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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현대시』 2024년 6월 호에서 눈에 띈 시: 「지오이드」(임솔아), 「낙랑파라」(조창규), 「덩굴장미」(최필립), 「붕어빵 장수」외 2편(함명춘).

by 시 박스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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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6월 표지: 함명춘 시인>

 

 

지오이드

 

임솔아

 

 

 

  배숙을 만들고 있다.

  껍질을 깨끗이 씻고

  까끌까끌한 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따라 하는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것이다. 따라 한다는 걸 쉽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공들여 숨겨가

며 따라 하는 것이다.

 

  오늘 친구와

  절에 가서 백팔배를 했다. 내 옆에 서서 절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나란히 계속 절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백팔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

  풀쩍 뛰어넘다가

  그것이 죽은 참새라는 걸 알아챘다.

 

  친구는 멈춰 섰다. 보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보았다고 나는 답했다.

  친구는 돌덩이 하나를 주웠다.

 

  참새 바로 옆에 돌을 놓았다. 또 다른 돌을 주워 돌 옆에 놓았다.

  돌로 참새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다른 돌을 찾기 위해 친구는 조금 더 먼 곳으로 가버리고

 

  나는 친구의 반대 방향에서 돌 하나를 찾아냈다.

  참새와 친구의 돌 사이에

  나의 돌을 놓았다.

 

  지구는 서양배 모양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다. 어린이 백과사전이

었다. 백과사전을 사면 레이싱 게임기를 주겠다고 잡상인은 말했다. 너

도나도 사겠다며 아이들은 손을 들었지만 다 같이 레이싱 게임을 하자

고 약속을 하였지만 집에서 돈을 가져온 건 나뿐이었다. 나는 왠지 당한

것 같았다. 친구들도 내가 당한 거라고 말했다.

  지구는 서양배 모양이라고 되뇌었다. 그 문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나

였다. 정작 서양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지만.

 

  내일은 병원에 가야 한다.

  의료파업으로 진료를 받아주지 않는 병원에

  엄마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자리를 만들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인터넷 속에는 차고 넘쳤다.

 

  절 입구 기념품숍에서 소원초를 구입했다.

  소원을 적고 싶은데 사인펜이 없었다. 매점 직원은

  안 적어도 된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다 안다면서.

  나는 그렇군요 대답했다.

 

  앵무새처럼.

  나는 앵무새를 좋아하였고

  몇 날 며칠 앵무새의 동영상만 보는 때도 있었고

  앵무새처럼 언니의 말을 따라 하곤 하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을 찾지 못할 때마다

  앵무새처럼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하곤 하였다.

  그러니 그 누군가의 흉내는 누군가가 오래 기다린 대답일 텐데

 

  동그랗고 커다란 배의

  속을 파내고 있다.

 

  다 파낸 속을

  다시 속에 꽉꽉 채워 넣고

  속이 뭉그러질 때까지 쪄내고 있다.

 

 

임솔아 시인: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소설 『눈과 사람과 눈사람』 『최선의 삶』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짐승처럼』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2017 신동엽 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수상.

 

 

 

낙랑파라

 

조창규

 

 

 

  푸른 야자수와 백사장 마루

  낭만 파도가 치고

  열대 실내장식이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곳

  여긴 삭막한 경성의 휴양지이자

  상류층 예술 인사들의 끈적한 장소

  조선에서 살롱*의 기원은

  낙랑파라에서

  송석원**, 무계정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감각적인 젊은 예술가들은 작품의 여백을 다방에서 채우죠

  시집이나 그림의 냄새를 맡으면

  찻잎 향이 나니 어찌

  근대 예술의 도시 경성이 다방 천국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니

  다도의 세계에선 그 당시

  안평대군, 춘수경이

  가장 한국적인 모더니스트였던 겁니다

  내가 막 찻잔 내려놓자

  때마침 가게 문 열고 들어온 사내가

  누군가를 찾듯 1, 2층 둘러보고선

  ----혹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아! 그분은 요새 경성에 「오감도」를 건축 중인

       여기 매일 들르시는 단골손님입니다

 

  ----그렇소?

       그럼 그자에게 전해주시오

       '대중'이란 말입니다

       '눈대중'ㅣ나 '대충'과 가까운 친족어란 말입니다

       자기 취향껏 혼자

       무리에서 빠져나와

       캄캄하고 난해한 반전통적인 심해로

       헤엄쳐가는 시에게

       이것도 시야!라고 성을 낸단 말입니다

       그러니

       문학의 대중성을 부르짖는 성난 민심에

       까마귀도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말이오

 

  낙랑파라는 서울광장을 아트리움으로 사용하는 끽다점*****인데

  카프 회원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도회적인 그분은

       파리나 동경의 어느 화가의 응접실 같은 이곳에서

       목일회하고만 어울리시고

       공기까지도 취사선택하십니다

 

  사내는 도저히 이해 안 간단 듯이

 

  ----하아 ··· 이 지독히 폐쇄적인 사교성을

       관심사가 편협한 그 친목질을

       언제까지 계속한단 말이오?

 

  나는 흥분한 사내에게 가루피스와

  한 잔의 시를 권하며

 

  ----이건 그분이 전에 맡기신  「조감도」입니다

       일단 감수성을 우려내

       찬찬히 무의식으로 음미해 보시죠

 

  사내는 못마땅해했지만 달시고****** 오묘한을 삼키자

  화가 좀 풀린 듯 보였다

 

  ----아까 발코니에서 보니까

       덕수궁과 경성부청을 상설 전시 중이던데

       올가울엔 위항문사들 초대해 특별 시화전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소?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흥분을 다 비운 사내가 오감이 중독되어 돌아가자

  경성 최고 살롱은 눈앞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는데

  남은 조감도대로

  플라자 호텔은 초현대식으로 건축되고 있었다

 

※ 낙랑파라는 경성부청 건너편에 있던 2층 건물의 다방 겸 화실. 이상과 박태원 등 구인회와 길진섭, 구본웅 등 목일회 회원들이 단골손님이었다. 현재는 플라자 호텔이 들어서 있다.

* 프랑스어로 '거실'을 의미하며 귀족과 예술가들의 사교모임을 말한다.

** 조선 후기 시인인 천수경의 집. 중인·서리·평민 같은 위항인(委巷人)들이 모여 시를 지으며 놀았던 곳.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창의문 밖에 지은 정자.

****이상의 「날개」 첫 문장.

***** 차나 음료를 파는 가게.

******달고 신.

 

 

조창규: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덩굴장미

 

최필립

 

 

 

  球의 곁은 쓰다듬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빛을 망각하지 않는다

 

  맑게 떨리는

  진자의 얼굴

 

  움직이는 창틀과 끝에 맺힌 시선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물방울들

 

  가정은 비늘을 수납하고

  동전 끝으로 살살 긁는 기분으로

 

  좀처럼 벗겨지지 않아

 

  하얀 이를 드러내는 쪽빛

  영혼에도 가시가 돋는다는 걸

 

  몸울림악기는 제 몸만 울릴 뿐 사람은 해칠 줄 모른대

 

  메타포

  먼발치서 가까운 발치로

 

  사람은 왜

  사랑은 왜

 

  커튼에 묻은 손과

  그 손을 잇는 그림자놀이

 

  행렬이 내게 가르친 건 영원뿐이라고

 

  열고 싶지 않아

  온종일

 

 돋보기 들고 개미 태워 죽이던 아이의

 

 눈이 마주치는 것

 

 

최필립: 2021년 《현대시》로 등단.

 

 

붕어빵 장수 외 2편

 

 함명춘 

 

 

 

  빌딩은 휘황한 골짜기에 서 있는 잡목 같다

 

  그곳에 한 점 불꽃을 달고

  한 사내가 묵묵히 붕어빵을 굽고 있다

 

  손님 하나 없는

  살고 죽는 일에서조차도 비켜난

  시간마저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선

 

  저 거대한 침묵 속에

 

  사내가 하루 내내 반죽한 흰 살과 내장을 집어넣는다

 

  조금씩 비린내가 새어 나온다

  그의 손끝에서

  지느러미를 끔틀거리며 붕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별은 하늘까지 올라가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붕어의 눈망울이다

  도시의 불빛은 서둘러 지은 붕어의 거처이다

 

  오늘 떠오는 이래 처음 웃는 달처럼

 

  거대한 침묵 한 귀퉁이에 걸터앉은 사내가

  풀어놓은 붕어들이,

 

  차도와 인도로 골목과 골목 사이로

  아가미를 빠금거리며 헤엄치고 있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그녀는 전복을 따지 않는다 문어도 잡지 않는다

  그녀는 날마다 화장을 한다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듣는다

  그녀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다

 

  환승역에 열차가 멈출 때마다 승강기로

  넘실대며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인파의 물결들, 파도들

  그녀에겐 바로 그때가 물때다 기다렸다는 듯

  물안경과 오리발을 신고 그녀가 뛰어드는 시간이다

 

  책 읽는 회사원의 까칠한 수염이 돋은 턱 밑을 지나

  휴대폰 속 게임에 빠진 여대생과

  그 남자 친구의 다리 사이를 지나며 그녀는 유영을 한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그녀는 멍게를 잡지 않는다 해삼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날마다 선반 위에서 잔다

  천장 손잡이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잔다

  그녀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상의 역을 열차가 통과할 때마다 창문으로

  고기 떼같이 밀려 들어오는 햇살들, 신선한 공기들

  그녀에겐 바로 그때가 일광욕을 할 때다 기다렸다는 듯

  물안경과 오리발을 벗어놓고

  온몸에 선크림을 바르는 시간이다

 

  맨발로 걸으며 누군가 켜놓은 휴대론 속

  그녀는 영화나 드라마를 어깨 너머로 보다가 울기도 한다

  때론 배꼽을 잡고 까르르 웃다가 뒤로 자빠지기도 한다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어서 그녀를 보지 못한다

 

 

무명시인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유난히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한 장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을 발표한 시라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함명춘 시인: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 『무명시인』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종』이 있다.

 

 

신경림 시인 타계: 1936~2024.

故 신경림 시인; 🖤 삼가 시인님의 명복을 빕니다.

 

 

<현대시 6월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