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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시와반시』 2024년 여름 Vol. 128호에서 눈에 띈 시: 「천사는 그 나라로 가지 않는다」(고형렬), 「철문을 열면 바위, 커피, 모닝캄」(박래은), 「어제」(김미라)

by 시 박스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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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반시』 2024년 여름 Vol. 128호 표지

 

 

천사는 그 나라로 가지 않는다

 

고형렬

 

 

 

  무엇들이 이 골목 끝을 막고 있는가

 

  나는 산천과 대처를 안 가리고 수도 없이 태어나 말을 배우고 소리를 보고 나를 보내주었다

  풀의 나라에 햇살이 들이치던 아침이슬의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천사들의 노크를 거절한다

 

  "오지 마. 가."

 

  천사가 와서 우리 가족이 될 수 없다, 개구쟁이들이 저 교동의 교실을 시끄럽게 할 수 없다

  애채빛 눈으로 첫눈을 손에 받고 "엄마, 눈 와!" 소리치고 일기를 알리는 천사는 없다

 

  자궁에 대한 공포는,

  난정자卵精子의 기적 같은 빛으로 그녀 꿈속에 착상해서 천사의 타자로 나갈 삶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우울한 침묵의 영혼들, 우리가 뛰어온 사회는 자궁을 닮고 스스로 자기 미로로 진화해갈 뿐이다

  천사가 돌아올 수 있는 길도 없다

 

 수많은 천사는 이 거리로 오지 못할 것이며 아니, 이미 오지 않는다

 

  그 골목에, 그 도시 속에 천사의 얼굴이 이름이 없다

 

  삶과 희망은 파도 치는 먼 아침 해안에 다다르지 못했고, 아릿한 핏줄이 끊긴 슬픔의 길은 무너졌다

  그녀가 변하지 않는 한,

  골목은 계속 미끄러질 것이며 그들도 발가벗은 낚시를 물지 않을 것이다

 

  이제 천사들은 우리들 영혼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고형렬 시인: 1979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꿈속의 꿈』 등 다수.
지훈상 문학부문, 일연문학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현대문학상 시부문 등 수상.

 

 

철문을 열면 바위, 커피, 모닝캄

 

박래은

 

 

 

  그날 아침

  그것은 철문을 열고 나왔다. 녹슨 철문 틈으로 개도 나왔다.

  그것은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작은 바위에 올라가 바지를 내렸다.

  땅이 파이고 골을 따라 흘러내린 물줄기 강물이 되었다.

 

  싸움이 났다.

 

  편이 갈라져서 그것들이 자꾸 철문을 열었다. 개들도 덩달아 나왔다.

  단추가 뜯기도 뭉클뭉클한 살점이 터지고 구역질이 솟구쳤다.

  골목골목에서 더 큰 덩어리를 차지하려 달려들었다.

  엉클어진 머리카락, 역사로 이어졌다.

  셔츠가 찢어지고 그것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창피한 그것이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이 사이로 피신하였다.

  그것은 그것의 다리에 매달려 지하로 숨었다.

 

  그것은 창을 들었다.

  그것은 검을 들었다.

  그것은 총을 들었다.

 

  그날 아침 앞마당에 바위가 솟았다.

  그것은 담장에 올라 깃대를 세웠다.

  그것은 만국기를 걸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총성이 울리고 박이 터지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펄럭이는 깃발 아래 김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개도 먹었다.

  그것은 종이연처럼 연약한 역사를 움켜쥐고 낙하하였다.

 

  차양 아래에서

  그것은 익스프레스

 

  커피에 붉은빛이 도는 것을 따라 마셨다.

  밸브를 열고 닫을 때마다 커피, 카페, 카페인의 세계에서 신세계로.

  자본 인류는 유사품을 곁눈질하며 진화한다.

  그것은 카페에 앉아 세상의 소리 듣는다.

 

  그날 아침,

  철문을 열고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군, 물류창고가 아직도 부족한 거야?

  고속도로 공사 중. 주민들의 반대 피켓.

 

  도대체 조용한 곳이 어디일까?

 

  다시 철문을 열어

  바위, 커피 그리고 새로운 모닝캄.

 

  앞마당 바위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

 

 

박래은 시인 : 2020년 《시와반시》 등단. 

 

 

어제

 

김미라

 

 

 

  무화과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먹었다. 씨앗이 멋대로 접시 위로 떨어지더

니 나무로 자랐다. 원목 탁자가 나무를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먹

다 남은 마가린을 꺼내 부러진 다리에 발랐다. 식물성은 식물성끼리 어울리

니까 버터는 사용하지 않았다. 노란 마가린을 바른 자리에 무화과가 피었다.

꽃인지 열매인지 모르는 과일을, 탄생이 시작인지 죽음이 시작인지 모르는

내가 먹으니 정말 어울렸다. 무화과가 익는 동안 놀이터의 아이들이 자랐다.

아이들은 동물성이니까 버터가 더 어울렸다. 505호 옆집은 버터를 이용해

아이를 기르고 남은 버터를 테이블 다리에 발랐다. 저녁이면 가끔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저마다의 본명을 요구할 때 다리를 접고 베란다

를 넘어 옆집으로 가는 무화과를 보았다. 그곳에서 무화과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나의 본명을 잘 몰랐으니까. 다만 알 수 있

는 것은 여백이 길면 무섭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무화과가 우리 집에서 긴

여백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안에는 아직 먹지 않은 무화과가 남아 있고

어제는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김미라 시인: 2024년 《시와반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