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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_임솔아
펜스 앞에 서 있었다.
현수막을 보고 있었다.
긴급 폐쇄라고 적혀 있었다.
공원 바깥에도 산책로는 있으니까
갈 수 있는 바깥이 아직 좀 더 있었다.
친구가 자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었다.
10월인데 아직도 모기가 있다면서.
이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냐고
나는 물었다.
태연만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친구는 웃었다.
길에 누군가의 조각상이 있었다.
그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침을 뱉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
이제 개소리 안 난다며 기뻐하다
미안해했던 옆집 여자.
그 여자네 집에서 어느 날부턴가
개소리 들려왔을 때
참 듣기 좋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제 옆집 여자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자주 흥얼거린다
개가 여자의 허밍에 맞춰 노래를 한다.
동작을 감지했다고
홈캠이 알림을 보냈다. 앱을 켜보면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방에 들어온 햇빛만 펄럭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햇빛이 집 안을 너무 자주 걸어 다녔다.
방에 들어온 햇빛을
색종이처럼 접으며 논 적이 있었다.
반복해서 접으면 유리병에 모을 수 있었다.
모으다 보면 왠지 소원을 빌어야 할 것만 같았지만.
망해가는 것도 특권이라는 말을
친구는 들었다.
그 말이 도움이 되었다 했다.
아무것도 빌지 않기로 했다.
그게 우리의 소원이기로 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겨진 영수증을 꺼냈다.
친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햇빛 한 장을 꺼냈다.
걷다가 쓰레기통이 나온다면 버리기로 했다.
없다면 집에까지 잘 가져가서 버리기로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개를 씻긴다.
털에 물이 닿을 때마다 개는 바들바들 떤다.
비명을 지른다. 물이 자기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따뜻해. 괜찮아. 그냥 물이야.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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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시인: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시/ 2015년 문학동네를 통해 소설 발표 시작. 시집으로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이 있다. 소설집으로는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장편소설 『최선의 삶』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짐승처럼』이 있다.
음악 없는 말*
_윤혜지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
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
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등 뒤에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사건을
잠깐 쥐었다 놓아도 쥔 감각을 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집에 가면
목이 긴 유리컵에 조개껍질이 한가득이다
그것을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을 골라 따뜻한 국물 속에 넣고
죽은 것의
숨구멍끼리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지만 곧 잊혔고,
모두가 물가에 있었던 기억마저도 쓸려가고, 수심이 깊어져 이제
아무도 조개를 줍지 못할 곳까지 모래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
간다 빈 곳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
무너지는 것도 반복이라고
노인들도 죽고 이제 눈 이야기 해줄 사람도 없다 처음을 발음
할 사람도
* 필립 글래스의 동명의 책, 『음악 없는 말』 , 프란츠,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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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지 시인: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지나가기
_문보영
부족하다
길 한가운데 뭐가 있는데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게오르크가 생각해낸 방법은
여기까지만 쓰는 거였다
벚나무는 묘하게 멀리 있다
어제보다 좀 더 갔다
다시 찾아가고픈 것이다
표범의 얼굴에 난 두 개의 검은 줄
빛을 흡수해
내리쬐는 날을 견딜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사방이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지만
너는 눈꺼풀 뒤를 보고 있다
게오르크가 어제보다 더 갔다
미래가 두려워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와본다
수염
지나가기를 소망했다
아이들이 옷장으로 들어가거나
이불 속으로 숨는 이유는
자신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기 때문
이야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지나가는 나에 관한 지나가는 모든 말을
흘려듣는다
벚나무에게는 콧수염이 있다
벚나무는 그것을 게오르크에게만 보여주었다
콧수염 덕분에 벚나무는 어두운 곳을 더듬어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벚나무가 미묘하게 살아 있다
두려운 상황에 대한 탈감각적 반응
저기 공이 있는데
닿으면 죽어
저기까지 안 가는
시 쓰기 훈련 중인
나
걔도 마음이 있을 텐데
아직도 거기 있는 거야
게오르크는 어제보다 멀리 가볼 요량으로 나뭇잎으로 감싼 찰
밥과 물통을 챙겨 길 위에 선다
벚나무가 쓴 책을 읽는다
한 문장에서 오타를 발견했는데 다음 문장에서도 틀린 걸 보
고 실수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다 한 번 실수하면 실수인데 두 번
실수하면 멋이니까 마음을 보여줄 때는 연달아 실수하라
길 위에서
벚나무를
한 번
만나는 건 실수이고
두 번 만나는 건 반복이고
세 번 만나면
벚나무가
밉다
찾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다
게오르크의 낙타가 사막을/걷는다/해가/너무/세/차라리/해를/정면으로/본다/
등에/자신의/그림자가/생겨서/햇빛에/노출되는/피부의/표면적이/줄어든다/내가/
나에게/어둠을/주어/타죽을/확률을/낮추었다//
동그라미/너는/가슴이/깊어서/폐활량이/좋다/사막/한가운데/벚나무를/심는 건/
너무했어//
어딘가 맛이 간 이곳
안 가면 지나간 게 돼
상처 극복 욕망
게오르크가 벚나무에게도 가고 싶다 무대 위로 오른다 낙타는
사막의 배다 낙타는 북아메리카에서 살다가 제 발로 사막으로 걸
어 들어갔다 사막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또 슬프
다 낙타는 혼자 있기의 도사가 된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이 동그
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낙타가 혼자가 된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
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말이 없던 한 친구가 바닥에 지갑을 내던
졌다 바닥에 내쳐진 지갑으로 관심이 쏠렸고 친구는 바닥에 떨어
진 지갑을 주워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쟤 왜 저래? 그게 저 아이
만의 가는 방법이야 안녕이라고 말하는 건 가슴이 아파서 그러는
거야 아니야 아무도 모르게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바닥에 뭐
가 떨어져 있으니까 그걸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거야 낙타
가 떠나는 걸 우리가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부족하기 지나가기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도 뒤로 가도 앞으로 가도 만나
게 되어 있다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으므로 미래가 이불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건 자신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희
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닌 곳에서 나는 덜 비겁해질 것
만 같다 게오르크는 희박한 환상을 보고서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고 홀로 간직하였기 때문에 병을 앓고 있다* 이제는 음산
한 중절모를 쓴 벚나무와 헛것들에 의해 포근히 싸여 있어야 친
구 생각을 덜 할 것이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나는 멀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
나요 미래가 모든 질문에 대충 대답한다 대충······ 그건 좋은 일
이다
이 지우개는 주황색인데 연필 끝에 달려 있고 문지르면 종이
에 주황색 얼룩이 남는다 흑심과 가루가 섞여 번진다 이런 걸 지
운다라고 말하고 정말 제대로 지우고 있다고 믿어 보며 지워야
할 문장들을 주황색 지우개로 문질러 더 망치고 얼룩을 남긴다
지우개의 입장에서는 이런 게 지우는 것인지도 모르므로 가령 친
구가 쓴 시집의 목차를 달달 외우고 나서 친구의 시집을 펼쳤는
데 읽는 동안 목차와 제목을 달달 외웠던 것을 모두 잊는다 그런
것도 일종의 지우개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주황 지
우개가 좋아지려 한다 벚나무를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동안 벚나
무 또한 나를 만날까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
는 꿈을 꾸었지만 그건 나의 소망일 뿐이기에 미래가 목초지처
럼 넓게 펼쳐지고 내 눈에만 보이는 소들이 풀을 뜯어 먹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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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책기둥』『배틀그라운드』『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등, 에세이집으로는 『일기시대』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 『준최선의 롱런: 문보영 산문집』 등이 있다.
밤은 신의 놀이
- 주민현
복도에 옹기종기 펼쳐진 우산들
누구 머리를 위한 걸까
탈모는 현대인의 질병이래
머리가 다 빠진 미래의 인간을 상상한다
비가 오면 잠기기 좋고
떠오르는 기억을 뜰채에 가두기 좋아
탄천에 조용한 쓰레기 밀려 내려오고
나무들 귀밑까지 잠기고
빅토리아풍 교회와 서툰 이발사
춤추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
왜 이 동네엔 헌옷수거함이 없을까
모두들 영원히 버리지 않아도 좋을까
버리지 않게 되는 기억도 있지
너 기억의 첫 번째 집에서
시간의 멱살을 잡고 우수수 코틀 터트리러 다녔지
골목을 메우는 건 동네 아이들 웃음, 비명소리
두 번째 집에서는 품속에서 굳어가는 개를 묻었고
세 번째 집은 재개발되어 사라졌다
네 번째 집을 너 떠나올 땐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
악기상의 딸은 자라 부모를 모르게 되고
빌라는 점점 작아져 도시의 굴뚝이 되네
연기는 빠져나가기에 좋고
비 오는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덮기에 좋아
죽으려는 사람의 가스 불 소리
행복에 겨운 두 사람이 포개지는 소리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면
그 모든 곳이 연결될 거야
체육공원과 물놀이장 학교의 주먹다짐 어린 시절의 방학천
어둠 속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나눠 피우며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고 있어
진짜 나쁜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위선이 있지
생활의 아름다움이 너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불이 난 양말 공장
일요일 교회 앞 뻥튀기 트럭 옆의 비둘기들
네가 탄천을 지나가며 보는 것
너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알고 싶어 하네
길 없음, 누군가 고쳐 쓴 글씨를 읽으며
숲길을 바라본다
저기에 유령이 산대
유령의 존재란 무슨 뜻일까
그건 인간에게 놀라움이 필요하다는 뜻
신화 속 여성들이 벌거벗은 이유는
세상이 유혹하는 존재를 원한다는 뜻
숲길은 혼령들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네
낮은 주택의 구름과 이상은 높고
네 글은 재보다 가벼워
밤은 신의 놀이
삶과 죽음은 주사위 놀이
정말 이상한 오리들이 정말 이상한 모양으로 떼 지어 내려온다
창가에 매달려 있는 여자는 사실
비 내린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의 전 생애를 발끝에 걸어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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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시인: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시 부문 등단. 시집으로 『킬트, 그리고 퀼트』가 있다. 창작동인 '켬'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