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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의 눈과 같이
Ⅱ
마테우스 그뤼네발트 폰 아샤펜부르크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 화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책은
1675년 요하임 폰 잔트라르트*가 펴낸
『독일 아카데미』인데, 저자는 영예로운 그 손에 대해서
글이나 말로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는
질책의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잔트라르트의 증언을 우리는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뷔르츠부르크 박물관, 초상화 속 그는
여든두 살인데도 정신이 아주 명민해 보이며
눈빛은 기묘하리만치 맑고 깨끗하므로.
마테우스는 채도를 달리한 회색과 검은색으로,
프랑크푸르트 도미니크회 수도원이 주문했고
뒤러가 완성한 마리아 승천 제단화의
양쪽 날개 겉면을 그렸다고,
그러므로 추정컨대 1505년 전후에 살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물빛으로 그린
다볼 산에서의 그리스도 변용 장면,**
그중에서도 휩싸여 넋을 잃은 사도들 위로 모습을 드러낸
모세와 엘리야를 감싸안은 그 구름은
독특함에 있어서
다른 어떤 화가의 그림도 따라오지 못했다고.
잔트라르트는 또한 마인츠 돔에 있던
세 폭 제단화에 대해서도 썼다. 안과 겉 모두에
그림이 그려진 날개 패널, 그중 하나에는
길잡이 아이의 손에 이끌려
꽁꽁 얼어붙은 라인 강 위를 걸어가던
앞을 보지 못하는 은둔자가
두 명의 살인자에게 습격당해
맞아 죽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고. 1631년 내지 1632년
이 제단화는 당시 한창 치열했던 전쟁중에
약탈당해 스웨덴으로 옮겨지다가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다른 수많은
동류의 예술품들과 함께
심해 깊숙이 가라앉아버렸다고 한다.
잔트라르트는 이젠하임에 가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곳 제단화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그가 기록하기를, 성 안토니우스***와
빼어나게 형상화된 괴물들을 함께 담아낸 그림은
묘사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친다고.
잔트라르트 자신이 로마에서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에 본 적이 있는
두 손을 맞잡은 사도 요한 그림을 제외하면
<이젠하임 제단화>는 그 아샤펜부르크 화가가 그린 것 중
유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일 것이며,
그 밖에 자신이 그 화가에 관해서 아는 것은
그가 생애의 대부분을 마인츠에서 거주했으며,
고독하고 멜랑콜리한 삶을 살았다는 것,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이 전부라고.
* Joachim von Sandrart(1606~1688). 독일의 화가. 동판화가. 미술사가. 번역가.
주저인 『독일 아카데미』는 그뤼네발트의 전기를 담은 첫 미술사 기록이다.
** 제자들이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가운데 홀로 다볼 산을 다녀온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옷이 희어졌다는 일화를 가리킨다.
***St. Antonius(251?~326?). 기독교 수도주의의 창시자. 젊은 시절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 황야로 들어가 악마의 유혹과 위협을 견디며 금욕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가 바다 끝에 가서 머물지라도
Ⅴ
키론시타트, 오라니엔바움, 페테를고프를 거쳐
마침내 네바 강변이 늪지대
토리첼리의 진공 같은 그 텅 빈 공간 속으로
서른네 살의 빈털터리 남자가 도착한다.*
요새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새 수도
방금 도착한 이방인에게는
섬뜩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이제 막 시작한 혼돈 자체인 곳
완성과 동시에 비스듬히 가라앉기 시작하는 건물들,
그 어디에서도 똑바로 선 구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황금률에 따라 설계된
도로와 광장, 부두와 다리,
쭉 뻗은 소실선, 파사드, 창열 들은
미래가 메아리치는 공허 속을 통과하며
서서히 다가오는 중이다.
끝없는 공간에 대한 공포심으로 탄생한 도시에
영원의 계획을 건설하기 위하여---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타타르인
칼미크인, 스웨덴 이주민,
독일인, 프랑스인, 그리고
긴 가로수길을 따라 구경거리로 걸려 있는
살갗이 벗겨지고 사지가 잘려나간 시신들,
고문당해 죽은 범죄자들의 몸으로
인구과잉인 이 도시에.
* 원서에는 서른네 살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슈텔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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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강 건너편, 마리엔 병원에 있는
이름난 식물원에 도착해서야
슈텔러는 도시의 혼돈을 벗어난다.
화단 사이로 난 길을
신중하게 걸으며 그는 감탄한다.
유리온실들과
이국의 식물들을 보면서.
낯선 이름을 발견하는 기쁨과 희망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커다란 새장 곁
겨자나무의 어둑한 그늘 속에서
아주 작고 노란 앵무새를 손에 앉힌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테오판이 그를 향해 다가온다.
대주교는 그와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돌지 지역**의 오래된 전설을 들려준다.
신은 어느 날 갑자기
마치 화창한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풀모나리아 이파리에서 생겨났다는 전설을.
* 러시아 북서부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자 동서를 잇는 요충지. 러시아에 합병된
13세기 후반까지 러시아, 스웨덴, 타타르 등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 루마니아 남부 지역.
Ⅶ
사 년 동안 슈텔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둔 수좌대주교는
그에게 아카데미 조수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를 주치의로 삼아
자신의 집에 거하게 한다.
밤이 내려와 덮이면 노인은 젊은 형제와
종말의 새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텔러는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자연의 빛을 화제로 삼는다.
테오판은 말한다---벗이여,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법이라네,
생명이 점점 바닥나면서
모든 것이 따라서 쇠퇴한다네,
종種의 증식이란
순전히 환상일 뿐일세.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게지,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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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 전진한다
이제 멀리 농가 오두막의 지붕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산의 그림자는 높이 솟은 봉우리보다 더 길게 드리웠도다.
-베르길리우스, 「목동의 노래Ⅰ」
Ⅰ
점판암 단층 사이에서 바짝 눌린
선사시대 날개 달린 척추동물은
발견이 쉽지 않다. 하지만
사라진 생물체가 남긴 잎맥 같은 무늬를
사진으로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이 모종의 진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두뇌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작동을 하고 있으며,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자체 조직화의 능력이 있었으니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아름답거나
때로는 안정감을 주는 계통이 서기도 했으나
과거 무지한 상태일 때보다 더욱
잔인한 결과를 유발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가야
기원과 만날 수 있는가? 아마도
1905년 1월 9일 아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싹하게 추운 날씨에 무개마차를 타고
레히펠트 수도원을 출발하여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오버마이팅겐으로 갔던 날에서 시작해야 하리라.
검은 호박단 드레스를 입은 할머니는
종이로 만든 꽃다발을 손에 들었고,
할아버지는 군복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놋쇠로 장식한 군모를 썼다. 말 덮개용 담요로
다리를 감싸고 마차 위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앙상한 가로수 길을 지나는 동안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훗날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1917년
전쟁중에 알라르츠리트*에서
찍은 학급 단체사진 속
공포에 얼어붙은 눈동자로
앞을 응시하는 아이와
다른 아이들은. 마흔여덟 명의
남루한 공동체
오른편에는 여교사
왼편에는 근시인
보좌신부, 지저분한
회색 마분지 뒷면에
적힌 글귀 '훗날 죽음이
우리의 발아래 엎드릴 것이다'
한 번 들으면 잊지 못할
음산한 예언. 내가 대형으로
인화하여 갖고 있는
또다른 사진에는 한 마리 백조와
검은 수면에 비친 백조의 그림자가
완벽한 평화의 상징으로 떠 있다.
내가 알기로, 그 연못 주변을 끼고
밤베르크의 레그니츠 강변에
식물원 시설이 있고,
요즘에는 도로 하나가
그곳을 가로질러간다고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독일적이라는 인상,
뒤쪽으로는 느릅나무와
짙은 초록의 침엽수 무리, 조그만
파고다, 갈퀴로 곱게 정리된
자갈, 수국, 붓꽃,
알로에, 청나래고사리,
그리고 장엽대황.
그 사진에 담겨 있는 사람들 또한
내 눈에는 경이롭기만 하다.
단추를 푼 외투 차림의 어머니,
앞으로 세월과 함께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릴 태평스러운 태도를 지닌. 그 곁에
좀 떨어져 서 있는 아버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그도 걱정 근심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
1943년 8월 26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27일 아버지는 드레스덴으로 떠났는데,
그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노라고,
언젠가 그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27일과 28일 사이의 밤,
582대의 전투기가
뉘른베르크에 폭격을 퍼부었다. 다음날 아침
알고이의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던 어머니는 기차로
퓌르트까지만 갈 수 있었다.
거기에서 어머니는
화염에 휩싸인 뉘른베르크를 보았으나,
불타는 도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떠한 감정이 들었는지
오늘날 더이상 기억해내지 못한다.
최근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날 퓌르트에서
빈츠하임의 아는 사람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
자신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고.
그 불타는 도시에 닥쳤던 일은
빈에 있는 미술사박물관
롯과 그의 딸들을 묘사한
알트도르퍼**의 그림으로
걸려 있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지평선을 달구고
불길은 거대한 도시를 파멸시킨다.
대지에서는 연기가 치솟고
날름거리는 불꽃이 하늘에 닿으며,
시뻘건 열기 속에서
어두운 윤곽으로 드러나는
건물의 정면.
그림 가운데 부분에는
초록의 목가적 풍경 한 조각,
그리고 관람객의 눈앞에서
모아브인의 새로운 혈통이
잉태되고 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도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는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후 프리덴스브뤼케
그 평화의 다리를 건너가면서는
마치 모든 이성이
거의 사라져버린 듯했다.
* 독일 남부 알고이 인근 지역인 올라르츠리트 Ollarzried를 가리킨다.
** Albrecht Altdorfer(1480~1538). 독일의 화가, 판화가, 건축가,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 유럽에서
처음으로 자연이라는 주제를 천착하여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이다.
W.G. 제발트(1944~2001):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깊은 반향을 일으킨 독일 작가. 1944년 5월 18일 독일 남부의 알고이 지역 베르타흐에서 태어나, 독일 프라이부르크와 스위스 프리부르에서 독일어문학을 공부했다. 1966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어학을 가르쳤다. 1970년부터 영국 노리치 지역에 있는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문예학을 가르쳤고, 1973년 알프레트 되블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오스트리아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 뒤, 1988년 이스트앵글리아 대학 독일어문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듬해 영국문학번역센터를 창립했다.
1988년 제발트는 이후에 이어질 작품세계를 예고하는 듯한 긴 산문시 세 편을 묶어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자연을 따라. 기초시』!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잊혀 있다가 한 미술사가의 발견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젠하임 제단화>의 화가 그뤼네발트, 의사이자 과학자로 러시아 시베리아 탐험에 동행했던 G.W. 슈텔러, 그리고 작가 자신 등 세 사람의 전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에는 이후 제발트 작품들에 나타날 암시와 이미지, 숨겨진 모티프들이 은밀하게 스케치되어 있다.
『현기증. 감정들』(1990), 『이민자들』(1992), 『토성의 고리』(1995) 등을 발표한 제발트는 '오늘날에도 위대한 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수전 손택의 찬사를 받음.
1999년에는 『공중전과 문학』으로 문학연구가이자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며 독일 사회에 민감한 반응과 거센 반론을 불러일으키기도. 2001년 『아우스터리츠』를 발표하며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그해 12월 영국 노리치 인근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음.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된 바 있으며, 베를린 문학상, 북독일 문학상, 하인리히 뵐 문학상,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도서상, 하인리히 하이네 문학상, 요제프 브라이트바흐 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사후에 브레멘 문학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