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7월호 목차:
돌 앞으로
정영효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어서 나는 돌밭을 가꾸었다
버려진 땅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을 가려내고 계속 돌을 치우면서
돌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드러나도 새로움이 없는 것, 한쪽에
버려두면 그냥 무더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높게 쌓인 돌 앞에서 이웃들은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부르기
쉬운 이름을 붙여주며 하나의 장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전보다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가려낼 돌을 찾지 못했
다 쌓인 돌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으므로
땅이 줄 내일을 상상했다 작물을 심고 빛이 내리쬐는 계절을 기다리
는 동안
이웃들은 여전히 돌 앞으로 모였는데 땅에서는 무엇도 자라지 않았
는데 지금을 밀어내는 소식처럼
하나의 장소가 필요해서 나는 돌 앞에서 수확의 기쁨을 바라고 있었
다 다른 곳에서 돌을 구해오면서 돌을 더 높이 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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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가방을 싸며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만 샀습니다
하나에는 옷을 담고 하나에는 잡화를 담고
하나에는 아직
혼자 떠나는데도 분리를 잘해야 하고
분리를 잘할수록 정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을 줄이며
짐을 늘리며
가방 안에 맞는 구조를 만드는 동안
그 나라에는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나는 우의를 챙겨 넣습니다
우의는 분명히 옷이지만
잡화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어느 쪽에 자리하든지 적당하다면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한데
이곳에서는 내가 계속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나를 제일 모릅니다
먼 거리를 함께 할 가방은
가로와 세로가 튼튼해 보입니다
아직 출발하지 않았지만 도착한 기분으로
나는 생활을 이어갈 구성을 찾습니다
짐을 푸는 순간 거주는 시작되니까
이곳과의 차이를 확인해 보면서
꼼꼼하게 우의를 입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몇 개가 필요한지 몰라 세 개를 샀습니다
아직 하나는 비어 있습니다
정영효 시인: 200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계속 열리는 믿음』, 『날씨가 되기 전까지 안개는 자유로웠고』가 있음.
선생의 항아리
김기형
선생은 항아리 두 개을 그리었습니다
하나의 족자에는 둥근 항아리를 따라 그림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림은 항아리 밖까지 나가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지요 하얀 항아리가
비추는 것이 많았습니다
또 하나의 족자에도 같은 항아리, 둥글고 흰 항아리였으나 채운 바 없
이 새카맣고 간혹 흰 빛의 점들이 보이는 배경 안에 둥실둥실 떠 있었습
니다 그림은 곧 매혹이었지요
항아리들이 곧 당당하게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무엇을 가지겠나
하나를 주겠다
선생은 두 족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시었습니다
선생님, 이 우주 속에 있는 듯한 항아리가 캄캄하여 좋습니다
제자가 말과 함께 동시에 손을 뻗었는데
선생이 나지막이 말하였습니다
그래 네 죄가 많구나
순간 항아리가 가득 채워진 채 둘둘 말려 제자의 손으로 들어온다고,
제자는 느꼈습니다
새벽이나 밤마다 항아리가 제 몸을 띄우며 하얀 채로 머물고 있었지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것은 꿈,
꿈이었어요
저는 충격에 휩싸인 채 꿈에서 깼습니다
항아리 밖으로 발을 내밀었습니다
항아리 밖에서 안으로 쏟아졌습니다
두루 다니며 항아리가 깨지지 않도록 돌보았어요
꿈이 커다란 그림을 펼쳐놓았으므로
선생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그림 하나를 가졌습니다
선생님께서 고르라고 펼치셨으나 제가 가질 것을 이미 알고 계셨으
니 무엇을 가졌으며
지금 항아리 속에서 어떠한 포즈로 앉아 있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
습니다
들여다보아 주십시오
컴컴한 머리가 둥글게 항아리를 다 채우고 있는 것을 나무라 주십시오
항아리는 깨지지 않습니다
항아리는 증폭하지 않습니다
오직 항아리 안만 커지는 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먼저 태어나셔서
항아리를 짓고 계셨습니까?
선생님이 항아리를 놓고 기다리는 때도 있으십니까?
문이 없이도 다니십니까?
선생님의 항아리가 아니지요?
항아리는 선생님을 가두지 않겠지요?
항아리는 아무 상징도 아니니 꿈에서 깨 문 있는 곳으로 가라, 하실
참이신가요?
항아리에서 지금 막 스르르 늘어지는 것은 제 손입니다
손잡이가 없는 둥근 공간에 들어가 손을 뻗으면
저로써 항아리 전체를 일으키리라 생각됩니다
이상하게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흰 빛입니다
그래 네 죄가 많구나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그 말씀과 함께 정지하신
선생님의 얼굴과 표정
선생님의 배경과 풍경을 저는 물끄러미 보고 있습니다
떠나지 않고
항아리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마침내 항아리와 제가 어찌 되는 일이 없이
기다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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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형 시인: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젊은 작가 앤솔러지 시집인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 가 있다.
거대 사랑 시
윤혜지
메롱은 메롱 할 수 없다.
메, 할 때 혀는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주인이 주인 할 수 없고(주인은 주인 비슷하며)
사랑이 사랑 할 수 없듯(사랑은 사랑 근사치이다)
메롱은 밤마다 호숫가를 돌았다. 도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내가 나
에게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은? 메롱은 메롱이기를 포기했다. 포기하니
혀를 내밀게 됐다. 메롱이 깨달음을 얻고 있을 때, 홈 스윗 홈에서 그녀
는 국수를 만들었다. 제일 간편하게 평화를 섭취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어, 라고 말하며 그녀는 생활 아닌 것에 몰두했다. 그
것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것과 먼 것을 가리키면 된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여집합이므로
그녀는 홀로 있기로 했다. 주인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 아니, 실은 그
녀에겐 주인도 노예도 없었지만 어떤 세계에선 주인이 생길 수도 있겠
지. 무순처럼, 그저 뿌리면 자라날 수도 있겠지. 무를 갈아 차가운 국수
에 넣어 먹으며 그녀는 엄마가 된 자신을 생각했다. 생각하니 그녀의 아
기는 아기 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입술을 부르르 떨더니 혀를 내밀었
다. 비가 오려나. 최근엔 급작스럽게 내리는 폭우가 잦았고 그녀가 정신
을 놓았기에 온 집에 들이쳤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빗물 속에 서서 그녀는 자신의 침실처럼 물이
많은 곳을 생각했다. 계곡, 바다, 강, 호수. 그래, 호수가 가장 고여 있는
물 같다. 썩어 가는 것 같다. 호수 주변에 잔뜩 낀 흰 거품들. 거품들을
뒤집어쓰고 있는 갈대 모형과 백조 모형과 어린 아이 모형들. 물결에 씻
기는 데도 자꾸만 더러워졌지. 그녀는 어떤 모형을 보든 손을 넣어 입
속을 만져보았다. 입 속은 온통 분홍빛이고 잇몸과 목젖과 혀가 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혀뿌리, 혀뿌리, 저절로 생겨난 혀의 뿌리. 언
젠가 진짜 주인을 만난다면 주먹을 쥐고 혀를 내밀리라. 그녀의 아기는
주인을 갓 잃었다. 상처가 커서 주로 허밍한다. 사람들은 그제야 사람다
운 말을 배운다며 안심한다.
메-에-에-에-롱
이제 아기는 사람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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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지 시인: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나무를 사랑하는 법
강영은
# 책갈피를 찾아
책상 위아래로, 책장 안팎으로 헤매는 일은 허다한 일, 그것은 또한
나에게
나무를 사랑하는 의무를 지게 하는 일,
활자들이 뒤척이는 행간에서 내 눈이 언제나 제멋대로 나무를 그려
내듯이
바람은 왜 파도 소리를 내는지,
사람들은 왜 숲을 바다라고 부르지 않는지,
이파리를 따는 어부가 되는 것보다 길 잃은 물고기가 되는 일은 생각
보다
쉬운 일,
숲의, 서문을 읽다가
비늘을 잃고 단지 그것을 찾는 이유로
지느러미를 파닥거리는
말하자면, 그것은
# 티벳 사자死者의 말하기 방식을 빌어 책갈피를 다시 찾는 일,
푸르거나 희거나 나무의 그늘은 제 몸이 나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한 참나무는 불쏘시개가 되고 속이 헛헛한 헛개나무는 제 몸에 인
두로 문장을 새기지만 죽음의 상처에서 돋아난 이파리들이 하나 같이
싱싱한 봄을 지니는 것은 초록 불을 지펴 그늘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오, 길 잃은 자여, 그대의 가문家門이 숲이라면, 수많은 그늘에 대하
여, 흔들림에 대하여, 흔들려보지 않은 나무가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
다.
이마를 수그려 벌레가 먹고 살이 썩은 나무, 있는 그대로의 나무를 보
십시오. 그리고 남는 시간은 밑둥치가 잘린 나무,
# 당신이 벤 당신을 읽으십시오.
영혼이 몸을 지닌 것을 본 적 없지만 나무를 책으로, 숲을 책장으로,
읽은 적 있다.
낙엽들, 내 영혼의 활자들, 바스락대는 마른 잎들로 불을 지폈으니
나의 다비식,
황홀라게 불타는 나의 주검은 흰 종이,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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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 2000년 《 미네르바》 등단. 시집 『최초의 그늘』 『티베트의 초승달』 『풀등, 바다의 등』 『마고의 항아리』 『상냥한 시론』 『눈잣나무에 부치는 시』 『산수국 통신』 『너머의 새』 등이 있다.
들과 창고 사이에서
박세미
이 창고는 그가 남기고 간 유일한 것
가지런히 정리된 기구들
유독 맨들거리는 부분으로부터 그의 체온을 떠올립니다
굳게 닫힌 창고는 증폭기가 되어 나에게
울음을 쉬지 않고 되돌려줍니다
고요해진 창고의 뒷문을 여니
파란 물결이 밀려들어옵니다
함께 심었던 수레국화가
나의 전체를 흡수하고 나면
들과 창고 사이의 언덕에 앉아
묻습니다
대답 없이
다음 계절이 되어서
들을 향하여 창고에 큰 창문을 내었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벼를 심었습니다
들과 창고 사이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맞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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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물음표를 끝나는 문장 말고
느낌표로 시작하는 문장 모으기
눈빛 교환 그런 거 말고
먼 곳을 보며 당신의 뒤통수 더듬기
당신을 빗나가면서
침묵으로 유도하기
완전히 도착한 말 뒤로
미처 따라오지 못한 말을 매달고
매달리기
< >
밤섬
시선이 난무하는 도시 한가운데에
눈을 감고 듣기만 하는 존재가
있다면
숲의 똥을 고를 수 있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끝나지 않는 노래를 무서워
하지 않는 시간이
정말 있다면
한발자국 내딛으면
한발자국 지우면서
있는
방식
< >
비극의 위치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입니까
태풍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휘돕니까
숲속 오후 기분 좋은 토끼처럼 뛰어다닙니까
아니면 언제나 눈꺼풀처럼 깜박입니까
당신이 내게 다다르는 경로를 짐작하지 못하므로
이불을 펄럭이고
형광등을 켜고
노트를 펴고
꾸벅꾸벅 좁니다
손에 든 펜이
당신의 좌표를 점치는 동안
오늘은 먼지를 잔뜩 마셨습니다
먼지의 성분을 헤아려보면서···
당신이 포함되었다는
폐에 파고든 당신을 영원히 배출할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
깨끗하게 씻긴 폐를 양 날개 삼아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돌연
날개가 거침없이 부풀어 오를 때
나는 당신과 동시에
터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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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푀유
부드러운 첫 장을 걷어내니,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천 장에 한 장만이 당신을 살립니다.
손이 떨려서 다음 장을 걷어내지 못하고 몇 년을 흘렀다
빠르게 늙고 있었기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두 장, 세 장, 일곱 장,
열한 장, 스무 장···
나의 손은 다급했고
얇게 겹쳐진 평면들은 구겨지고 찢겨 날아간다
도대체 나를 살릴 한 장은 어디에···
밥을 챙겨 먹고 개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개는 코로 곳곳의 풀잎을 다 들추고 다닌다
그러다 어느 장에서, 아, 아니
어느 곳에서 오래 머물며 냄새를 맡는다
집에 돌아와 개의 발을 씻기고 헝겊으로 꾹꾹 눌러 말려주었다
개는 집 한 켠에 수북이 쌓인 수백 장의 무덤에 가
킁킁거린다
그렇게 십수 년이 또 흘렀다
개는 이제 내 곁에 없다
몇 장 남지 않은 무덤을 걷어낸다 천천히
그러다 방금 걷어낸 한 장을 다시 덮어보니
나를 비추는 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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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 시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내가 나일 확률』 『오늘 사회 발코니』 등이 있다.
2020년 제11회 김만중문학상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