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의 꿈
나 죽으면
가로등이라도 되리.
그리하여,
너의 문 앞에서
창백한 저녁을 환히 비추리.
아니면 항구에서,
커다란 증기선들이 잠자고
아가씨들이 웃는
그곳에서 불침번 서며,
비좁고 더러운 운하 곁
홀로 걷는 이에게 깜빡이리.
좁은 골목
어느 선술집 앞에서
빨간 양철등으로 매달려,
상념에 잠기고
밤바람에 흔들리며
그네들의 노래가 되리.
아니면, 창틈으로
바람은 비명을 지르고
바깥 꿈들이 유령을 토해낼 때,
혼자 남은 걸 알고 놀라
휘둥그레진 아이의 눈망울에 번지는
등불이 되리.
그래, 나 죽으면
가로등이라도 되리.
그리하여,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
밤마다 홀로 저 달과
이야기를 나누리.
아주 사이좋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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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함부르크의 밤은
다른 도시처럼 보드라운
푸른색 여인이 아니다.
함부르크의 밤은 잿빛,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
빗속에 보초를 선다.
함부르크의 밤은
항구의 모든 술집에 깃든다.
가벼운 치마를 걸치고
좁은 벤치에서
그이들이 사랑을 나누며 웃을 때
유령처럼 살며시 다가가 맺어준다.
함부르크의 밤은
밤꾀꼬리의 음성으로
달콤한 멜로디를 지저귀지 않는다.
도시를 향해 울려대는
항구의 뱃고동 가락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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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빨강 초록의 대도시 연가
빨간 입술들, 잿빛 그늘 아래 불타오르며
달콤한 현기증을 속삭인다.
달은 안개 뭉치를 뚫고
금빛 초록으로 히죽인다.
잿빛 거리들 빨간 지붕들
가운데 초록 불빛 하나,
밤늦은 취객 소리쳐 노래하며
구겨진 얼굴로 집으로 간다.
잿빛 돌과 빨간 피,
내일 아침이면 만사 오케이.
내일이면 초록 잎 하나
잿빛 도시 위로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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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대도시라는 여신은 우리를 뱉어냈다.
이 황량한 돌의 바다 속으로
우리는 그녀의 숨결을 집어삼키고
그렇게 홀로 남겨졌다.
대도시라는 창녀는 우리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 연약하고 타락한 팔에 안겨 우리는
절뚝이며 쾌락과 고통을 통과했고
연민을 바라지 않았다.
대도시라는 어머니는 상냥하고 관대하다.
우리가 공허하고 피곤할 때면
그 잿빛 품 안에 우리를 받아들인다.
머리 위로 영원한 바람이 풍금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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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
-호에 블라이헨 거리를 생각하며
거대한 현재의 소음에서 멀리 떨어져,
쇠락을 두르고, 명예롭고 고독하게,
무언의 것들에 둘러싸여, 먼지 속에, 매혹적으로,
요염한 비더마이어* 찻잔이 몇 개 놓여 있다.
그 위에 창백하게 우뚝 선 황제,
그러나 근엄한 가슴엔 석고를 발랐다.
박제된 남쪽 바다 악어 한 마리
초록빛 유리 눈으로 취한 듯 히죽인다.
현왕(賢王) 샤를**의 청동 불쏘시개 걸이
부처의 배와 주름살 위에서 반짝인다.
곱슬머리 가발은 아직도
은은한 유혹의 분향을 담고 있다.
말레이시아 목제의 완고한 자태로 멍하니 바라보는 신.
물라토***의 납빛으로 반짝이는 이빨들.
녹슨 무기들은 전쟁을 꿈꾸며
렘브란트의 매끄러운 그늘 속에서 나지막이 잘그락거린다.
바로크 장롱 속 죽음의 벌레는
바싹 마른 벽 속에서 끝없이 똑딱인다.
파리 한 마리 구슬피 앵앵거리는 건----
쇼펜하우어 전집 13권에 내려앉은 탓이로다.
* Biedermeier: 19세기 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한 가구와 실내장식의 양식.
** 프랑스 국왕 샤를 5세(1338~1380)를 가리킨다.
*** 라틴아메리카의 백인과 흑인 사이의 혼혈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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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게시글은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문학과지성사)중,
시 part 「가로등과 밤 그리고 별-함부르크 시집」 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 1921~ 1947): 독일 함부르크의 에펜도르프에서 태어남.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시절 함부르크의 유력 일간지에 시를 발표하고, 졸업 후엔 서점 직원으로 일하면서 연극 수업을 받았음. 배우로 활동하던 중, 1941년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혹독한 전쟁 체험, 군 복무 중 자해 혐의로 투옥되면서, 감옥과 전장을 오가는 생활로 인해 병을 얻었다. 복무 불능 상태에 이름. 전역하고 전선극장에 투입 예정이었으나 괴벨스를 조롱했다는 동료들의 밀고로 전역 하루 전, 미결수로 구금되는 불행을 겪음. 1945년에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탈주한 그는, 함부르크로 돌아가 함부르크 극장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쓰러진다. 대부분의 작품을 죽음을 앞둔 2년 남짓의 기간 동안 병상에서 집필! 1947년 11월,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집 『가로등과 밤 그리고 별』 , 단편집 『민들레』, 희곡「문밖에서」 등.
'폐허문학'으로 대변되는 독일 전후 문학의 대표 작가로서, 종전 후 새로운 독일 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던 작가와 비평가들의 모임-'47그룹'에 영향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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