레 심통을 부렸다

 

  한번 이름을 들어버리면

  그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요

 

  돌아보니 어릴 적 나 받았다는 산파였다

  그러고 보면 그건 몇 번째 생이었더라

 

  과연, 이름은 가장 강력한 예언이었다

  끝날 때까지 벗어던질 수 없던 생

 

  할머니는 내 이름 기억나?

  내가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남의 집 애들 크는 속도 좀 봐요. 어르신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런 건 나

중에 생각하자고. 또 올게 엄마. 접이식 테이블은 창고에 있어요. 바로 이곳

에서 부인께서는 남편분에게 목 졸라 살해당하셨습니다. 거 그만 좀 뛰래도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이란 말이죠. 선물 포장이 아직 덜 되었는데요. 저

오살할 놈, 염병할 놈. 정말 유감입니다. 난 골덴 바지 입기 싫다니까. 자기

야, 사씨 아저씨네 집에 이것 좀 가져다줘.

 

  소란이 끝났을 때 마당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잠시 쉬어가는 중이다

  <  >

 

 

<창작과비평 2024년 여름호 표지>

 

 

# 창작과비평

# 김수우 시인 # 박형준 시인 # 송정원 시인 # 한여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