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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서 읽은 시

『문학과 사회』 2024년 여름호(통권 146호)에서 읽은 시: 「아가미는 고백의 한 종류」외 1편(송재학) &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외 1편 (황유원) & 「광장과 장면」외 1편(장미도).

by 시 박스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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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사회 2024년 여름호 표지>

 

 

 

아가미는 고백의 한 종류 

 

 송재학 

 

 

 

       말할 수 없기에, 말을 해서는 한 되기에, 입에 생긴 가시가 아가

미가 되는 날이 있다 뒤꿈치부터 찌르르하더니 몸이 소슬해지는 날

이다 앞니와 어금니를 대신해서 서새라는 나뭇잎 모양이 잇몸을 찢

고 아프게 돋아난다 혀를 대면 점막이 갈라지면서 입안에 피가 가득

차는 날이다 처음부터 아가미 호흡인 것처럼 신산의 이유를 쟁이는

날이다 내가 허우적거렸던 늪지는 아가미의 자극적인 시작, 폭우와

만나면서 아가미가 헐떡거리고 있다 아가미의 새파는 작은 노를 움

직이며 섬모운동을 한다 웃지 못하는 표정을 가진 아가미 때문에 신

체는 그토록 힘들었던 거야 잠들 때도 눈 감지 못하는 아가미를 미

워하지 않는다면 입안이 온통 허기인 돋을새김에 귀 기울일 수밖에,

선홍색을 통과하면서 물이 한껏 비치는 새엽이 어떻게 눈물 글썽이

는지 생각하면서, 몸의 어디쯤 지느러미마저 스멀거리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어쩌면 나는 고백이라는 아가미의 노래 앞에 직면한

것은 아닌지, 아가미는 방금 내 입 근처에서 뜯어낸 선명함, 어떤 포

용인지 모르지만 나는 자꾸 아가미 호흡을 한다

<  >

 

 

킬리만자로에 가기 위하여

 

 

      유칼립투스 나무 그림자

      백 미터 높이의 수피에는 오래된 상형문자가 빼곡하다

      하지만 나는 비염 때문에 작은 화분을 들여놓고

 

      낡고 오래된 책을 정리했다

 

      피를 잉크로 사용했다는 서문, 광합성에 가까운 독후감, 꺾어버

린 책등의 이름, 청춘을 자극했던 세로쓰기, 모래로 쌓은 둑 안에 해

일처럼 가둔 마흔 살, 게으른 늙은 책, 글자가 너무 작아 낮달에 갇

힌 문고본까지

 

      언젠가 이 책들을 다시 읽겠다는 표정에는 초식동물의 긴 목이

있다

      『시인학교』(김종삼 시집, 신현실사, 1977)와 『한국전후문제시

집』(세계전후문학전집 8권, 신구문화사, 1961)을 함께 묶은 비닐 끈

이 초현실주의에 매달린 것처럼

 

      어디서나 우후루봉이 잘 보인다는

      킬리만자로의 공허에 휩쓸려서 종일 책을 뒤적이다가

      유리창의 사각형을 닮은 메모를 보았다

 

      '세계의 모서리에서 언제부터 은유로 남게 될 오늘'

    <  >

 

송재학 시인: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음. 시집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 『기억들 』『진흙 얼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내간체를 얻다』 『날짜들』 『검은색』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등이 있음.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황유원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佛陀)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게 그 안에 들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것은 불과 하나가 돼

  그것은 하나인지 여럿인지도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알아봤자 뭐 하겠느냐고 자폭하며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산의 정상에 이르기 전에

  목이 말라 목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누가 그에게 물병을 건네준다

  참 좋은 사람!

  불타는 물을 조금만 마시고 다시 물병을 돌려준다

  물과 불은 음소 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 모양 그 꼴이다

  영원히 물타오르고 있었다는 말은 없고

  영원히 쏟아지는 물이 영원히 불타오르는 산을

  다 식혔다는 말도 없다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영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영원은 도롱뇽목 영원과의 동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초시간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후자의 영원은 망가진 대형 괘종시계의 얼굴 

같은 것이고

  전자의 영원은 그 괘종시계 얼굴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던 분침

같은 것이다

  무슨 영원이 됐든 영원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영원한 시간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영원이 물갈퀴가 달린 짧은 발로 영원히 불타오르는 시간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헤엄치는 와중에 통구이가 되어가고 있었고

  너희는 그것을 소주와 함께 맛있게 씹어 먹었다

  불타오르는 시간 속에서

  불타오르는 산을 바라보며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이제 도중에 쓰러져 열반에 들어

  열반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물처럼 하늘로 올랐다가

  물처럼 추락하지 않고 하늘에서 더 높은 하늘

  하늘 위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올라

  모두가 불타오른 후 불의 손길에서 벗어나

  불타오르는 아래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진입하며 소멸하고 있었다

  찬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영원의 뼈가 오도독

  씹히고 있었다

  다들 입가에 시커먼 재가 묻어 있었다

  <  >

 

 

마파두부밥

 

 

 

  어느 날 눈을 감고 사후 세계에 갔다

  사후 세계에서 너무 배가 고파 들어간 밥집 메뉴판에

  마파두부밥이 있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나는 호기롭게 마파두부밥을 시켰다

  사후 세계이니 매운 것도 괜찮겠지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가

  벌건 마파두부밥이 담긴 접시를 두 손으로 들고

  조심조심 걸어와 내 앞에 내려놓고는

  다시 조심조심 걸어 주방으로 돌아갔다

  사후 세계인데도 저렇게 느리다니

  나는 저 노파가 산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쨌거나 마파두부밥은 왠지 하나도 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매웠고

  너무 매워서 땀과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사후 세계인데 땀이라니 눈물이라니

  비라니

  어느새 창밖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얼굴이 얽죽얽죽 얽은 할머니는

  마차 사고로 잃은 남편을 그리며 꺼이꺼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소리 없이

  문가에서 울고 있었다

  사후 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다니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급히 틀어막고

  마파두부밥을 얼른 한술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늙어서 더는 일할 수 없게 된 소를

  도축하여 잘게 썰어 만든 소고기가

  밥알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다

  사후 세계에서 먹는 마파두부밥 맛은

  아무래도 사후 세계 맛이 났고

  거기 든 모든 것은 죽은 것이었고

  

  나도 어쩌면 이 가게를 나서다가

  저 자욱한 빗길을 돌진해 오는 마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파는 내가 죽은 채로 찾아오면

  나를 기억하고는 다시 조용히

  벌건 마파두부밥을 내어줄 테지

 

  그러면 나는 또 너무 매워서

  땀과 눈물을 비 오듯 흘리다가

  어느덧 비 오는 문가에 서서 죽은 나를 떠올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내

  아내를 쳐다보고는 화들짝 놀라

  그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말겠지

  <  >

 

 

황유원 시인: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초자연적 3D 프린팅』 『하얀 사슴 연못』 등이 있음. 

 

 

광장과 장면

 

 

장미도

 

 

 

      장면이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장면의 틈새에서 나는 예감의 형태로 출몰한다

      장면은 다음 장면을 밀어내고

      투명한 목소리로 다음 장면을 부르고

 

                          ▶      

 

      광장의 장면은 움직이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분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는 손

      예고 없이 튀어 오르는 물줄기

      텅 빈 주머니로 아무 희망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사람은 장면을 벗어날 수 없다

 

                          ⏸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망가지는 경우와 망가지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어제에 두고 온

것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의 행렬 일렬로 끝을 향해 돌진

하는 개미 떼 화분을 깨뜨리고 죽어버린 식물 꿈속에 숨겨둔 얼굴과

꿈 뒤에 유기한 얼굴들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녹아내리는 초콜릿 초

콜릿

      시작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를 시작이라고 불러야 하지

 

      그럼에도 장면을 벗어나려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옷걸이에 자기를 걸어두고 바싹 말라가는 사람

      모국에서도 이방인처럼 밤이 짙어지도록 광장을 배회하는 사람

 

      오래전 잃어버린 얼굴을 찾기 위해 구멍 난 주머니를 뒤적이고

      끈적한 단맛이 손끝에 새겨져 있고

 

      나는 때때로 장면 속에 있다

      플레이와 포즈를 누르는 버튼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사이에서

      텅 빈 뒷모습을 쓸어줄 수 있다

 

                               

 

      길 없는 발자국이 모이는 광장에서

      정지가 될 수 없는 영원한 사이에서

      형태를 갖추려 할수록 장면이 나를 지나쳐 간다

      <  >

 

 

클래스 101

 

 

 

      너는 상하기 직전의 바나나로 푸디을 만든다

      바나나푸딩과 네가 생각하는 푸딩이 다르게 생겼듯이

 

      너와 나는 다른 것을 상상하고 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한다

 

      처음에 처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처음은 처음이 아닌 것이 되고

      처음이어도 상관없는 처음이 펼쳐지면

      너는 수많은 처음 중에서 가장 첫번째에 위치한 처음에

 

      처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초록의 바나나와 검게 뭉개진 바나나 중에서

      어느 바나나가 가장 바나나다울 수 있을까

 

      너는 오븐을 예열하고

     너의 손을 붙잡았던 장면

 

      오른손에 집어넣으면 어떤 맛이 만들어질까

 

      액체에 가까웠던 장면을 부풀리면

      딱딱하게 굳은 순간이 되고

 

      도래하는 처음의 순간에서

      너라고 불렀던 모든 장면을 모형 틀에 부어

 

      나는 상하기 직전의 푸딩을 만든다

 

장미도 시인: 202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